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비전e] 다음 문제는 시멘트공장을 어디에 짓느냐 하는 것이었다. 공장입지 선정에서도 우여곡절을 겪었다. 마음고생이 심했다. 나는 공장입지가 얼마나 중요한 것인지 잘 알고 있었다.

시공사인 스미스에서 파견된 요원들과 건설위원회를 만들어 전국을 대상으로 후보지를 답사했다. 최종적으로 경북 문경과 충북 단양이 적당하다는 결론이 나왔다. 두 곳 모두 장점이 있었다. 단양이 석회석의 질이 좋았고, 문경은 휴전선에서 단양보다 좀 더 떨어져 있었다.

김일환 상공부장관에게 결재를 올렸다. 그런데 중간에 정보가 새나갔다. 문경과 단양에 지역구를 둔 국회의원과 도의원들이 매일 상공부에 와서 유치경쟁을 하는가 싶더니 급기야 김 장관에게 청탁과 협박의 양면 작전을 펼쳤다.

지금 같으면 공해가 발생하는 공장이라고 결사반대를 외쳤을 텐데, 거꾸로 서로 자기네 지역에 지어달라고 로비에 협박까지 했다니 격세지감이 아닐 수 없다. 전쟁이 끝나고 폐허가 된 땅에서 뭐 하나 제대로 먹고살 게 없던 비참한 시절이었으니 님비현상(Not In My Backyard)이 일어날 사안에 핌피현상(Please In My Front Yard)이 일어난 것이다.

충주비료공장 현장 시찰

처음엔 문경과 단양의 대결로 시작되었는데, 결론이 나지 않자 경상북도와 충청북도의 대결로 확대되었다. 장관이 두 지역 국회의원과 도의원들의 눈치를 보느라 쉽게 결정을 내리지 못하고 있자 다급한 의원들이 장관 자택으로까지 쳐들어갔다. 사생결단을 내겠다는 것이었다. 입장이 난처해진 장관은 급한 나머지 임기응변을 했다.

“입지 선정은 어디까지나 기술적인 문제이기 때문에 건설위원장 결정사항입니다.”

결국 나에게 화살이 날아오게 된 것이다. 양쪽 의원들이 번갈아 혜화동집으로 찾아와 나를 협박했다. 하루는 충청도 사투리가, 하루는 경상도 사투리가 혜화동 골목에 울려 퍼졌다. 나중에는 동네사람들이 시끄러워 못살겠다고 항의까지 했다.

두 지역 의원들이 그럴 수밖에 없는 이유를 나는 이해하고도 남았다. 지역발전도 발전이지만 큰 공장이 들어서면 무엇보다 주민들의 일자리가 창출되고 하다못해 인근 밥집들도 잘 될 것이었기 때문이다.

‘절대로 적을 만들지 않는다’는 나의 생활신조이자 인생철학이 위기에 직면한 순간이었다. 참으로 난감했다. 다행히 내가 평안도 사람이라 오해를 받지는 않겠지만, 아무튼 선정되지 않은 지역에서는 모든 원망을 나에게 돌릴 것이 빤했다. 정치인이나 행정가가 아닌 엔지니어에게 그런 선택은 가혹할 정도로 어려운 일이었다. 그렇다고 장관이 떠넘긴 공을 되돌려줄 수도 없는 일이었다.

고심 끝에 운크라 본부에 찾아갔다. 미국 퇴역 장군 콜터 중장이 단장을 맡고 있었는데, 면담을 신청했다.

“아무래도 자금을 지원하는 운크라에서 결정을 내려주는 것이 오해가 없을 것 같소.”

콜터 단장은 잠시 생각에 잠기는가 싶더니 이내 짧고 명확하게 말했다.

“그건 장관 말대로 건설위원장이 결정할 일 아니오?”

역시 건설위원장인 나보고 결정을 하라는 것이 아닌가. 더이상 선택을 미룰 수 없는 순간이 온 것이다. 나는 소신을 밝혔다.

“지금은 휴전상태이니 시멘트공장 같은 국가기간산업시설은 한 발짝이라도 남쪽이 좋을 것 같습니다.”

“그러면 문경으로 하는 것이 맞겠군요.”

그것만으로는 부족했다. 아무리 타당한(실리) 결정이라도 누구의 생각이냐는 명분이 뒷받침되어야 했다. 장관도 그런 이유에서 공을 나에게 넘긴 것이라고 생각했다. 나는 콜터 단장에게 한 가지 제안을 했다.

“문경으로 정하되 단장 명의의 문서를 만들어 주시오. 휴전선에서 가급적 먼 곳에 산업시설을 두는 것은 운크라의 권고사항이기도 하니 말이오.”

하는 수 없이 콜터 단장은 서명을 해주었다. 내가 그것을 받아와 보고했을 때 장관은 콜터 단장의 서명을 확인하고 부담을 내려놓은 듯 편안한 표정을 지으며 “고맙다”고 했다.

이렇게 해서 문경에 국내 기술로 최초의 시멘트공장이 들어서게 되었다. 문경공장 준공으로 매년 500만 달러 이상의 외화를 절약할 수 있게 되었다.

◆ 남기동 선생은...

1919년 평양에서 태어났다. 올해로 100살이다. 일본 제6고등학교를 수석으로 졸업하고 경성제국대학 신생 이공학부 응용화학과에 편입했다. 1946년 중앙공업연구소 지질광물연구소장, 요업 과장으로 근무하며 서울대, 고려대, 한양대 등에도 출강했다. 부산 피난 중에도 연구하며 공학도들을 가르쳤다. 6·25 후 운크라 건설위원장을 맡아 1957년 연산 20만 톤 규모의 문경시멘트공장을 건설했다. 화학과장, 공업국 기감(技監)으로 인천판유리공장, 충주비료공장 등 공장 건설 및 복구사업을 추진했다. 1960년 국내 대학 최초로 한양대에 요업공학과를 창설하고 학과장을 맡았다. 1962년 쌍용양회로 옮겨 서독 훔볼트의 신기술 ‘SP킬른(Kiln)’ 방식으로 1964년 연산 40만 톤 규모의 영월공장을 준공했는데, 최단 공사기간을 기록해 은탑산업훈장을 받았다. 영월공장 준공으로 우리나라는 시멘트 수출국으로 부상했다. 1968년 건설한 동해공장은 단위공장으로는 세계 최대 규모였다. 공장 증설을 거듭해 1992년 우리나라 시멘트 생산량은 세계 5위가 되었다. 1978년 동양시멘트로 자리를 옮겨 2차 오일쇼크 때 시멘트 생산 연료를 벙커씨유에서 유연탄으로 대체하는 기술을 개발, 특허 대신 공개를 택해 업계를 위기에서 살려냈다. 이 공적으로 1981년 '3·1 문화상(기술상)'을 받았다. 인도네시아 수하르토(Suharto) 대통령 요청으로 1992년 인도네시아 최초의 시멘트공장인 '시비뇽 시멘트플랜트(P.T. SEMEN CIBINONG)'를 건설했다. 한국요업(세라믹) 학회, 한국화학공학회, 대한화학회등 3개 학회, 대한요업총협회(지금의 한국세라믹총협회) 회장으로 학계와 산업계의 유대를 다졌다. 학교, 연구소, 산업체가 참석하는 '시멘트심포지엄'을 개최하고, 한일국제세라믹스세미나를 조직해 학술교류는 물론 민간교류에도 힘썼다. 세라믹학회는 그의 호를 따 장학지원 프로그램인 '양송 상'을 제정했다. 1993년 인하대에서 명예공학박사 학위를 받고, 2006년 서울대 설립 60돌 기념 '한국을 일으킨 60인' 상, 2007년 세라믹학회 창립 50주년 특별공로상을 받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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