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비전e] 기섭이 형은 동경제대 법학부 1학년에, 나는 6고 이과 3학년을 마치고 동경제대 공학부 입학을 코앞에 두고 있었다. 바로 그때 진로를 바꿀 수밖에 없는 커다란 불행이 찾아왔다. 기섭이 형이 갑자기 세상을 떠난 것이다.
겨울방학에 기섭이 형은 도쿄에 있었다. 당시 도쿄에서는 전일본고등학교축구대전(Inter-highschool match)이 열리고 있었다. 기섭이 형이 나온 사가고 대표팀도 도쿄에 왔다. 기섭이 형은 사가고 시절 축구도 잘했고 후배들을 끔찍하게 아끼는 의리파였다.
선배로서 도쿄에 온 후배 선수들을 돌보아주었는데, 후배 중에 성홍열(Scarlet Fever)을 심하게 앓는 이가 있었다. 그것도 모르고 아픈 후배를 간호하는 과정에서 기섭이 형이 감염되고 말았다.
당시 세균성질환 치료에 효과가 있는 ‘설파다이아진(sulfadiazine)’계 약품이 새로 나와 있었는데, 기섭이 형이 약국에서 그 약을 사서 복용한 것이 더 큰 화를 불러왔다. 성홍열은 치유되었는데, 약을 너무 많이 쓴 탓에 신장을 못쓰게 된 것이다. 약은 쓸수록 부작용이 커진다는 것을 몰랐던 것이다. 혈뇨까지 나와 겁에 질린 기섭이 형은 병원에 입원했다.
뒤늦게 소식을 들은 아버지는 부랴부랴 도쿄로 건너갔다. 의사인 아버지는 그곳에서 제대로 된 치료가 힘든 데다 면역력이 극도로 약해진 상태에서 오히려 추가 감염의 위험이 크다고 판단했다. 하는 수 없이 아픈 아들을 부축해 평양으로 데려왔다. 당신의 병원에서 지극정성으로 치료했지만 기섭이 형의 병세는 호전될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내키지 않았지만 평양도립병원에 입원하는 길밖에 없었다. 아버지가 처음 의사로 일했던 자혜의원이었다. 하지만 아버지의 우려처럼 기섭이 형은 병원에서 장티푸스에 감염되었고 며칠 못 가 끝내 눈을 감고 말았다.
1940년 12월 22일 오후 2시 20분, 나의 쌍둥이 형이 만 스물도 되지 않은 꽃다운 나이에 다시는 돌아올 수 없는 곳으로 떠난 것이다. 그 순간에 큰형은 서울에, 나는 오카야마에 있었다. 나는 너무 멀리 있었고, 기섭이 형은 너무 빨리 떠나버렸다.
아버지와 어머니, 그리고 여동생 기진이가 사랑하는 아들의, 사랑하는 오빠의 마지막 숨을 보았다. 의대 4학년이던 큰형이 형수님과 함께 평양집으로 달려갔고, 나는 오카야마에서 비보를 받고 그 자리에 주저앉고 말았다.
어머니! 아버지! 기섭이 형은 가락골 선산에 묻혔다. 우리 3형제가 방학 때마다 함께 뛰어놀던 모습이 내려다보이는 그곳에 잠든 것이다. 나는 부모님이 애통해하던 모습을 형언할 수 없다. 아버지와 어머니는 기섭이 형을 땅이 아니라 가슴에 묻었다.
큰형과 동생의 슬픔도 형언할 수 없었지만, 나는 나대로 견딜 수 없는 상실감에서 헤어 나오지 못했다. 한 날 한 시에 태어난 쌍둥이라서 더 그랬는지 모른다.
이란성이어서 쌍둥이라고 말해주지 않으면 아무도 눈치채지 못할 정도로 다르게 생겼었다. 지금 100년 가까이 되어 빛바랜 가족사진 속에서 고만고만한 아이 둘이 똑같은 옷을 입고 나란이 붙어 앉아 있어 그나마 쌍둥이 같다는 생각이 들긴 한다.
생김새만 다른 게 아니라 성격도 많이 달랐다. 형은 대범한 편인 반면 나는 조금 내성적이었고, 형은 고집이 좀 있었던 것에 비해 나는 순종적이었다. 아버지께서 일찌감치 형은 법학을, 나는 공학을 하는 것이 좋겠다고 판단하신 것도 그런 성향을 읽으셨기 때문이 아닐까 한다. 아무튼 내 생각에도 형은 형 같았고 나는 동생 같았다.
쌍둥이는 몇 분 차이로 형과 동생의 서열이 갈려 여느 집 같으면 친구처럼 막역하게 지냈을지 몰라도 우리 쌍둥이는 어릴 때부터 형제의 구분이 비교적 엄격했다. 함께 뛰어놀며 자라는 동안에도 나는 늘 “형님”이라고 깍듯하게 부르며 따랐고 형도 나를 동생으로 잘 챙겨주었다.
“형 만한 아우 없다”는 얘기는 우리 쌍둥이를 두고 한 말일 것이다. 우리는 함께 보통학교를 다녔는데 시험을 보면 언제나 1등은 형이, 2등은 내가 했다. 졸업할 때까지 한 번도 형을 이겨보지 못했다.
그렇다고 형을 시기하거나 악착같이 이겨보겠다는 생각을 하지는 않았다. 경쟁을 피할 수 없다면 차라리 형이 1등을 하고 내가 2등을 하는 것이 마땅하다고 여겼다. 집안 어른들도 한 집에서 1, 2등을 다 하니 좋은 일이고, 아무래도 형이 동생보다 잘하는 것이 순리에 맞다고 생각하셨을 것이다.
나와 기섭이 형은 일본유학 시절 방학이 되면 함께 배를 타고 고향으로 왔다가 일본으로 돌아갈 때도 함께했다. 당시에는 항구에서 검문검색이 심했는데, 조선사람에겐 특히 까다로웠다. 제복을 입고 칼을 찬 일본 순사들이 가자미눈을 뜨고 위협하듯 신분을 물어보면 아무 잘못한 것도 없이 오금이 저렸다.
다행인지 몰라도 나는 외모가 일본인처럼 생긴데다 일본인학교인 평중을 나와 일본어도 일본인학생처럼 자연스럽게 했다. 순사는 나를 한번 쓱 훑어보고 이렇게 한마디 툭 던지곤 했다.
“이름이 뭔가?”
“미나미(南, みなみ)!”
그러면 더 물어보지도 않고 무사통과였다. 남(南)씨는 일본에도 있는 성(姓)이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기섭이 형은 생김새가 누가 봐도 조선사람인데다 나보다 일본말도 자연스럽지 못했다. 결정적으로 이름을 말할 때가 문제였다.
순사가 노려보며 이름이 뭐냐고 물으면 나처럼 그냥 “미나미!” 하면 될 것을 무슨 생각에서인지 굳이 “남기섭!”이라고 해서 의심을 사곤 했다. “일본에는 무슨 일로 가느냐? 가방을 열어 보라!” 하며 추궁하는 순사에게 한참을 시달린 끝에 겨우 빠져나오곤 했다.
그래서 난 늘 먼저 검문대를 나와 기섭이 형이 나올 때까지 기다려야 했다. 기다리는 것이 지루하기도 하고, 그냥 “미나미!” 하라고 말해주고도 싶었지만 혹시라도 언짢아 할까봐 내색하지 않았다. 대신 형이 미안해하는 눈치가 보이면 큰소리로 웃으며 말하곤 했다.
“난 생긴 것이 일본놈 같고, 형님은 조선사람다워 그랬나 보오. 하하!”
어머니 배 속에서 열 달을 함께 지냈으니 그래도 나는 아버지보다도, 큰형보다도 기섭이 형과 함께한 시간이 많은 셈이다. 어느 이른 바람에 떨어져 날아가는 잎새처럼 한 가지에 나고도 어디로 가는 줄 모르고 떠나보내는 것이 형제의 이별이라는데, 나와 기섭이 형은 한 날 한 시 한 가지에 났으니 그 상실감이 더했다.
형을 떠나보내고 어린 시절 3형제가 강에서 멱을 감다가 기섭이 형이 물에 빠졌을 때 외할아버지가 뛰어들어 구한 일이 가끔 생각났다. 이젠 외할아버지도 구할 수 없는 곳으로, 내가 검문대를 먼저 나와 아무리 기다리고 기다려도 오지 않을 곳으로 영영 떠나버렸다고 생각하니 가슴속이 텅 빈 것 같았다. 나의 반쪽은 어머니 가슴속에 박혀 있다가 지금은 별이 되었을 것이다.
◆ 남기동 선생은...
1919년 평양에서 태어났다. 올해로 100살이다. 일본 제6고등학교를 수석으로 졸업하고 경성제국대학 신생 이공학부 응용화학과에 편입했다. 1946년 중앙공업연구소 지질광물연구소장, 요업 과장으로 근무하며 서울대, 고려대, 한양대 등에도 출강했다. 부산 피난 중에도 연구하며 공학도들을 가르쳤다. 6·25 후 운크라 건설위원장을 맡아 1957년 연산 20만 톤 규모의 문경시멘트공장을 건설했다. 화학과장, 공업국 기감(技監)으로 인천판유리공장, 충주비료공장 등 공장 건설 및 복구사업을 추진했다. 1960년 국내 대학 최초로 한양대에 요업공학과를 창설하고 학과장을 맡았다. 1962년 쌍용양회로 옮겨 서독 훔볼트의 신기술 ‘SP킬른(Kiln)’ 방식으로 1964년 연산 40만 톤 규모의 영월공장을 준공했는데, 최단 공사기간을 기록해 은탑산업훈장을 받았다. 영월공장 준공으로 우리나라는 시멘트 수출국으로 부상했다. 1968년 건설한 동해공장은 단위공장으로는 세계 최대 규모였다. 공장 증설을 거듭해 1992년 우리나라 시멘트 생산량은 세계 5위가 되었다. 1978년 동양시멘트로 자리를 옮겨 2차 오일쇼크 때 시멘트 생산 연료를 벙커씨유에서 유연탄으로 대체하는 기술을 개발, 특허 대신 공개를 택해 업계를 위기에서 살려냈다. 이 공적으로 1981년 '3·1 문화상(기술상)'을 받았다. 인도네시아 수하르토(Suharto) 대통령 요청으로 1992년 인도네시아 최초의 시멘트공장인 '시비뇽 시멘트플랜트(P.T. SEMEN CIBINONG)'를 건설했다. 한국요업(세라믹) 학회, 한국화학공학회, 대한화학회등 3개 학회, 대한요업총협회(지금의 한국세라믹총협회) 회장으로 학계와 산업계의 유대를 다졌다. 학교, 연구소, 산업체가 참석하는 '시멘트심포지엄'을 개최하고, 한일국제세라믹스세미나를 조직해 학술교류는 물론 민간교류에도 힘썼다. 세라믹학회는 그의 호를 따 장학지원 프로그램인 '양송 상'을 제정했다. 1993년 인하대에서 명예공학박사 학위를 받고, 2006년 서울대 설립 60돌 기념 '한국을 일으킨 60인' 상, 2007년 세라믹학회 창립 50주년 특별공로상을 받기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