[뉴스비전e] 다음 문제는 시멘트공장을 어디에 짓느냐 하는 것이었다. 공장입지 선정에서도 우여곡절을 겪었다. 마음고생이 심했다. 나는 공장입지가 얼마나 중요한 것인지 잘 알고 있었다.시공사인 스미스에서 파견된 요원들과 건설위원회를 만들어 전국을 대상으로 후보지를 답사했다. 최종적으로 경북 문경과 충북 단양이 적당하다는 결론이 나왔다. 두 곳 모두 장점이 있었다. 단양이 석회석의 질이 좋았고, 문경은 휴전선에서 단양보다 좀 더 떨어져 있었다.김일환 상공부장관에게 결재를 올렸다. 그런데 중간에 정보가 새나갔다. 문경과 단양에 지역구를
[뉴스비전e] 휴전협상이 이루어진 1953년 피난생활을 끝내고 서울로 올라왔다. 중앙공업연구소가 있던 자리는 폐허가 된 상태였다. 나는 동료들과 함께 요업과와 무기화학과를 재건하는 데 전력을 쏟았다.전쟁으로 폐허가 된 산하를 복구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건설자재를 확보하는 것이 급선무였다. 시멘트는 한국전쟁 직후 복구과정에서 필수적인 공업으로 떠올랐다.하지만 당시 우리나라 시멘트공업은 형편없었다. 해방 당시 38선 이남의 시멘트공장은 오노다삼척공장이 유일했다.(이 공장은 1957년 동양시멘트공업이 설립되면서 흡수된다.) 여기서 나오는
[뉴스비전e] 큰형은 1950년 11월 20일경에 평양 황금동집으로 갔다. 평양이 수복된 후에도 부모님의 생사도 몰라 하루 빨리 가보려고 했지만 민간인이 휴전선을 넘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했다.형님의 의대 동기가 공군 준장 의무감으로 있었는데 평양 가는 공군 트럭을 주선해주어 조수석에 앉아 갔다. 가는 길 곳곳에 유엔군이 표지판을 설치해 놓았는데 ‘Sariwon(사리원)’, ‘Pyongyang(평양)’이란 글자가 인상적이었다. 소련군이 진주했을 때는 그런 영어 지명을 볼 수 없었기 때문이다.집에 가보니 아버지, 어머니, 할머니가 계셨
[뉴스비전e] 나는 아내의 선견지명과 기지로 무사히 서울 수복을 보았지만, 큰형과 매부(기진의 남편)를 포함한 의대 사람들은 여간 곤혹을 치른 것이 아니었다.서울이 함락되자마자 이북에서 온 사람들이 학교를 접수하고 자기네 사람들로 장을 임명했다. 서울대학병원장에 큰형의 동급생이 임명되었는데 먼저 월북했다가 남침 때 온 것이었다. 그는 큰형에게 큰 선심이나 쓰듯 충고했다.“절대로 표 나게 행동하지 마라. 이북 사람들 눈 밖에 나면 안 돼!”원래 서울에 있던 친구 몇도 인민군이 내려오자 기다렸다는 듯 그들에게 붙어 사람들을 못살게 굴었
[뉴스비전e] 전쟁 중에 아내 덕분에 목숨을 건진 또 한 번의 순간이 있었다.제자들의 도움으로 위기를 모면한 이후에 나는 모처에 피해 있다가 집에 가끔씩 들를 때면 언제 또 인민군들이 들이닥칠지 몰라 다락방에 숨어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 인민군들이 들이닥쳤다.당시 나는 다락방에 숨어 있어 아래층에서 벌어진 긴박한 상황을 알지 못했지만, 나중에 아내에게 들은 얘기는 그야말로 일촉즉발의 위험천만한 순간이었다.군화발로 들이닥친 인민군들은 다짜고짜 아내에게 남편이 숨어 있는 곳을 대라고 위협했다.말로만 위협하는 게 아니라 총부리를 등에
[뉴스비전e] 해방과 동시에 북쪽에는 곧 소련군이 들어와 38선까지 포진했고, 미군은 9월 말 남쪽으로 들어와 38선을 사이에 두고 나라가 두 동강이 났다.해방정국은 혼란스럽기 그지없었고 미군정에 이어 남한에서 단독 정부가 수립된 이후에도 여전히 갈등과 분쟁은 끊이지 않고 전운마저 감돌고 있었다.38선은 초기에는 감시가 그리 심하지 않아 사람들이 쉽게 왕래할 수 있었지만, 1948년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되기 직전에는 폐쇄되다시피 해 사람의 왕래가 거의 끊겼다.아버지는 1947년까지 세 차례 정도 서울에 다녀가셨다. 청단을 거쳐 38
[뉴스비전e] 사실 소싯적 꿈은 교수였다. 하지만 학교에 계속 남을 수가 없었다. 해방 직후 독립된 나라에서는 해야 할 일이 너무 많았기 때문이다.1946년 나는 중앙공업연구소에 들어갔다. 많은 과학기술인재가 그곳에 입소했는데 나도 합류했다. 미군정 하이긴 했지만 그래도 해방된 조국에서 내가 배운 것을 펼칠 기회가 생긴 것은 축복이었다.중앙공업연구소는 구한말인 1883년 화폐주조 및 금속광물의 분석, 가공, 제련하는 전환국 소속의 분석시험소에서 시작되었다. 1907년 농상공부 공업전습소, 일제의 강점이 시작된 1910년 조선총독부
[뉴스비전e] 1937년 중일전쟁을 계기로 조선총독부는 ‘국민총동원체제’를 마련했다. 이에 따라 일본육군특별지원병제도(1938), 총동원물자사용령(1939), 국민징용령(1939), 학도지원병제도(1943), 징병제도(1944), 여자정신대근무령(1944) 등을 공포해 우리나라를 대륙 침략의 병참기지로 삼았다.내가 경성제대 1학년 말이던 1941년 12월 8일, 일제는 미국과 영국을 상대로 태평양전쟁을 일으켰다. 처음에는 진주만 기습으로 전과를 올리는 듯했다. 하지만 그것은 잠자는 사자의 코털을 건드린 것이었다.1943년에 접어들며
[뉴스비전e] 아내를 처음 만난 건 1941년 경성제대 1학년 때였다. 방학 때 평양 고향집에 들렀는데, 아버지께서 부르시더니 말씀하셨다.“좋은 처자가 있으니 결혼하거라.”좋은 처자가 있으니 한번 만나보라는 것도 아니고 무조건 결혼을 하라시니! 얼굴도 모르는 사람과 결혼하는 것이 하나도 이상하지 않던 시절이었다. 그 처자는 아버지 친구의 딸이었고 아버지는 친구와 이미 모든 얘기를 끝낸 상태였다.신교육을 받으시고 평양에서 개업의로 활동하시던 아버지도 결혼에 관한한 보수적이셨다. 혼인이란 인륜지대사로 집안 간에 이루어지는 것이지 자유연
[뉴스비전e] 경성제대는 이공학부가 처음 생기다 보니 교수와 학생만 있을 뿐 어느 것 하나 제대로 갖춘 것이 없었다. 아직 강의실과 실험실조차 없었다. 동숭동 법문학부 뒤 구석 단층 목조건물에 임시 이공학부 본부를 설치했는데 초라하기 짝이 없었다.우리 응용화학과 학생들은 1년 동안 법문학부에서 곁방살이를 해야 했다. 법문학부 강의실 가운데 빈 곳을 찾아다니며 강의를 들어야 했다. 실험실도 여기저기 돌아다니며 빌려 써야 했다. 화학실험은 의학부 화학실험실에서, 물리실험은 청량리에 있는 예과 물리실험실을 빌려서 했다.공부하는시간보다 이
[뉴스비전e] 조선에서도 공학을 공부할 수 있게 되었다는 기쁨도 잠시, 나는 커다란 난관에 부닥치고 말았다. 1941년 봄, 입학한 지 보름쯤 지났을 때 지도교수가 나를 호출했다.“총장께서 자네를 보자 하시네. 어서 총장실로 가보게.”당시 총장은 일본인이었는데, 총장이 신입생을 따로 부른다는 것은 상상도 하기 힘든 일이었다. ‘경성제대 총장’ 하면 조선총독, 동양척식주식회사 총재 다음으로 조선에서 권력 서열 3위로 통하는 실세였다.‘도대체 그런 일본인 총장이 조선인 신입생인 나를 부를 까닭이 무엇인가?’나는 다소 긴장되어 총장실로
[뉴스비전e] 아버지의 뜻이기도 했지만, 공학은 나의 적성에도 잘 맞았다. 어린 시절부터 그쪽에 재능과 취미가 있음을 아버지께서 간파하셨는지도 모를 일이다. 무엇이든 한 가지를 시작하면 밥 먹는 것도 잊고 몰두해 파고들던 나였다.기섭이 형이 갑작스레 병으로 세상을 떠나지 않았다면 나 역시 형님을 따라 동경제대 공학부에 진학했을 것이다. 어머니의 부름으로 귀국한 것을 후회하지는 않았지만, 동경제대 공대를 눈앞에서 포기한 것은 못내 아쉬움으로 남아 있었다. 더 큰 문제는 내가 원하는 공학을 공부할 만한 곳이 당시 조선에는 없다는 사실이
[뉴스비전e] 촉망받던 아들을 잃은 부모님은 하늘이 무너지는 충격을 받으셨다. 급기야 어머니께서는 동경제대 입학을 코앞에 둔 나에게 급전을 쳤다.“기동아, 동경제대에 들어갈 생각 말고 속히 조선으로 돌아오거라!”어머니는 형이 죽은 것이 동경제대에 다녔기 때문이라고 생각하고 계셨다. 식민지에서 유학 온 학생이어서 심신이 고달파 몹쓸 병을 얻은 것이라고 여기셨던 것이다. 쌍둥이를 모두 잃을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에 나를 불러들이려 하신 것이다.조선학생에게는 하늘의 별 따기보다 힘든 동경제대를 포기한다는 것은 쉽지 않은 결정이었지만, 그렇게
[뉴스비전e] 기섭이 형은 동경제대 법학부 1학년에, 나는 6고 이과 3학년을 마치고 동경제대 공학부 입학을 코앞에 두고 있었다. 바로 그때 진로를 바꿀 수밖에 없는 커다란 불행이 찾아왔다. 기섭이 형이 갑자기 세상을 떠난 것이다.겨울방학에 기섭이 형은 도쿄에 있었다. 당시 도쿄에서는 전일본고등학교축구대전(Inter-highschool match)이 열리고 있었다. 기섭이 형이 나온 사가고 대표팀도 도쿄에 왔다. 기섭이 형은 사가고 시절 축구도 잘했고 후배들을 끔찍하게 아끼는 의리파였다.선배로서 도쿄에 온 후배 선수들을 돌보아주었는
[뉴스비전e] 6고 시절 추억이 있다. 1학년 때는 학교 기숙사에 있다가 2학년이 되면서 기숙사를 나와 하숙을 해야 했다. 리어카에 책과 몇 가지 세간을 싣고 여기저기 끌고 다니며 하숙집을 찾아보았다. 유학생의 설움 같은 것은 없었다 해도 ‘조선인라고 하숙을 주지 않으면 어쩌나?’ 하는 걱정이 없지 않았다.당시 외지인들 가운데 인근 섬에서 온 사람들이 있었는데 그중엔 한센병 환자가 종종 있어 모르는 사람은 집에 들이기를 꺼리는 분위기였다.몇 군데 퇴짜를 맞고 헤매다가 어느 집 문을 두드렸는데, 인자하게 생긴 아주머니가 반갑게 인사를
[뉴스비전e] 1937년 내가 6고 입학에 성공하면서 큰형은 경성제대 의학부 1학년, 기섭이 형은 사가고 2학년, 나는 6고 1학년으로 모두 최고 명문학교에 다니게 되었다. 3형제가 이렇게 공부를 잘하기는 평양은 물론 조선에서도 우리밖에 없었을 것이다. 아버지와 어머니는 더없이 자랑스러워하셨다.큰형은 의학부 1학년이 되면서 사각모를 쓰고 예과 때보다 행동도 의젓해진 것 같았다. 본과에 올라오면 마음가짐도 달라지는 모양이었다. 예과의 학과는 교양과목이 많았으나 본과에서는 전부 의학이었다. 1학기 중간쯤 사체해부가 시작되었는데, 큰형은
[뉴스비전e] 나는 일본 6고 신입생이 되었고, 기섭이 형은 나보다 1년 앞서 일본으로 건너가 사가고에 다니고 있었다. 형제가 6고와 사가고에 들어간 것은 평안도는 물론 조선반도 전체가 들썩일 만큼 엄청난 사건이었다.요즘 사람들은 그저 일본에 있는 고등학교에 들어간 것쯤으로 생각할 수도 있지만, 그건 당시의 일본 학교체계를 모르고 하는 소리다. 당시 일본의 고등학교를 지금의 새로운 제도(新制)의 고등학교와 구분하기 위해 ‘구제(舊制)고등학교’라고 부른다. 이름은 고등학교이지만 지금의 대학에 버금가는 수준이었다. 실제로 당시 구제고등
[뉴스비전e] 나는 중학교 때 집과 학교를 오가며 공부하는 것 외에는 전혀 마음을 쓰지 않아 전 학년을 개근했다. 집에서 학교까지 25분쯤 걸렸다.졸업 때 우등상과 함께 개근상을 받았는데 당시에는 엄청난 사건이었다. 의료시스템이 제대로 갖추어지지 않았던 1930년대에는 아이들이 허약하고 병치레가 잦아 개근한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했다. 하지만 나는 아무리 아파도 기어서라도 학교에 갔다. 그건 아버지의 철칙이기도 했다.우등상과 함께 개근상을 받았다고 신문에 사진까지 실렸다. 모두 다섯 명의 졸업생이 실렸는데 일본인학교의 유일한 조선인
[뉴스비전e] 수옥리에 살 때 집 뒤에 남산이 있었다. 나는 그 고갯마루에 있는 교회(당시에는 예배당이라고 했다)의 유치원에 다녔다. 일요일에 교회에서 예쁜 딱지를 얻어온 기억도 난다.수옥리에서는 종로보통학교에 다녔는데, 전차 정류장 두 개쯤으로 멀지는 않았다. 나는 1학년도 마치지 못하고 집이 황금동으로 이사하면서 약송보통학교로 전학했다. 약송보통학교는 꽤 넓은 교정에 있는 2층 목조건물이었다. 집에서 20분 거리였는데 여름에는 서양식 바지에 셔츠를 입고, 겨울에는 한복 바지저고리에 두루마기를 입고 다녔다.6학년 때 신의주와 만주
[뉴스비전e] 아버지는 아주 명철하고 꼼꼼한 분이셨다. 현미경으로 들여다보듯 사물이나 현상을 세밀하게 관찰하고 분석하셨다.대범할 때는 대범하셨지만 평소에는 잔소리를 많이 하셨다. 어머니보다 훨씬 심하셨는데, 어머니가 하나하나 따르기가 힘들었을 정도다.바닥에 먼지 한 점이라도 보인다 싶으면 절대로 그냥 넘어가는 법이 없었다. 기숙사 사감처럼 검지로 먼지를 찍어 시커멓게 된 손가락을 치켜세우며 말씀하셨다.“여기 먼지 좀 봐라. 병원 하는 집에 먼지가 있으면 되겠느냐?”우리 4남매는 어떻게든 아버지의 잔소리를 모른 체하고 피하려 했지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