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비전e] 경성제대는 이공학부가 처음 생기다 보니 교수와 학생만 있을 뿐 어느 것 하나 제대로 갖춘 것이 없었다. 아직 강의실과 실험실조차 없었다. 동숭동 법문학부 뒤 구석 단층 목조건물에 임시 이공학부 본부를 설치했는데 초라하기 짝이 없었다.
우리 응용화학과 학생들은 1년 동안 법문학부에서 곁방살이를 해야 했다. 법문학부 강의실 가운데 빈 곳을 찾아다니며 강의를 들어야 했다. 실험실도 여기저기 돌아다니며 빌려 써야 했다. 화학실험은 의학부 화학실험실에서, 물리실험은 청량리에 있는 예과 물리실험실을 빌려서 했다.
공부하는시간보다 이동하는 시간이 더 많을 지경이었다. 게다가 다른 학부 강의실과 실험실을 빌려 사용하다 보니 괜히 눈치도 보이고 설움도 없지 않았다. 교복 상의에 새겨넣은 ‘Technology’의 이니셜인 ‘T’자 마크가 없었다면 교내에서 우리가 공대생인 줄 아는 사람은 없었을 것이다.
이듬해 2학년에 올라가서야 신공덕리(지금의 공릉동)에 건축 중이던 이공학부 건물이 완공되었다. 우리 과는 그중 3호관, 4호관에 가서 강의를 듣고 각 학과 강좌별로 실험실도 갖게 되었다. 그때부터는 여기저기 옮겨 다니지 않고 실험할 수 있게 되었다. 비로소 우리 과는 안정을 찾은 듯했다.
당시 나는 명륜동 큰형 집에서 통학했는데 전차로 성동역까지 가서 거기서 갈아타고 신공덕리까지 가야 했다. 등교하는 데만 1시간 반이 넘게 걸렸다. 서서 갈 때가 많았는데, 시간이 아까워 늘 책을 보았다.
1학년 때 여섯이던 우리 과는 그나마 일본인 학생 한 명이 입대하면서 다섯 명만 남아 강의나 실험 시간이 더 호젓해졌다. 2학년까지는 강의와 각 강좌의 실험을 공동으로 이수했다. 3학년에 올라가면서 응용전기화학, 규산염공업, 유기합성, 연료공업, 화학공업 등 다섯 강좌 중 전공분야를 정했다. 그런 다음 해당 주임교수 지도 하에 졸업논문실험을 단독으로 진행했다. 나는 규산염공업 강좌주임인 무라카미(村上) 교수의 지도를 받으며 실험에 열중했다.
졸업논문을 쓰기 위해 ‘무연탄 탈염’에 관한 실험을 했는데, 학부생의 논문인데도 적잖은 주목을 받았다. 당시 논문이 이례적으로 일본화학회 조선지부 발표회에서 소개되는가 하면 일본에서 간행되는 권위 있는 정기간행물인 <연료협회>에도 게재되었다.
과 친구들이 부러워했고 나는 자신감이 생겼다. 명륜동 큰형 집에 이공학부 동기생들이 자주 놀러오고 해서 큰형도 나의 친구들을 알게 되고 조카들도 내 친구들을 좋아했다. 친구 중에 호남 출신이 있었는데 말끝마다 “땅께로” 하는 것이 우스웠는지 조카들이 “땅께로” “땅께로” 하며 흉내 내기도 했다.
그때 아이들은 아빠를 “아부지” 하고 불렀는데 어린 조카들은 나를 “작은아부지”라고 부르는 것이 힘들었는지 “짜~” 하고 불렀다. 그 후로 큰형 집에서는 나를 “짜~”라고 부르게 되었다.
형수님은 나를 잘 보살펴 주셨다. 나 역시 형수님을 많이 도와드렸다. 하루는 저녁거리로 큰형이 닭을 사왔는데, 형과 형수님 모두 목을 따지 못해 서로 미루고 있었다.
형수님은 저만치 도망가 있고, 동물실험에 사체해부까지 해본 형도 뒤로 물러나 있어 결국 내 몫이 되었다. 제대로 피를 뽑지 못해 닭 모가지를 한 바퀴 휘 돌려가며 칼집을 내는 바람에 거의 절두하다시피 했다.
◆ 남기동 선생은...
1919년 평양에서 태어났다. 올해로 100살이다. 일본 제6고등학교를 수석으로 졸업하고 경성제국대학 신생 이공학부 응용화학과에 편입했다. 1946년 중앙공업연구소 지질광물연구소장, 요업 과장으로 근무하며 서울대, 고려대, 한양대 등에도 출강했다. 부산 피난 중에도 연구하며 공학도들을 가르쳤다. 6·25 후 운크라 건설위원장을 맡아 1957년 연산 20만 톤 규모의 문경시멘트공장을 건설했다. 화학과장, 공업국 기감(技監)으로 인천판유리공장, 충주비료공장 등 공장 건설 및 복구사업을 추진했다. 1960년 국내 대학 최초로 한양대에 요업공학과를 창설하고 학과장을 맡았다. 1962년 쌍용양회로 옮겨 서독 훔볼트의 신기술 ‘SP킬른(Kiln)’ 방식으로 1964년 연산 40만 톤 규모의 영월공장을 준공했는데, 최단 공사기간을 기록해 은탑산업훈장을 받았다. 영월공장 준공으로 우리나라는 시멘트 수출국으로 부상했다. 1968년 건설한 동해공장은 단위공장으로는 세계 최대 규모였다. 공장 증설을 거듭해 1992년 우리나라 시멘트 생산량은 세계 5위가 되었다. 1978년 동양시멘트로 자리를 옮겨 2차 오일쇼크 때 시멘트 생산 연료를 벙커씨유에서 유연탄으로 대체하는 기술을 개발, 특허 대신 공개를 택해 업계를 위기에서 살려냈다. 이 공적으로 1981년 '3·1 문화상(기술상)'을 받았다. 인도네시아 수하르토(Suharto) 대통령 요청으로 1992년 인도네시아 최초의 시멘트공장인 '시비뇽 시멘트플랜트(P.T. SEMEN CIBINONG)'를 건설했다. 한국요업(세라믹) 학회, 한국화학공학회, 대한화학회등 3개 학회, 대한요업총협회(지금의 한국세라믹총협회) 회장으로 학계와 산업계의 유대를 다졌다. 학교, 연구소, 산업체가 참석하는 '시멘트심포지엄'을 개최하고, 한일국제세라믹스세미나를 조직해 학술교류는 물론 민간교류에도 힘썼다. 세라믹학회는 그의 호를 따 장학지원 프로그램인 '양송 상'을 제정했다. 1993년 인하대에서 명예공학박사 학위를 받고, 2006년 서울대 설립 60돌 기념 '한국을 일으킨 60인' 상, 2007년 세라믹학회 창립 50주년 특별공로상을 받기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