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민국 시멘트산업의 살아있는 역사] 남기동 회고록(42) 징용 아닌 징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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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 시멘트산업의 살아있는 역사] 남기동 회고록(42) 징용 아닌 징용
  • 남기동
  • 승인 2019.06.04 09: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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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스비전e] 1937년 중일전쟁을 계기로 조선총독부는 ‘국민총동원체제’를 마련했다. 이에 따라 일본육군특별지원병제도(1938), 총동원물자사용령(1939), 국민징용령(1939), 학도지원병제도(1943), 징병제도(1944), 여자정신대근무령(1944) 등을 공포해 우리나라를 대륙 침략의 병참기지로 삼았다.

내가 경성제대 1학년 말이던 1941년 12월 8일, 일제는 미국과 영국을 상대로 태평양전쟁을 일으켰다. 처음에는 진주만 기습으로 전과를 올리는 듯했다. 하지만 그것은 잠자는 사자의 코털을 건드린 것이었다.

1943년에 접어들며 일본군은 전세가 다급해졌다.

전선은 계속 확대되는데 전쟁의 주도권을 빼앗긴 일본군은 병력이 턱없이 부족해졌다. 일제는 병력을 확보하기 위해 학도병을 강제로 징집하기 시작했다. 그 대상은 경성제대에까지 확대되었다. 재학생까지 전쟁에 동원한다는 비난을 피하기 위해 편법으로 대학 기간을 단축시켜버렸다. 그 바람에 우리 학년은 3년 과정을 다 채우지도 못하고 반년이나 앞당겨 1943년 9월에 졸업해야 했다.

경성제대 시절. 왼쪽이 나, 가운데가 큰형님

당시 인문계 졸업생에 대해서는 학도병으로 군에 입대할것을 강요했지만, 이공계 졸업생에 대해서는 군 입대를 강요하지는 않았다.

대신 아무 곳이나 취업해서는 안 되고 졸업생 수만큼 군수공장이나 관공서에 배급표를 배정해 배급표를 탄 곳만 졸업생을 채용할 수 있게 했다. 사실상 조금 ‘세련된’ 강제징용이나 다름없었다.

나를 채용한 곳은 노량진에 있는 ‘연료선광연구소’였다. 당시 조선총독부 광공국에는 경광・화학・철광・광산・기획・노무・삼림・전기・연료과와 지질조사소, 연료선광연구소, 착암공양성소, 임업기술원양성소, 토목시험소가 있었다.

연료선광연구소는 해방 이후 지질조사소와 통합되어 중앙지질광산연구소가 되었다가 여러 차례 이름이 바뀌었다가 지금의 한국지질자원연구원(KIGAM)으로 발전했다.

내가 연료선광연구소에 배치된 것은 그나마 전공을 살린 케이스였다. 생계를 꾸릴 만큼만 월급을 주면서 일은 이른 새벽부터 밤늦게까지 시켰다. 업무는 전쟁에 필요한 연료를 조달하기 위한 연구에 집중되어 있었다. 전쟁은 언제 끝날지 몰랐고 우리는 소장이 시키는 대로 연구하며 불우한 청춘의 한 시기를 보내고 있었다.

입소한 지 2년 뒤인 1945년 8월 15일 정오에 일왕의 항복방송을 연구소에 모여서 들었다. 잡음이 너무 많아 말소리가 분명치 않았으나 일본이 무조건 항복한다는 내용은 알 수 있었다. 한순간에 세상이 바뀐 것이다. 일본사람들은 그 자리에서 흐느껴 울거나 그렇지 않으면 망연자실해 축 늘어진 모습이었다.

우리 조선사람들은 그 자리에서 만세를 부르지는 못했지만 얼굴에는 기쁨이 넘쳐흘렀다.
일본의 항복으로 전쟁이 끝나고 한반도가 일제의 사슬에서 해방되면서 나도 자유의 몸이 되었다.

◆ 남기동 선생은...

1919년 평양에서 태어났다. 올해로 100살이다. 일본 제6고등학교를 수석으로 졸업하고 경성제국대학 신생 이공학부 응용화학과에 편입했다. 1946년 중앙공업연구소 지질광물연구소장, 요업 과장으로 근무하며 서울대, 고려대, 한양대 등에도 출강했다. 부산 피난 중에도 연구하며 공학도들을 가르쳤다. 6·25 후 운크라 건설위원장을 맡아 1957년 연산 20만 톤 규모의 문경시멘트공장을 건설했다. 화학과장, 공업국 기감(技監)으로 인천판유리공장, 충주비료공장 등 공장 건설 및 복구사업을 추진했다. 1960년 국내 대학 최초로 한양대에 요업공학과를 창설하고 학과장을 맡았다. 1962년 쌍용양회로 옮겨 서독 훔볼트의 신기술 ‘SP킬른(Kiln)’ 방식으로 1964년 연산 40만 톤 규모의 영월공장을 준공했는데, 최단 공사기간을 기록해 은탑산업훈장을 받았다. 영월공장 준공으로 우리나라는 시멘트 수출국으로 부상했다. 1968년 건설한 동해공장은 단위공장으로는 세계 최대 규모였다. 공장 증설을 거듭해 1992년 우리나라 시멘트 생산량은 세계 5위가 되었다. 1978년 동양시멘트로 자리를 옮겨 2차 오일쇼크 때 시멘트 생산 연료를 벙커씨유에서 유연탄으로 대체하는 기술을 개발, 특허 대신 공개를 택해 업계를 위기에서 살려냈다. 이 공적으로 1981년 '3·1 문화상(기술상)'을 받았다. 인도네시아 수하르토(Suharto) 대통령 요청으로 1992년 인도네시아 최초의 시멘트공장인 '시비뇽 시멘트플랜트(P.T. SEMEN CIBINONG)'를 건설했다. 한국요업(세라믹) 학회, 한국화학공학회, 대한화학회등 3개 학회, 대한요업총협회(지금의 한국세라믹총협회) 회장으로 학계와 산업계의 유대를 다졌다. 학교, 연구소, 산업체가 참석하는 '시멘트심포지엄'을 개최하고, 한일국제세라믹스세미나를 조직해 학술교류는 물론 민간교류에도 힘썼다. 세라믹학회는 그의 호를 따 장학지원 프로그램인 '양송 상'을 제정했다. 1993년 인하대에서 명예공학박사 학위를 받고, 2006년 서울대 설립 60돌 기념 '한국을 일으킨 60인' 상, 2007년 세라믹학회 창립 50주년 특별공로상을 받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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