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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 시멘트산업의 살아있는 역사] 남기동 회고록(46) 강을 건너지 못한 사람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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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 시멘트산업의 살아있는 역사] 남기동 회고록(46) 강을 건너지 못한 사람들
  • 남기동
  • 승인 2019.06.08 09: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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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스비전e] 나는 아내의 선견지명과 기지로 무사히 서울 수복을 보았지만, 큰형과 매부(기진의 남편)를 포함한 의대 사람들은 여간 곤혹을 치른 것이 아니었다.

서울이 함락되자마자 이북에서 온 사람들이 학교를 접수하고 자기네 사람들로 장을 임명했다. 서울대학병원장에 큰형의 동급생이 임명되었는데 먼저 월북했다가 남침 때 온 것이었다. 그는 큰형에게 큰 선심이나 쓰듯 충고했다.

“절대로 표 나게 행동하지 마라. 이북 사람들 눈 밖에 나면 안 돼!”

원래 서울에 있던 친구 몇도 인민군이 내려오자 기다렸다는 듯 그들에게 붙어 사람들을 못살게 굴었다. ‘독보회’라는 것을 만들어 자신들의 주장을 글로 쓰게 하고 사람들 앞에서 발표시켰다.

친척 형님도 1949년경 북으로 가 연안파 김원봉 밑에 들어갔다고 했는데 남침 때 내려와 세브란스병원을 접수해 인민군병원으로 쓰면서 병원장을 맡았다. 큰형을 세브란스병원으로 불러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세상이 바뀌었어. 시류에 따라야 해. 쓸데없이 경거망동하지 말거라.”

인민군은 예상과는 달리 낙동강 방어선이 쉽게 무너지지 않자 이른바 의용군을 징집해 전선에 보내는 한편, 대학의 의사들을 북으로 보내기 시작했다. 장기전을 대비해 군의로 투입하기 위한 속셈이었다. 큰형을 비롯한 서울대 의대 의사들에게 평양으로 가라는 명령이 내려졌다.

“모일 모시 모처로 집합하라. 준비물은 수저와 쌀이다.”

큰형은 남양주 광릉 맞은편 동네로 피신했다. 의대 친구의 친지가 거기 살았다. 중랑천을 건너 퇴계원을 지나 포천 가는 길로 접어들면서 그 친지와 합류했다. 어디로 갔는지 집에서도 몰랐다. 친구의 집에서 일하는 아이가 이따금 쌀을 가져다주었다. 9월 28일 서울이 수복된 것도 그 아이가 알려주었다. 30일 서울로 다시 돌아왔다.

도중에 인민군들이 총을 거꾸로 메고 도주하는 것을 보았는데, 혹시 붙잡혀 끌려가지 않을까 몸을 숨기기도 했다. 공릉동 서울대 공대 부근에서 우리 해병대가 포진하고 있는 것을 보고 나서야 안심했다.

의대 사람들이 평양으로 가라는 말을 듣지 않고 피신해 버리니 이북에서 내려온 자들과 그들에게 붙어 충성을 바치던 자들이 날뛰었다. 큰형의 친구 중에도 그런 자가 있었는데, 큰형이 광릉 근처에 피신해 있는 동안 집으로 와서 형수님에게 빨리 남편에게 연락해 평양으로 가게 하라고 협박했다. 형수님은 끝까지 모른다고 했다. 사실 어디에 숨었는지 알지도 못했다. 큰형이 행선지를 말하지 않은 이유가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형의 선배 중에는 피신했지만 아내가 협박에 못 이겨 말하는 바람에 하는 수 없이 평양으로 간 사람도 있었다.

기차에 태워 북으로 올라가는데 밤에만 이동했다고 한다. 미군 전투기들이 하늘을 완전히 장악했고 인민군의 전투기는 모두 격추된 데다 대항포도 없었기 때문이다. 인천상륙작전 전이었지만 이미 전세가 역전되어가고 있었던 것이다.

그 선배는 평양에 있는 병원에 배치되었다. 그나마 운이 좋았던 것이다. 서울에서 끌려간 의사들은 대부분 함경도로 배치되었다.

국군이 평양으로 진격하고 인민군이 퇴각하는 기미가 보이고 감시가 소홀한 틈을 타서 도망쳐 나온 그 선배는 황금동 우리집으로 피신했다. 살아남으려고 우리집이 있는 것을 생각해내고 물어물어 찾아온 것이다. 집에 찾아와 아버지에게 숨이 넘어갈 듯 말했다.

“아버님, 저는 기용이 의대 선배입니다. 인민군에게 끌려 왔다가 도망쳐 나왔습니다!”

놀란 아버지는 큰아들 같은 친구를 얼른 숨겨주었다. 우리집에 숨어 있는 동안에 국군의 평양 입성을 맞았다. 하지만 서울 오는 편을 마련하지 못해 20일 넘게 머물다가 서울로 왔다. 함경도로 배치된 의사들은 끝내 서울로 돌아오지 못했다고 한다.

한강다리가 끊기기 전에 남하해 부산에 있다가 9・28서울수복 후에 돌아온 사람들을 ‘도강파’라고 했는데, 그런 사람은 몇 안 되었고 대다수는 피신했거나 인민군에 끌려갔다. 적에게 붙어 날뛰던 자들은 서울 수복 후 어디론가 다 숨어버리고 대학이나 연구소에 나오지 못했다.

◆ 남기동 선생은...

1919년 평양에서 태어났다. 올해로 100살이다. 일본 제6고등학교를 수석으로 졸업하고 경성제국대학 신생 이공학부 응용화학과에 편입했다. 1946년 중앙공업연구소 지질광물연구소장, 요업 과장으로 근무하며 서울대, 고려대, 한양대 등에도 출강했다. 부산 피난 중에도 연구하며 공학도들을 가르쳤다. 6·25 후 운크라 건설위원장을 맡아 1957년 연산 20만 톤 규모의 문경시멘트공장을 건설했다. 화학과장, 공업국 기감(技監)으로 인천판유리공장, 충주비료공장 등 공장 건설 및 복구사업을 추진했다. 1960년 국내 대학 최초로 한양대에 요업공학과를 창설하고 학과장을 맡았다. 1962년 쌍용양회로 옮겨 서독 훔볼트의 신기술 ‘SP킬른(Kiln)’ 방식으로 1964년 연산 40만 톤 규모의 영월공장을 준공했는데, 최단 공사기간을 기록해 은탑산업훈장을 받았다. 영월공장 준공으로 우리나라는 시멘트 수출국으로 부상했다. 1968년 건설한 동해공장은 단위공장으로는 세계 최대 규모였다. 공장 증설을 거듭해 1992년 우리나라 시멘트 생산량은 세계 5위가 되었다. 1978년 동양시멘트로 자리를 옮겨 2차 오일쇼크 때 시멘트 생산 연료를 벙커씨유에서 유연탄으로 대체하는 기술을 개발, 특허 대신 공개를 택해 업계를 위기에서 살려냈다. 이 공적으로 1981년 '3·1 문화상(기술상)'을 받았다. 인도네시아 수하르토(Suharto) 대통령 요청으로 1992년 인도네시아 최초의 시멘트공장인 '시비뇽 시멘트플랜트(P.T. SEMEN CIBINONG)'를 건설했다. 한국요업(세라믹) 학회, 한국화학공학회, 대한화학회등 3개 학회, 대한요업총협회(지금의 한국세라믹총협회) 회장으로 학계와 산업계의 유대를 다졌다. 학교, 연구소, 산업체가 참석하는 '시멘트심포지엄'을 개최하고, 한일국제세라믹스세미나를 조직해 학술교류는 물론 민간교류에도 힘썼다. 세라믹학회는 그의 호를 따 장학지원 프로그램인 '양송 상'을 제정했다. 1993년 인하대에서 명예공학박사 학위를 받고, 2006년 서울대 설립 60돌 기념 '한국을 일으킨 60인' 상, 2007년 세라믹학회 창립 50주년 특별공로상을 받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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