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비전e] 휴전협상이 이루어진 1953년 피난생활을 끝내고 서울로 올라왔다. 중앙공업연구소가 있던 자리는 폐허가 된 상태였다. 나는 동료들과 함께 요업과와 무기화학과를 재건하는 데 전력을 쏟았다.

전쟁으로 폐허가 된 산하를 복구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건설자재를 확보하는 것이 급선무였다. 시멘트는 한국전쟁 직후 복구과정에서 필수적인 공업으로 떠올랐다.

하지만 당시 우리나라 시멘트공업은 형편없었다. 해방 당시 38선 이남의 시멘트공장은 오노다삼척공장이 유일했다.(이 공장은 1957년 동양시멘트공업이 설립되면서 흡수된다.) 여기서 나오는 시멘트로는 급증하는 전후 복구 및 재건 수요를 감당할 수 없었기 때문에 ‘한·미협조’ 마크가 붙은 원조 시멘트 포대가 시중에 나돌았다.

미군정은 본국이나 독일, 일본 등지로부터 시멘트를 구입해 무상으로 제공했는데 아무리 공짜라도 자금을 대는 지원 당국 입장에서는 운송비가 시멘트 값보다 비싸 배보다 배꼽이 큰 형국이었다.

무상지원도 언제 끊어질지 몰랐기에 근본적인 대책 마련이 시급했다. 물류시스템도 열악해 해외에서 들여온 시멘트가 부산항에 도착해 하역하는 과정에서 포대가 터지는 등 손실이 많았다.

우리 정부는 근본적인 해결책이 필요하다고 인식했다. 당시 국제연합 총회의 결의로 한국의 경제 부흥과 재건을 돕기 위해 창설된 원조기구인 유엔한국재건위원단(UNKRA)이 전쟁으로 파괴된 우리나라 경제의 재건과 복구 사업을 지원하고 있었다. 유엔 가맹국들이 갹출한 자금으로 우리 정부와 긴밀하게 협조해 사업을 추진하고 있었다.

정부는 수입대체산업 중심의 공업화에 박차를 가했는데 운크라 자금으로 충주비료공장, 인천판유리공장, 문경시멘트공장 등 3대 기간산업 건설을 추진했다.(운크라는 1958년 6월 말 사업 종료로 해체되었다.) 부흥부는 중앙공업연구소의 의견을 받아들여 운크라에 이렇게 요청했다.

“우리나라에 규석, 점토, 석고 같은 시멘트 원료는 풍부하니 시멘트 제조공장을 세워 주시오.”

고기를 잡아 주지 말고 ‘고기 잡는 법’을 가르쳐 달라고 한 것이다. 1954년 마침내 유엔이 우리나라에 시멘트공장을 지어주기로 결정했다. 이듬해 6월 운크라 자금 525만 달러가 배정되어 연산 10만 톤 규모의 생산설비를 구축하겠다는 계획이 세워졌다.

운크라는 공장을 지어줄 업체를 선정하기 위해 국제입찰에 붙였다.

그 결과, ‘스미스(FLSmidth)’라는 덴마크 회사가 낙찰됐다. 스미스는 세계적인 시멘트회사이기도 했고, 시멘트공장 설비의 설계와 시공을 전문으로 하는 엔지니어링 회사로 시멘트 플랜트를 잘 짓는 회사로도 정평이 나 있었다. 이집트와 파키스탄 등지에 대단위 시멘트공장을 짓는 등 당시 세계 시멘트 생산량의 40퍼센트 정도가 스미스의 설비를 이용했다.

◆ 남기동 선생은...

1919년 평양에서 태어났다. 올해로 100살이다. 일본 제6고등학교를 수석으로 졸업하고 경성제국대학 신생 이공학부 응용화학과에 편입했다. 1946년 중앙공업연구소 지질광물연구소장, 요업 과장으로 근무하며 서울대, 고려대, 한양대 등에도 출강했다. 부산 피난 중에도 연구하며 공학도들을 가르쳤다. 6·25 후 운크라 건설위원장을 맡아 1957년 연산 20만 톤 규모의 문경시멘트공장을 건설했다. 화학과장, 공업국 기감(技監)으로 인천판유리공장, 충주비료공장 등 공장 건설 및 복구사업을 추진했다. 1960년 국내 대학 최초로 한양대에 요업공학과를 창설하고 학과장을 맡았다. 1962년 쌍용양회로 옮겨 서독 훔볼트의 신기술 ‘SP킬른(Kiln)’ 방식으로 1964년 연산 40만 톤 규모의 영월공장을 준공했는데, 최단 공사기간을 기록해 은탑산업훈장을 받았다. 영월공장 준공으로 우리나라는 시멘트 수출국으로 부상했다. 1968년 건설한 동해공장은 단위공장으로는 세계 최대 규모였다. 공장 증설을 거듭해 1992년 우리나라 시멘트 생산량은 세계 5위가 되었다. 1978년 동양시멘트로 자리를 옮겨 2차 오일쇼크 때 시멘트 생산 연료를 벙커씨유에서 유연탄으로 대체하는 기술을 개발, 특허 대신 공개를 택해 업계를 위기에서 살려냈다. 이 공적으로 1981년 '3·1 문화상(기술상)'을 받았다. 인도네시아 수하르토(Suharto) 대통령 요청으로 1992년 인도네시아 최초의 시멘트공장인 '시비뇽 시멘트플랜트(P.T. SEMEN CIBINONG)'를 건설했다. 한국요업(세라믹) 학회, 한국화학공학회, 대한화학회등 3개 학회, 대한요업총협회(지금의 한국세라믹총협회) 회장으로 학계와 산업계의 유대를 다졌다. 학교, 연구소, 산업체가 참석하는 '시멘트심포지엄'을 개최하고, 한일국제세라믹스세미나를 조직해 학술교류는 물론 민간교류에도 힘썼다. 세라믹학회는 그의 호를 따 장학지원 프로그램인 '양송 상'을 제정했다. 1993년 인하대에서 명예공학박사 학위를 받고, 2006년 서울대 설립 60돌 기념 '한국을 일으킨 60인' 상, 2007년 세라믹학회 창립 50주년 특별공로상을 받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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