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비전e] 사실 소싯적 꿈은 교수였다. 하지만 학교에 계속 남을 수가 없었다. 해방 직후 독립된 나라에서는 해야 할 일이 너무 많았기 때문이다.

1946년 나는 중앙공업연구소에 들어갔다. 많은 과학기술인재가 그곳에 입소했는데 나도 합류했다. 미군정 하이긴 했지만 그래도 해방된 조국에서 내가 배운 것을 펼칠 기회가 생긴 것은 축복이었다.

중앙공업연구소는 구한말인 1883년 화폐주조 및 금속광물의 분석, 가공, 제련하는 전환국 소속의 분석시험소에서 시작되었다. 1907년 농상공부 공업전습소, 일제의 강점이 시작된 1910년 조선총독부 공업전습소, 1912년 중앙시험소를 거쳐 해방 후 1946년 중앙공업연구소로 명칭을 변경했다. 공업에 관한 과학연구와 기술시험연구와 지도, 공업물료(物料) 시험, 분석 및 감정을 관장했다. 중앙공업연구소는 당시 독립한 우리나라 과학기술계의 메카였다.

중앙공업연구소의 리더는 ‘안동혁’이라는 화학공학자였다. 안 소장은 1926년 경성고등공업학교 응용화학과를 나와 큐슈제국대학 응용화학과를 졸업하고 경성고등공업학교 조교수, 중앙시험소 화학공업부장을 맡는 등 식민지 시절 조선인으로는 드물게 고급기술직에 종사했다.

중앙시험소를 중심으로 유지(油脂)를 연구해 비누제조법 등의 특허를 출원했다. 전국을 답사해 수질, 수량, 지질 상태 등을 조사해 공업용수조사보고서를 작성했는데, 해방 이후 공업 발전에 중요한 기초가 되었다. 1934년 과학지식보급회 이사로 과학대중화에도 앞장서 과학잡지 <과학조선>, <과학시대>를 간행하기도 했다.

해방 직후에는 중앙시험소와 경성고등공업학교를 일제로부터 접수해 이들 기관을 재편했다. 경성고등공업학교가 1946년 서울대로 편입되기 전까지 경성공업대학으로 승격시키고 조선, 항공, 전기통신과를 신설했다.

조선학술원 기술부, 조선공업기술연맹을 조직해 일본 기술자들이 빠져나간 인력공백 상태에서 각 부서에 한국인 기술자들을 물색해 보충하고 식품공업과와 기계공작과를 신설해 신생 독립국가의 기술적 수요에 대비하고자 했다. 조선공업기술연맹 산하에 화학, 요업, 식품 기술협회도 조직했다. 이 단체들은 해방 직후의 혼란기에 국내 산업이 그나마 가동될 수 있게 했다.

안 소장은 나에게 “모든 산업의 소재를 공급하는 화학산업이 국가 재건의 핵심”임을 강조했다. 휴전 직후 안 소장은 상공부장관으로 재직하면서 자금, 에너지, 비료로 대표되는 3F(Fund, Force fuel, Fertilizer) 산업정책을 추진해 경제발전의 토대를 마련했다.

그 후 한양대 공대 교수로 자리를 옮겨 많은 후학을 길러냈다. 그는 2003년 과학기술인 명예의 전당이 설치될 때 첫 헌정자 14명에 포함되었다.

인재공백기 중앙공업연구소 연구원들

1948년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되고 중앙공업연구소도 상공부 산하로 개편되면서 체계를 갖추어 나갔다. 나는 지질광물연구소 소장을 거쳐 전공과 밀접한 요업과를 맡아 책임지게 되었다.

나는 요업과장으로 대한민국 요업의 기반을 닦는 데 혼신의 힘을 쏟았다. 공업시험을 하면서 기술지도를 하고 기술자도 양성하는 등 초창기 시험소의 업무 확충에 총력을 기울였다. 당시 연구소 뒤에는 도자기 가마가 세 개나 있었다. 도자기 가마에서 젊은 인재들을 위한 실습 과정을 만들어 가르쳤다. 전국에 분포된 요업자원을 탐사해 표본을 만들기도 했다.

중앙공업연구소 요업과는 이후 국립공업연구소 산하 마산도자기시험소, 중소기업청 국립기술품질원 요업기술원, 산업자원부 기술표준원 요업기술원을 거쳐 오늘날 ‘한국세라믹기술원’으로 발전해 왔다.

전기, 전자, 생활, 환경, 기계, 구조, 에너지, 디스플레이, 바이오, 의학, 환경, 우주 항공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영역의 첨단 세라믹 소재 원천・핵심 기술 연구개발을 수행하고 신뢰성 있는 시험, 분석, 평가, 개발기술 실용화 지원, 생산기반 구축 지원, 국가 표준 및 인증, 인재육성, 기술교류 및 협력, 기술지도 및 상담 등 세라믹 소재에서 부품, 제품개발까지 주도하고 있다.

1948년 건국 당시 대한민국이 처한 현실은 참혹했다. 1인당 국민소득 35달러, 문맹률 78퍼센트, 고등교육을 받은 인재가 2만 6,000명에 불과한 지구상 최빈국 중 하나였다.

게다가 한반도의 허리가 38선으로 가로막히면서 북에서 공급되던 전력, 지하자원, 비료 등이 끊겨 이남은 산업이 마비상태에 빠졌다. 인구는 남한이 2,200만, 북한이 900만이었지만 발전설비는 각각 11.5퍼센트, 88.5퍼센트를 차지하고 있었다. 남한의 전력 소비량 10만 킬로와트 중 7만1,000킬로와트를 북한의 송전에 의지했는데, 제헌의원선거가 끝난 직후인 1948년 5월 북한이 송전을 끊어버려 남한은 암흑천지가 되었다.

당시 나는 요업과장으로 엔지니어들을 지도하기는 했지만, 여전히 인재는 턱없이 부족했다. 후학 양성을 위한 나의 열정을 불태우기에 중앙공업연구소는 너무 좁았다. 그래서 틈틈이 교수진이 부족한 모교 서울대 공대를 비롯해 고려대, 한양대 등에 출강해 후진을 양성하는 데 힘을 보탰다.

후학들에게 지식을 전해주겠다는 생각으로 강의에 몰두했다. 다행히 일본인 교수가 놓고 간 전공 관련 서적들이 큰 도움이 되었다. 다른 과 교수들은 대부분 자료를 일본으로 가져갔는데 나의 지도교수는 일본으로 떠나기 전에 이미 졸업한 나를 따로 불러 “자네에게 모두 주고 갈 테니 유용하게 쓰라”하고 당부했다.

해방은 되었지만 아무것도 없는 조국에서 배우고 가르치는 것이 가장 확실한 투자라고 생각했다.

◆ 남기동 선생은...

1919년 평양에서 태어났다. 올해로 100살이다. 일본 제6고등학교를 수석으로 졸업하고 경성제국대학 신생 이공학부 응용화학과에 편입했다. 1946년 중앙공업연구소 지질광물연구소장, 요업 과장으로 근무하며 서울대, 고려대, 한양대 등에도 출강했다. 부산 피난 중에도 연구하며 공학도들을 가르쳤다. 6·25 후 운크라 건설위원장을 맡아 1957년 연산 20만 톤 규모의 문경시멘트공장을 건설했다. 화학과장, 공업국 기감(技監)으로 인천판유리공장, 충주비료공장 등 공장 건설 및 복구사업을 추진했다. 1960년 국내 대학 최초로 한양대에 요업공학과를 창설하고 학과장을 맡았다. 1962년 쌍용양회로 옮겨 서독 훔볼트의 신기술 ‘SP킬른(Kiln)’ 방식으로 1964년 연산 40만 톤 규모의 영월공장을 준공했는데, 최단 공사기간을 기록해 은탑산업훈장을 받았다. 영월공장 준공으로 우리나라는 시멘트 수출국으로 부상했다. 1968년 건설한 동해공장은 단위공장으로는 세계 최대 규모였다. 공장 증설을 거듭해 1992년 우리나라 시멘트 생산량은 세계 5위가 되었다. 1978년 동양시멘트로 자리를 옮겨 2차 오일쇼크 때 시멘트 생산 연료를 벙커씨유에서 유연탄으로 대체하는 기술을 개발, 특허 대신 공개를 택해 업계를 위기에서 살려냈다. 이 공적으로 1981년 '3·1 문화상(기술상)'을 받았다. 인도네시아 수하르토(Suharto) 대통령 요청으로 1992년 인도네시아 최초의 시멘트공장인 '시비뇽 시멘트플랜트(P.T. SEMEN CIBINONG)'를 건설했다. 한국요업(세라믹) 학회, 한국화학공학회, 대한화학회등 3개 학회, 대한요업총협회(지금의 한국세라믹총협회) 회장으로 학계와 산업계의 유대를 다졌다. 학교, 연구소, 산업체가 참석하는 '시멘트심포지엄'을 개최하고, 한일국제세라믹스세미나를 조직해 학술교류는 물론 민간교류에도 힘썼다. 세라믹학회는 그의 호를 따 장학지원 프로그램인 '양송 상'을 제정했다. 1993년 인하대에서 명예공학박사 학위를 받고, 2006년 서울대 설립 60돌 기념 '한국을 일으킨 60인' 상, 2007년 세라믹학회 창립 50주년 특별공로상을 받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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