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민국 시멘트산업의 살아있는 역사] 남기동 회고록(47) 70년이 되어버린 기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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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 시멘트산업의 살아있는 역사] 남기동 회고록(47) 70년이 되어버린 기약
  • 남기동
  • 승인 2019.06.09 09: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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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스비전e] 큰형은 1950년 11월 20일경에 평양 황금동집으로 갔다. 평양이 수복된 후에도 부모님의 생사도 몰라 하루 빨리 가보려고 했지만 민간인이 휴전선을 넘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했다.

형님의 의대 동기가 공군 준장 의무감으로 있었는데 평양 가는 공군 트럭을 주선해주어 조수석에 앉아 갔다. 가는 길 곳곳에 유엔군이 표지판을 설치해 놓았는데 ‘Sariwon(사리원)’, ‘Pyongyang(평양)’이란 글자가 인상적이었다. 소련군이 진주했을 때는 그런 영어 지명을 볼 수 없었기 때문이다.

집에 가보니 아버지, 어머니, 할머니가 계셨다. 할머니는 그때 연세가 97세인데 건강하셨고 서울에 있는 손자들의 근황을 물어보시기도 했다.

아버지는 59세로 백발이 많으셨고 어머니는 55세로 도와주는 일손 없이 홀로 부엌일을 하고 계셨다. 의대 선배가 평양에 끌려왔다 도망쳐 집에서 오래 묵다 갔다는 얘기도 그때 들었다.
가락골 큰집 어른들도 건재하시다고 했다. 인민군이 서울에 있는 동안 세브란스병원을 접수해 원장을 했던 집안 형님의 소식은 알 수 없었다. 전에 큰형에게 충고한 대로 ‘시류에 따라’ 어딘가로 숨어버린 모양이었다.

외삼촌은 평양을 떠나 계셔 뵐 수 없었다. 난중에 외할아버지가 돌아가셨다. 아무도 거둘 사람이 없어 사돈인 아버지가 외가 집 뜰에 묻으셨다고 한다. 처참한 일이 아닐 수 없었다. 그 후에 외삼촌네가 그 집으로 돌아오셨는지는 알 길이 없다. 외할머니는 몇 해 전에 기차사고로 돌아가셨었다.

외삼촌의 둘째아들은 평양에서 중학교에 다니다가 의용군으로 전선에 투입되었다. 전쟁 중에 유엔군 포로가 되어 수용소에 갇혀 있다가 반공포로 석방 때 자유의 몸이 되어 서울에 살게 되었다. 의용군으로 끌려 간 것이 남으로 내려와 살게 된 계기가 된 셈이었다.

큰형이 평양에서 며칠을 지내는데 유엔군의 움직임이 심상치 않았다. 탱크가 진행방향과 반대로 포신을 돌려놓고 대동강을 건너 남하하는 것이 자주 목격되었다. 국군 정훈부대가 곳곳에 방을 붙여놓았다.

「유엔군의 작전상 교대이니 시민들은 동요하지 마시오.」

나중에 보니 새빨간 거짓말이었다. 미8군사령관으로 부임한 매튜 리지웨이(Matthew B. Ridgway) 장군의 대후퇴작전이었던 것이다. 중공군이 참전해 밀려오자 유엔군이 후퇴한 것이다.

아버지는 상황이 이상하다며 큰형에게 빨리 서울로 돌아가라고 하셨다. 큰형은 아버지, 어머니에게 함께 내려가자고 했다. 하지만 아버지는 그럴 수 없었다. 거동이 불편한 아흔일곱 노모를 차마 모시고 내려갈 수 없었던 것이다. 후일을 기약하고 큰형만 먼저 집을 나섰다. 그것이 마지막이었다. 후일은 반세기를 넘어 어느덧 70년이 다 되어간다.

큰형이 평양으로 출발하기 전에 공군 준장 친구가 말했었다.

“평양에서 내려올 상황이 되면 평양 동대원 비행장으로 가거라. 우리 공군의 장덕창 장군에게 내 친구라 하고 부탁하면 도움을 줄 거야. 몸조심해.”

그러나 큰형은 장덕창 장군을 만나지 못했다. 이미 공군은 평양비행장을 철수해 서울로 돌아가고 없었다.

그래서 생각해낸 것이 육군병원이었다. 거기에는 서울대 의대 졸업생이 있을 것 같았다. 제27육군병원이 평양의대와 연계된 병원에 진주하고 있었는데 다행히 아직 떠나지 않은 상태였다. 27병원에서 하룻밤을 자고 선교리로 이동했다.

그날 밤 강변에 있던 유엔군 화약고가 화염에 휩싸이고 빨간 불꽃을 꼬리에 단 총알들이 이리저리 날아가는 것을 보았다. 이동병원은 대동강을 건너 평양역으로 와서 기차를 타고 남포로 갔다. 부상자들은 응급처지만 겨우 한 상태였는데, 살려달라는 비명소리가 끊이지 않았다. 퇴각하는 군대란 비참한 것이었다.

남포에서 1만 톤이 넘는 미군 수송선을 타고 도착한 곳은 부산항이었다. 배에는 부상자 외에도 많은 피난민이 타고 있었는데 영어를 하는 사람이 큰형밖에 없어 통역을 맡았다.

서울로 온 큰형은 명륜동 집에서 이틀만 머물다 가족을 데리고 부산으로 피난을 떠났다. 그 사이 의대에서는 큰형이 평양에 갔다가 돌아오지 못했다고 야단이 났었다고 한다.

나도 가족을 데리고 부산으로 피난을 내려왔다. 부산 피난 중에 국방부 병기행정본부 문관으로도 근무하기는 했지만, 수입이 턱없이 적어 생계가 위태로울 지경이었다. 당시 부산으로 피난 온 사람들이 다 그랬지만, 송도 산꼭대기 판잣집에 살면서 먹을 것이 부족해 끼니를 거를 때도 많았다.

큰아들 광준이가 그때 아홉 살이었는데 그 어린 것을 데리고 나가 먹을 것을 구하러 다니기도 했다. 시장바닥에 버려진 시래기를 주워오거나 바닷가에 나가 파도에 떠밀려온 미역이나 다시마 같은 것을 갈퀴로 긁어온 적도 있다. 어쩌다 성게 같은 걸 발견하면 횡재를 했다고 좋아하기도 했다. 어린 나이에도 동생들을 먹이겠다며 파도가 밀려가길 기다렸다 얼른 쫓아가 고사리손으로 미역을 건져오는 광준이가 대견하면서도 가슴이 아팠다. 전쟁은 어른을 무력하게 하고 아이를 일찍 철들게 한다.

그렇게 주워온 먹을거리를 판잣집에서 일곱 식구가 옹기종기 앉아 먹었다. 다섯째 광선이가 태어났을 때는 산모가 제대로 먹지 못하는 게 가슴 아팠다. 그 시절 밥보다는 감자를 주식으로 먹었다.

서울에 올라와서도 한동안 곤궁하기는 마찬가지였다. 아이들은 당시 혜화국민학교에서 우유가루를 배급받아 물에 타 먹거나 집에 가져와 끓여 먹었다. 동네 아이들과 함께 보성중고등학교에 주둔했던 영국군에게 과자와 껌 같은 것을 얻어먹기도 했다. 배고픈 시절이었다.

전쟁의 화를 면한 영남과 호남 일부 지역에 흩어져 있던 요업협회 회원들이 지원과 협력을 아끼지 않았다. 피난 직후에는 대한도기㈜ 지영진 사장의 특별한 배려로 본사 건물 2층에서 겨울을 났고 이듬해 봄에는 부산 중앙동에 있는 백두산선필회사 이상면 사장의 후의로 그 사업장 안에 연락소를 설치하고 업계 사람들과 연구했다.

전시 중에 피난생활을 하고 있었지만, 연구활동까지 중단할 수는 없었다. 어쩌면 그것만이 희망을 잃지 않는 유일한 방법이었는지 모른다. 부산 영도에 있던 대한도기㈜에 시험실을 마련해 나와 이종근을 주축으로 연구를 지속했다. 연구를 하면서도 피난 온 학생들의 교육을 맡았으니 한기성, 홍도정 등이 그 멤버들이었다.

◆ 남기동 선생은...

1919년 평양에서 태어났다. 올해로 100살이다. 일본 제6고등학교를 수석으로 졸업하고 경성제국대학 신생 이공학부 응용화학과에 편입했다. 1946년 중앙공업연구소 지질광물연구소장, 요업 과장으로 근무하며 서울대, 고려대, 한양대 등에도 출강했다. 부산 피난 중에도 연구하며 공학도들을 가르쳤다. 6·25 후 운크라 건설위원장을 맡아 1957년 연산 20만 톤 규모의 문경시멘트공장을 건설했다. 화학과장, 공업국 기감(技監)으로 인천판유리공장, 충주비료공장 등 공장 건설 및 복구사업을 추진했다. 1960년 국내 대학 최초로 한양대에 요업공학과를 창설하고 학과장을 맡았다. 1962년 쌍용양회로 옮겨 서독 훔볼트의 신기술 ‘SP킬른(Kiln)’ 방식으로 1964년 연산 40만 톤 규모의 영월공장을 준공했는데, 최단 공사기간을 기록해 은탑산업훈장을 받았다. 영월공장 준공으로 우리나라는 시멘트 수출국으로 부상했다. 1968년 건설한 동해공장은 단위공장으로는 세계 최대 규모였다. 공장 증설을 거듭해 1992년 우리나라 시멘트 생산량은 세계 5위가 되었다. 1978년 동양시멘트로 자리를 옮겨 2차 오일쇼크 때 시멘트 생산 연료를 벙커씨유에서 유연탄으로 대체하는 기술을 개발, 특허 대신 공개를 택해 업계를 위기에서 살려냈다. 이 공적으로 1981년 '3·1 문화상(기술상)'을 받았다. 인도네시아 수하르토(Suharto) 대통령 요청으로 1992년 인도네시아 최초의 시멘트공장인 '시비뇽 시멘트플랜트(P.T. SEMEN CIBINONG)'를 건설했다. 한국요업(세라믹) 학회, 한국화학공학회, 대한화학회등 3개 학회, 대한요업총협회(지금의 한국세라믹총협회) 회장으로 학계와 산업계의 유대를 다졌다. 학교, 연구소, 산업체가 참석하는 '시멘트심포지엄'을 개최하고, 한일국제세라믹스세미나를 조직해 학술교류는 물론 민간교류에도 힘썼다. 세라믹학회는 그의 호를 따 장학지원 프로그램인 '양송 상'을 제정했다. 1993년 인하대에서 명예공학박사 학위를 받고, 2006년 서울대 설립 60돌 기념 '한국을 일으킨 60인' 상, 2007년 세라믹학회 창립 50주년 특별공로상을 받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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