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비전e] 전쟁 중에 아내 덕분에 목숨을 건진 또 한 번의 순간이 있었다.

제자들의 도움으로 위기를 모면한 이후에 나는 모처에 피해 있다가 집에 가끔씩 들를 때면 언제 또 인민군들이 들이닥칠지 몰라 다락방에 숨어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 인민군들이 들이닥쳤다.

당시 나는 다락방에 숨어 있어 아래층에서 벌어진 긴박한 상황을 알지 못했지만, 나중에 아내에게 들은 얘기는 그야말로 일촉즉발의 위험천만한 순간이었다.

군화발로 들이닥친 인민군들은 다짜고짜 아내에게 남편이 숨어 있는 곳을 대라고 위협했다.

말로만 위협하는 게 아니라 총부리를 등에 대었는데 총구 끝에 장착된 대검 끝이 옷을 뚫고 살을 쿡쿡 찌르는 것이 느껴졌다고 한다. 내가 숨어 있는 곳을 불지 않으면 금방이라고 찌를 기세로 몰아붙였다고 한다.

“남편 어디에 숨겨두었소? 죽고 싶지 않으면 날래 말하기오!”

바로 그때 아내는 대답 대신 눈짓으로 벽을 가리켰다. 추궁하던 인민군 간부는 내가 벽장에라도 숨어 있나 싶어 그쪽을 쳐다보았다. 그런데 놀랍게도 그곳에는 김일성 사진이 떡 하니 붙어 있었다.

경성제대 이공학부 동기동창 부부동반 모임(혜화동 집에서)

서울이 인민군 치하에 들어간 직후 점령군들은 인공기와 김일성 사진을 전단처럼 살포했는데, 아내는 그걸 주워와 벽에 붙여두었던 것이다. 언제라도 이런 긴박한 순간이 생길 것을 알고 대비한 것이다.

자신들이 하늘처럼 모시는 김일성 사진이 집 안 벽에 붙어 있는 것을 본 인민군 간부는 부하를 향해 총을 거두라고 눈짓했다. 남한 가정집에 김일성 사진이 버젓이 걸려 있을 거라고는 상상도 못했을 것이다. 설령 진심이 아니라 해도 기분 나쁘지 않은 상황이었다. 꽤나 흐뭇한 미소를 지으며 간부가 물었다.

“그런데 동무, 저 사진이 누구 사진인 줄 아시오?”

아내는 기회다 싶어 큰 소리로 말했다. 군인들을 흉내 내기라도 하듯 차렷 자세까지 취한 채로 말이다.

“네, 김일성 대통령이십니다!”

순간 인민군 간부는 웃음을 터뜨렸다.

“이 보라우, 대통령이 뭐이오? 수령님이라고 해야디!”

아뿔싸! 아내는 이승만 대통령이라고 하듯 김일성도 대통령이라고 해야 하는 줄 알았던 것이다. 당연한 추론이었다. 아내는 당황했지만 다시 큰 목소리로 정정했다.

“네, 김일성 수령님이십니다.”

“그렇디, 그래야디.”

‘수령님’을 ‘대통령’으로 잘못 표현하긴 했지만, 평양사투리를 쓰는 가정주부가 전단으로 주워 온 수령 사진까지 집 안 벽에 붙일 정도라면 그 정도 실수는 눈감아줄 수 있다고 판단했던 것일까. 인민군 간부는 위에는 올라와 볼 생각도 하지 않고 건성으로 몇 차례 두리번거리더니 부하들을 데리고 나가버렸다.

아내는 그들이 나간 뒤에도 한참 동안 숨도 제대로 쉬지 못할 정도로 경직되어 있었다. 문을 걸어 잠그고 나서야 가슴을 쓸어내렸다.

아내는 무척이나 주도면밀했다. 서울 전역이 인민군 수중에 들어간 후 기다리기라도 한 것처럼 인민군의 앞잡이 역할을 자처하고 나선 이들이 거리를 활보하고 다녔다. 그들은 평소 자신들을 멸시한 이웃들을 이른바 ‘반동’으로 지목하고 인민재판을 받게 했다. 백주에 ‘자아비판’을 강요하고 몹쓸 짓을 하다 급기야 목숨까지 앗아가는 만행을 저지르기도 했다.

우리집 골목 맨 끝에도 앞잡이 역할을 한 사람이 살고 있었다. 그 집에 특별히 원한을 살 만한 일을 한 적은 없었지만, 아내는 혹시나 하는 생각에 전쟁이 나고 며칠 후 쌀을 몇 가마니나 옮겨다 주었다. 미쳐 날뛰는 세상에서 변을 당하지 않기 위해 미리 손을 써놓은 것이었다.

아내의 측은지심이 아니었다면, 아내가 기지를 발휘하지 않았다면 나는 이미 죽은 목숨이거나 목숨은 건졌다고 해도 북으로 끌려가 원치 않는 삶을 살아야 했을 것이고 아내와 아이들과도 생이별을 했을 것이다.

경성제대 이공학부 동기 중에는 자의인지 타의인지는 몰라도 북으로 간 친구가 있었는데 훗날 북핵 개발을 주도했다는 얘기를 듣기도 했다.

◆ 남기동 선생은...

1919년 평양에서 태어났다. 올해로 100살이다. 일본 제6고등학교를 수석으로 졸업하고 경성제국대학 신생 이공학부 응용화학과에 편입했다. 1946년 중앙공업연구소 지질광물연구소장, 요업 과장으로 근무하며 서울대, 고려대, 한양대 등에도 출강했다. 부산 피난 중에도 연구하며 공학도들을 가르쳤다. 6·25 후 운크라 건설위원장을 맡아 1957년 연산 20만 톤 규모의 문경시멘트공장을 건설했다. 화학과장, 공업국 기감(技監)으로 인천판유리공장, 충주비료공장 등 공장 건설 및 복구사업을 추진했다. 1960년 국내 대학 최초로 한양대에 요업공학과를 창설하고 학과장을 맡았다. 1962년 쌍용양회로 옮겨 서독 훔볼트의 신기술 ‘SP킬른(Kiln)’ 방식으로 1964년 연산 40만 톤 규모의 영월공장을 준공했는데, 최단 공사기간을 기록해 은탑산업훈장을 받았다. 영월공장 준공으로 우리나라는 시멘트 수출국으로 부상했다. 1968년 건설한 동해공장은 단위공장으로는 세계 최대 규모였다. 공장 증설을 거듭해 1992년 우리나라 시멘트 생산량은 세계 5위가 되었다. 1978년 동양시멘트로 자리를 옮겨 2차 오일쇼크 때 시멘트 생산 연료를 벙커씨유에서 유연탄으로 대체하는 기술을 개발, 특허 대신 공개를 택해 업계를 위기에서 살려냈다. 이 공적으로 1981년 '3·1 문화상(기술상)'을 받았다. 인도네시아 수하르토(Suharto) 대통령 요청으로 1992년 인도네시아 최초의 시멘트공장인 '시비뇽 시멘트플랜트(P.T. SEMEN CIBINONG)'를 건설했다. 한국요업(세라믹) 학회, 한국화학공학회, 대한화학회등 3개 학회, 대한요업총협회(지금의 한국세라믹총협회) 회장으로 학계와 산업계의 유대를 다졌다. 학교, 연구소, 산업체가 참석하는 '시멘트심포지엄'을 개최하고, 한일국제세라믹스세미나를 조직해 학술교류는 물론 민간교류에도 힘썼다. 세라믹학회는 그의 호를 따 장학지원 프로그램인 '양송 상'을 제정했다. 1993년 인하대에서 명예공학박사 학위를 받고, 2006년 서울대 설립 60돌 기념 '한국을 일으킨 60인' 상, 2007년 세라믹학회 창립 50주년 특별공로상을 받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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