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비전e] 수옥리에 살 때 집 뒤에 남산이 있었다. 나는 그 고갯마루에 있는 교회(당시에는 예배당이라고 했다)의 유치원에 다녔다. 일요일에 교회에서 예쁜 딱지를 얻어온 기억도 난다.

수옥리에서는 종로보통학교에 다녔는데, 전차 정류장 두 개쯤으로 멀지는 않았다. 나는 1학년도 마치지 못하고 집이 황금동으로 이사하면서 약송보통학교로 전학했다. 약송보통학교는 꽤 넓은 교정에 있는 2층 목조건물이었다. 집에서 20분 거리였는데 여름에는 서양식 바지에 셔츠를 입고, 겨울에는 한복 바지저고리에 두루마기를 입고 다녔다.

6학년 때 신의주와 만주 안동으로 수학여행을 갔다. 1박2일 여정으로 기차를 타고 신의주에서 내려 ‘왕자제지회사’ 같은 곳을 견학한 다음 안동으로 가기 위해 압록강철교를 걸어서 건넜다.
안동에 있는 중국사람들은 모두 남색 옷을 입고 있었다. 어디를 둘러보아도 온통 남색이어서 묘한 기분이 들었다. 돌아올 때는 기차를 타고 철교를 건넜다. 그리고 신의주를 거쳐 평양으로 왔다. 내 생애 최초의 해외여행이었다.

우리 4남매는 모두 열심히 공부했다. 공부를 잘하기도 했지만 공부하는 게 무척이나 즐거웠다. 아버지도 어머니도 공부에 관해 이래라저래라 하지는 않으셨지만, 우리에 대한 기대가 크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에 열심히 했다.

당시 평양의 중등교육기관으로는 공립에 평양공립제일중학교(평중), 평양고등보통학교, 평양사범학교, 평양농업학교가 있었고, 사립으로는 광성고등보통학교, 숭실중학교, 숭인상업학교가 있었다.

큰형은 보통학교에서 반장을 하면서 반에서 2등을 차지했다. 1등이 네 살이나 많았던 것을 감안하면 1등이나 다름없었다. 큰형은 일본인학교로 불리는 평중에 합격했다. 평양에 거주하는 일본인 자녀들을 위한 학교였던 만큼 일단 일본인 학생부터 채워야 했기에 남은 몇 자리를 놓고 조선인 학생간 경쟁이 치열했다. 조선인 학생이 들어가려면 수재 소리를 들어야 했다. 당시 평양은 물론 평안도를 통틀어 평중과 평양고보가 투톱이었다.

큰형이 평중 입학시험에 합격한 것은 가락골에서는 큰 이슈였다. 그 전까지 사촌형들이 평중이나 평양고보에 단번에 합격한 일이 없었기 때문이다. 재수해서 평양고보에 들어간 기항 형님을 제외하면 모두 커트라인이 한두 단계 낮은 사립 광성고보에 들어갔다. 큰형이 평중에 입학한 것이 아버지는 무척이나 기쁘셨던 모양이다. 좀처럼 표현하지 않는 아버지가 금제 나비브로치를 어머니에게 선물했을 정도였으니 말이다.

큰형뿐 아니라 우리 쌍둥이도 약송보통학교에서 입학 때부터 졸업 때까지 각각 1, 2등을 놓치지 않았다. 1등을 하던 기섭이 형은 평양고보에, 2등을 하던 나는 큰형이 다니는 평중에 각각 수석으로 합격했다. 그리고 졸업할 때까지 둘 다 1등을 놓치지 않았다. 쌍둥이를 각각 다른 학교에 보내야 둘 다 1등을 할 것이라는 아버지의 예상이 적중한 것이다.

평양중학교 동창회

평중은 평안남도에서는 일본인을 위한 유일한 중학교였다. 한 학년에 3학급이 있었고, 학급당 50명 정도였는데, 조선인 학생은 두세 명으로 한 학년에 10명도 안 되었다.

일본인학교였지만 조선인을 차별하지는 않았다. 큰형이 입학할 때는 조선학생이 재학생 대표로 환영사를 하기도 했다. 그 광경은 아버지에게 아주 인상적이었고 훗날 막내아들인 나도 평중에 보내도 괜찮겠다 생각하셨을 것이다.

평중에서는 오직 성적에 대해서만 냉혹할 만큼 차별이 있었다. 교실 좌석 배치는 철저하게 성적순이었다. 성적순으로 분단을 구분했는데 한 분단은 6~7명이었다. 나는 1등이었으므로 1분단에 앉았는데 중간 키여서 자리도 중간쯤이었다. 어느 반이나 조선인 학생이 1분단에 앉았다.

일본인 학교에서 오히려 조선인 학생이 성적이 우수하다는 이유로 우대를 받은 셈이다. 평중에서는 공부만 시키는 게 아니었다. 체력도 공부 못지않게 중시했다. 체력을 국력으로 인식하는 군국주의 시대 아니었던가. 체조와 유도를 배우는 수업이 일주일에 한 시간씩 두 번 있었다.

평중은 야구명문이라고 불릴 만큼 야구단이 유명했다. 유도단도 두각을 나타내고 있었다. 평안도 내 16개 중학교(고등보통학교)가 매년 체육대회를 열었는데, 평중은 늘 순위권에 들었다. 나는 공부뿐 아니라 달리기도 1등이었다. 당시 평안도에 있는 16개 중학교가 참가하는 이어달리기대회가 열렸다. 당연히 나는 대표팀에 선발되어 출전했다.

나는 특히 영어를 잘했다. 영어선생님으로부터 발음이 좋고 어휘력도 뛰어나다는 극찬을 받았다. 영어시간은 내가 주도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단어를 외울 때는 조그만 사전에 2,000자쯤 기본단어를 요약하고 이것을 따로 외웠다.

영어공부를 할 때 가장 확실한 방법은 문장을 통째로 외우는 것이다. 어떻게 그럴 수 있느냐고 반문들을 하지만, 반드시 외우고야 말겠다는 생각으로 무조건 달달 외우기를 반복하면 어느새 자기 것이 되어 입에서 저절로 터져 나온다. 내가 공부하던 시절에는 영어사전도 통째로 외우겠다고 작정하면 정말로 외울 수 있었다.

3학년 때 학예회가 있었고, 4학년 때 10일 동안 만주로 수학여행을 갔다. 선양(瀋陽), 푸순(撫順), 창춘(長春), 뤼순(旅順), 다롄(大连) 등지를 견학했다. 일본이 승승장구해 대륙으로 뻗어나가고, 이른바 ‘만주국’을 만들고 창춘을 ‘신경(新京)’이라 부르던 때였다. 만주에서 일본인이 의기양양함은 더할 나위가 없었다.

선양에서 일본인 여관에 묵었는데 일본식 이부자리, 일본 음식 등을 처음 경험했다. 일본인 하녀들이 시중을 들었는데 처음 본 광경이 기이했다.

창춘에서는 이른바 ‘국도건설’이 진행 중이었으며 관청가가 새로 만들어졌다. 창춘에서 다롄까지 광활한 평야 한가운데를 기차로 가로질러 끝없이 가는 기분은 지금도 잊을 수가 없다. 농작물은 수수로 보였다.

뤼순에서는 러일전쟁의 전적을 견학했다. 마차 한 대에 3명씩 나누어 타고 돌아다녔는데 러시아 사람들이 세웠다는 뤼순공과대학의 큰 백색 건물이 웅장했던 것 같다.

◆ 남기동 선생은...

1919년 평양에서 태어났다. 올해로 100살이다. 일본 제6고등학교를 수석으로 졸업하고 경성제국대학 신생 이공학부 응용화학과에 편입했다. 1946년 중앙공업연구소 지질광물연구소장, 요업 과장으로 근무하며 서울대, 고려대, 한양대 등에도 출강했다. 부산 피난 중에도 연구하며 공학도들을 가르쳤다. 6·25 후 운크라 건설위원장을 맡아 1957년 연산 20만 톤 규모의 문경시멘트공장을 건설했다. 화학과장, 공업국 기감(技監)으로 인천판유리공장, 충주비료공장 등 공장 건설 및 복구사업을 추진했다. 1960년 국내 대학 최초로 한양대에 요업공학과를 창설하고 학과장을 맡았다. 1962년 쌍용양회로 옮겨 서독 훔볼트의 신기술 ‘SP킬른(Kiln)’ 방식으로 1964년 연산 40만 톤 규모의 영월공장을 준공했는데, 최단 공사기간을 기록해 은탑산업훈장을 받았다. 영월공장 준공으로 우리나라는 시멘트 수출국으로 부상했다. 1968년 건설한 동해공장은 단위공장으로는 세계 최대 규모였다. 공장 증설을 거듭해 1992년 우리나라 시멘트 생산량은 세계 5위가 되었다. 1978년 동양시멘트로 자리를 옮겨 2차 오일쇼크 때 시멘트 생산 연료를 벙커씨유에서 유연탄으로 대체하는 기술을 개발, 특허 대신 공개를 택해 업계를 위기에서 살려냈다. 이 공적으로 1981년 '3·1 문화상(기술상)'을 받았다. 인도네시아 수하르토(Suharto) 대통령 요청으로 1992년 인도네시아 최초의 시멘트공장인 '시비뇽 시멘트플랜트(P.T. SEMEN CIBINONG)'를 건설했다. 한국요업(세라믹) 학회, 한국화학공학회, 대한화학회등 3개 학회, 대한요업총협회(지금의 한국세라믹총협회) 회장으로 학계와 산업계의 유대를 다졌다. 학교, 연구소, 산업체가 참석하는 '시멘트심포지엄'을 개최하고, 한일국제세라믹스세미나를 조직해 학술교류는 물론 민간교류에도 힘썼다. 세라믹학회는 그의 호를 따 장학지원 프로그램인 '양송 상'을 제정했다. 1993년 인하대에서 명예공학박사 학위를 받고, 2006년 서울대 설립 60돌 기념 '한국을 일으킨 60인' 상, 2007년 세라믹학회 창립 50주년 특별공로상을 받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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