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비전e] 나는 중학교 때 집과 학교를 오가며 공부하는 것 외에는 전혀 마음을 쓰지 않아 전 학년을 개근했다. 집에서 학교까지 25분쯤 걸렸다.

졸업 때 우등상과 함께 개근상을 받았는데 당시에는 엄청난 사건이었다. 의료시스템이 제대로 갖추어지지 않았던 1930년대에는 아이들이 허약하고 병치레가 잦아 개근한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했다. 하지만 나는 아무리 아파도 기어서라도 학교에 갔다. 그건 아버지의 철칙이기도 했다.

우등상과 함께 개근상을 받았다고 신문에 사진까지 실렸다. 모두 다섯 명의 졸업생이 실렸는데 일본인학교의 유일한 조선인 학생으로 가장 위에 랭크되었다.

큰형은 평중 4학년 때 집에서 입시준비에 들어가 경성제국대학 예과 이과에 응시해 합격했다. 당시 조선인 학생 중에 큰형만 월반했다.

1936년 큰형이 예과 2학년 여름방학에 집에 왔을 때 나와 기섭이 형을 데리고 묘향산으로 놀러갔다. 보현사, 동룡굴을 보고 영변에도 들렀는데 약산동대에는 가보지 못했다. 시인 김소월의 <진달래꽃>에 나오는 영변의 약산 말이다.

3형제

그해 쌍둥이인 나와 기섭이 형은 각각 평중과 평양고보 4학년이었다. 5학년까지 마치고 고등학교나 경성제대 예과에 응시하는 것이 정상이었지만, 우리 형제는 1년 앞당겨 4학년 때 시험을 준비했다. 둘 다 제 학교에서 전교 1등을 하고 있었기 때문에 조기졸업이 가능했고 어떤 명문고라도 자신이 있었다.

큰형도 4학년 때 경성제대 예과에 합격했었다. 당시 중등교육은 5년제였는데, 경성제대 예과와 일본 고등학교를 4학년 때 응시할 수 있었다. 중학교에서 선생님들이 상급학교 입시공부를 지도했는데, 기초를 잘하면 다음 응용은 쉽다고 역설했다.

우리는 일본 유학을 목표로 잡았다. 동경제대에 들어가려면 일본에서 고등학교를 나와야 했다. 기섭이 형은 일본 명문 사가(佐賀)고등학교(사가대의 전신) 문과에, 나는 담임선생님이 추천한 오카야마에 있는 제6고등학교(오카야마대의 전신) 이과에 응시했다. 둘째는 법학도, 셋째는 공학도가 되라는 아버지의 뜻을 따른 것이다. 첫째는 의학도가 되라는 뜻은 큰형이 경성제대 의학부에 들어가 실현한 상태였다.

결론적으로 기섭이 형은 합격했지만, 나는 실패했다. 나의 100년 생애를 통틀어 그때가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쓴맛을 본 사건이었다.

쌍둥이 형과 나란히 일본 유학을 하지 못한 것도 아쉽고 이러다간 5학년 때도 일본 유학에 실패하는 것 아닌가 하는 두려움이 있어 이를 악물고 공부에 매진했다. 잠을 서너 시간도 못 잤던 것 같다. 너무 늦은 시간까지 공부에 매달리고 있으면 보다 못한 아버지가 밖에서 언성을 높이셨다.

“그러다 몸 상할 수 있으니 그만 하고 자거라.”

“네, 알겠습니다.”

대답은 그렇게 하고 일단 불을 껐다가 아버지가 들어가셨다 싶으면 다시 불을 켜고 공부를 계속했다. 하루는 아버지에게 들켜 새벽에 매를 맞기도 했다. 하지만 반드시 6고에 들어가고야 말겠다는 일념은 바뀌지 않았다. 노력은 나를 배신하지 않았다. 드디어 6고의 문이 열렸다.

◆ 남기동 선생은...

1919년 평양에서 태어났다. 올해로 100살이다. 일본 제6고등학교를 수석으로 졸업하고 경성제국대학 신생 이공학부 응용화학과에 편입했다. 1946년 중앙공업연구소 지질광물연구소장, 요업 과장으로 근무하며 서울대, 고려대, 한양대 등에도 출강했다. 부산 피난 중에도 연구하며 공학도들을 가르쳤다. 6·25 후 운크라 건설위원장을 맡아 1957년 연산 20만 톤 규모의 문경시멘트공장을 건설했다. 화학과장, 공업국 기감(技監)으로 인천판유리공장, 충주비료공장 등 공장 건설 및 복구사업을 추진했다. 1960년 국내 대학 최초로 한양대에 요업공학과를 창설하고 학과장을 맡았다. 1962년 쌍용양회로 옮겨 서독 훔볼트의 신기술 ‘SP킬른(Kiln)’ 방식으로 1964년 연산 40만 톤 규모의 영월공장을 준공했는데, 최단 공사기간을 기록해 은탑산업훈장을 받았다. 영월공장 준공으로 우리나라는 시멘트 수출국으로 부상했다. 1968년 건설한 동해공장은 단위공장으로는 세계 최대 규모였다. 공장 증설을 거듭해 1992년 우리나라 시멘트 생산량은 세계 5위가 되었다. 1978년 동양시멘트로 자리를 옮겨 2차 오일쇼크 때 시멘트 생산 연료를 벙커씨유에서 유연탄으로 대체하는 기술을 개발, 특허 대신 공개를 택해 업계를 위기에서 살려냈다. 이 공적으로 1981년 '3·1 문화상(기술상)'을 받았다. 인도네시아 수하르토(Suharto) 대통령 요청으로 1992년 인도네시아 최초의 시멘트공장인 '시비뇽 시멘트플랜트(P.T. SEMEN CIBINONG)'를 건설했다. 한국요업(세라믹) 학회, 한국화학공학회, 대한화학회등 3개 학회, 대한요업총협회(지금의 한국세라믹총협회) 회장으로 학계와 산업계의 유대를 다졌다. 학교, 연구소, 산업체가 참석하는 '시멘트심포지엄'을 개최하고, 한일국제세라믹스세미나를 조직해 학술교류는 물론 민간교류에도 힘썼다. 세라믹학회는 그의 호를 따 장학지원 프로그램인 '양송 상'을 제정했다. 1993년 인하대에서 명예공학박사 학위를 받고, 2006년 서울대 설립 60돌 기념 '한국을 일으킨 60인' 상, 2007년 세라믹학회 창립 50주년 특별공로상을 받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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