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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 시멘트산업의 살아있는 역사] 남기동 회고록(33) 6고생

[뉴스비전e] 나는 일본 6고 신입생이 되었고, 기섭이 형은 나보다 1년 앞서 일본으로 건너가 사가고에 다니고 있었다. 형제가 6고와 사가고에 들어간 것은 평안도는 물론 조선반도 전체가 들썩일 만큼 엄청난 사건이었다.

요즘 사람들은 그저 일본에 있는 고등학교에 들어간 것쯤으로 생각할 수도 있지만, 그건 당시의 일본 학교체계를 모르고 하는 소리다. 당시 일본의 고등학교를 지금의 새로운 제도(新制)의 고등학교와 구분하기 위해 ‘구제(舊制)고등학교’라고 부른다. 이름은 고등학교이지만 지금의 대학에 버금가는 수준이었다. 실제로 당시 구제고등학교들은 거의 다 오늘날 대학으로 거듭났다.

교육 내용도 오늘날 대학 1~2학년 교양과정에 해당된다. 구제고등학교는 대학 예과(豫科)에 해당하는 고등교육기관이었던 반면에 오늘날 한국이나 일본에서의 고등학교는 중등교육기관이다. 1881년 정변으로 오쿠마 시게노부(大隈重信)를 실각시키고 실권을 잡은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 등은 관료기구를 정비하기 위해 도쿄에 있는 여러 관립학교를 도쿄대에 통합시키고 유일한 종합대학인 ‘제국대학’을 만들어 관료와 학자를 양성하고자 했다. 동경제국대학을 만드는 과정에서 그 예과를 지역별로 설치한 것이 바로 구제고등학교였다.

6고의 유일한 조선학생이었다. 뒷줄 맨 왼쪽이 독일어선생.

구제고등학교는 일본의 근대화과정에서 최고의 엘리트 양성소로 이름을 떨치며 입신양명을 꿈꾸는 대중의 집중적인 관심을 받았기에 문학이나 드라마 등에 단골 소재로 쓰였다. 가와바타 야스나리(川端康成)의 소설 <이즈의 무희>에도 일고생(一高生)이 나온다.

구제고등학교 중에서도 메이지(明治)시대에 세워진 제1~8고등학교는 일찍부터 정재계에 졸업생을 배출해 후발 학교들보다 우위에 있었는데 이들 학교를 ‘넘버스쿨’이라고 불렀다.

도쿄(東京)에 있던 제1고(도쿄대의 전신), 센다이(仙台)의 제2고(도호쿠대東北大의 전신), 교토(京都)의 제3고(교토대의 전신), 가나자와(金澤)의 제4고(가나자와대의 전신), 구마모토(熊本)의 제5고(구마모토대의 전신), 오카야마(岡山)의 제6고(오카야마대의 전신), 가고시마(鹿兒島)의 제7고(가고시마대의 전신), 나고야(名古屋)의 제8고(나고야대의 전신)가 바로 당시 3년제 넘버스쿨들이다. 그중 내가 들어간 곳이 바로 제6고였다.

The 6th high school in Okayama

제9고 설립을 둘러싸고 니가타(新潟)와 마쓰모토(松本) 사이에 치열한 유치전쟁이 일어나 이때부터 숫자 대신 니가타고등학교’와 ‘마쓰모토고등학교’ 등으로 지명을 따 학교 이름을 짓기로 했다. 이들을 넘버스쿨과 구별하기 위해 ‘지명교(地名校)’ 혹은 ‘네임스쿨’이라고 불렀다. 그런 네임스쿨 중 하나가 사가(佐賀)현에 있는 사가고등학교인데, 바로 기섭이 형이 그 학교 문과에 들어간 것이다.

구제고등학교는 전통이 짧고 긴 차이는 있었지만, 관립과 사립을 불문하고 어느 학교든 그 지역의 최고 명문고였다. 따라서 학교간 격차는 거의 없었다. 1고와 8고의 숫자가 순위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며, 넘버스쿨이든 네임스쿨이든 모두 최상위 학교였다.

구제고등학교의 가장 큰 매력은 사실상 동경제국대학 진학을 보장하는 것이었다. 당시 일본에는 30여 곳의 구제고등학교가 있었는데, 구제고등학교 1학년 정원과 동경제국대학 신입생 정원이 거의 1대 1이어서 졸업하기만 하면 특별히 전공을 따지지 않으면 동경제대에 무시험으로 입학할 수 있었다. 단 의학부처럼 시험을 치르는 곳도 있었다.

그래서 태평양전쟁 전의 일본에서 치열한 입시경쟁은 대학이 아니라 고등학교에 들어가는 데 있었다. 기섭이 형이 사가고 졸업과 동시에 동경제대 법학부에 들어간 것이나 내가 동경제대 공학부 입학이 예정되었던 것도 그 때문이었다. 구제고등학교에 입학하는 순간 동경제대에 들어간 것이나 다름없었던 것이다.

이처럼 동경제대 입학이 보장되었기 때문에 공부는 적당히 하면서 학교생활을 즐기는 학생도 적지 않았다. 같은 학년에서 3년간 유급되면 퇴학되기 때문에 매년 1번씩 고의로 유급을 당해 6년간 느슨하게 공부하는 학생도 있었다.

하지만 우리 형제는 각각의 학교에서 전교 1등을 할 정도로 학업에 열중했다. 조선학생이 일본 구제고등학교에 유학 온 것도 드문 일이었지만 현지에서 선발된 우수한 일본학생들을 제치고 전교 1등을 한다는 것은 상상하기 힘든 일이었다. 그것도 형제가 함께 말이다.

6고 동기들

구제고등학교는 이수하는 외국어에 따라 ‘문과갑류’, ‘문과을류’, ‘문과병류’, ‘이과갑류’, ‘이과을류’, ‘이과병류’로 나뉘었다. 어디에 속하느냐에 따라 동경제국대 어느 학부에 진학할지가 어느 정도 정해졌다.

나는 ‘이과갑류’였는데, 의학부, 약학부, 공학부, 농학부로 진학하는 것으로 되어 있었다. 나는 공학부를 지망했다. 구제고등학교 학생들은 흰색선이 선명한 백선모(白線帽)를 쓰고 망토를 두르고, 나막신을 신고 다녔다. 모자의 흰색 선은 둘 아니면 셋이었지만 사립고등학교 중에는 흰색 선이 없는 학교도 있었다.

1주일에 1시간 이상 군사훈련도 받아야 했다. 교사가 아니라 군에서 파견된 장교가 직접 학교에 배치되어 훈련했다. 중좌(중령), 대좌(대령)급으로 교장 다음가는 지위였다.

모든 구제고등학교는 남학교였다. 여학생의 입학이 허가된 것은 1947년이었다. 일본이 2차대전에서 패한 후 미군정에 의해 여학생의 입학을 허가하는 구제고등학교가 나타났다. 1950년에 6(초등)-3(중등)-3(고등)-4(대학) 교육제도가 시행되면서 구제고등학교는 각 대학으로 흡수되어 폐지되었다.

◆ 남기동 선생은...

1919년 평양에서 태어났다. 올해로 100살이다. 일본 제6고등학교를 수석으로 졸업하고 경성제국대학 신생 이공학부 응용화학과에 편입했다. 1946년 중앙공업연구소 지질광물연구소장, 요업 과장으로 근무하며 서울대, 고려대, 한양대 등에도 출강했다. 부산 피난 중에도 연구하며 공학도들을 가르쳤다. 6·25 후 운크라 건설위원장을 맡아 1957년 연산 20만 톤 규모의 문경시멘트공장을 건설했다. 화학과장, 공업국 기감(技監)으로 인천판유리공장, 충주비료공장 등 공장 건설 및 복구사업을 추진했다. 1960년 국내 대학 최초로 한양대에 요업공학과를 창설하고 학과장을 맡았다. 1962년 쌍용양회로 옮겨 서독 훔볼트의 신기술 ‘SP킬른(Kiln)’ 방식으로 1964년 연산 40만 톤 규모의 영월공장을 준공했는데, 최단 공사기간을 기록해 은탑산업훈장을 받았다. 영월공장 준공으로 우리나라는 시멘트 수출국으로 부상했다. 1968년 건설한 동해공장은 단위공장으로는 세계 최대 규모였다. 공장 증설을 거듭해 1992년 우리나라 시멘트 생산량은 세계 5위가 되었다. 1978년 동양시멘트로 자리를 옮겨 2차 오일쇼크 때 시멘트 생산 연료를 벙커씨유에서 유연탄으로 대체하는 기술을 개발, 특허 대신 공개를 택해 업계를 위기에서 살려냈다. 이 공적으로 1981년 '3·1 문화상(기술상)'을 받았다. 인도네시아 수하르토(Suharto) 대통령 요청으로 1992년 인도네시아 최초의 시멘트공장인 '시비뇽 시멘트플랜트(P.T. SEMEN CIBINONG)'를 건설했다. 한국요업(세라믹) 학회, 한국화학공학회, 대한화학회등 3개 학회, 대한요업총협회(지금의 한국세라믹총협회) 회장으로 학계와 산업계의 유대를 다졌다. 학교, 연구소, 산업체가 참석하는 '시멘트심포지엄'을 개최하고, 한일국제세라믹스세미나를 조직해 학술교류는 물론 민간교류에도 힘썼다. 세라믹학회는 그의 호를 따 장학지원 프로그램인 '양송 상'을 제정했다. 1993년 인하대에서 명예공학박사 학위를 받고, 2006년 서울대 설립 60돌 기념 '한국을 일으킨 60인' 상, 2007년 세라믹학회 창립 50주년 특별공로상을 받기도 했다.

남기동  news@nvp.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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