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비전e] 조선에서도 공학을 공부할 수 있게 되었다는 기쁨도 잠시, 나는 커다란 난관에 부닥치고 말았다. 1941년 봄, 입학한 지 보름쯤 지났을 때 지도교수가 나를 호출했다.
“총장께서 자네를 보자 하시네. 어서 총장실로 가보게.”
당시 총장은 일본인이었는데, 총장이 신입생을 따로 부른다는 것은 상상도 하기 힘든 일이었다. ‘경성제대 총장’ 하면 조선총독, 동양척식주식회사 총재 다음으로 조선에서 권력 서열 3위로 통하는 실세였다.
‘도대체 그런 일본인 총장이 조선인 신입생인 나를 부를 까닭이 무엇인가?’
나는 다소 긴장되어 총장실로 향했다. 노크를 하고 들어가 내 소개를 했더니 총장은 점잖은 투로 말했다.
“기다리고 있었네, 앉게!”
말은 그렇게 했지만 눈빛은 나를 경계하고 있음이 역력했다.
“무슨 일이십니까?”
총장은 아마도 나의 입학원서일 것으로 추정되는 서류를 뚫어져라 들여다보더니 나지막한 목소리로 말했다.
“6고를 나왔군. 그것도 아주 우수한 성적으로 말이야.”
나는 총장의 의중을 몰라 묵묵히 고개를 끄떡여 보였다.
“이 정도 실력이면 동경제대는 들어가고도 남았을 텐데, 왜 여기로 왔나?”
당시 일본에서 고등학교를 나와 경성제대에 들어간 사람은 나 하나밖에 없었다.
“그럴 만한 사정이 있었습니다.”
“물론 그랬겠지. 그런데 말야. 나와 교수들은 좀 다르게 생각하고 있단 말이지.”
“무슨 말씀이신지……”
“일본까지 가서 고등학교를 나온 자네가 일본인들도 최고의 영예로 여기는 동경제대를 코앞에서 포기하고 조선으로 돌아왔다는 게 도저히 납득이 안 되거든. 나도 그렇고 교수들도 필경 자네가 다른 목적이 있어서 우리 경성제대로 온 것이라고 생각하네만.”
“다른 목적이라면……”
“좋아. 단도직입적으로 말하지. 자네 혹시 사회주의 사상에 물든 것 아닌가? 사회주의 운동을 선동하기 위해 우리 경성제대에 편입해 들어온 것 아닌가 말이야. 이미 교수들이 긴급회의를 통해 자네의 입학을 취소해야 한다는 의견을 모았네.”
순간 어안이 벙벙했다. 사회주의 사상이 일본은 물론 조선에서도 급속도로 퍼지고 있기는 했다. 일제는 독립운동가 이상으로 사회주의자들을 색출하기 위해 혈안이 되어 있었다. 같은 독립운동을 해도 사회주의 계열이 더 큰 탄압을 받는 것도 그래서였다.
그런데 총장과 교수들은 나를 일본 사회주의 운동세력에서 잠입시킨 프락치로 간주하고 있었던 것이다. 천만다행으로 신생 공학부에 들어왔는데 실험 한 번 해보지도 못하고 쫓겨날 위기에 직면한 것이다.
‘어떻게 해명해야 오해를 풀 것인가?’
‘내 말을 믿어주기는 할 것인가?’
총장은 마치 심증을 굳혔다는 듯이 내가 자백하기만 기다리고 있는 눈치였다. 총장이라기보다는 검사처럼 보일 정도였다. 그는 ‘편입한 이유’라고 말했지만, ‘잠입한 이유’를 추궁하고 있었다.
순간 나는 평양에서 보통학교에 다닐 때가 떠올랐다. 그때도 지금처럼 엄청난 추궁을 받은 적이 있었다. 당시 우리 반에는 장가를 들고 늦깎이로 들어온 ‘어른친구’가 있었는데, 하루는 “왜놈들이 꼴 보기 싫다”며 ‘어린친구’들에게 일장 연설을 하더니 붓을 들고 뛰쳐나가 칠판 위에 걸린 일왕의 사진에 먹칠을 하고 말았다.
그것을 발견한 일본인 담임선생은 진노했다. 우리를 집에도 못 가게 하고 ‘범인’을 색출하기 시작했다.
“도대체 어떤 놈이 이런 불경스러운 짓을 한 것이냐? 당장 손들고 나오라. 그러지 않으면 반 전체가 혼쭐이 날 줄 알아라.”
하지만 어른친구는 시침을 뚝 떼고 나서지 않았다. 분기를 참지 못한 담임은 얼굴이 시뻘개져 한참을 부들부들 떨더니 반 아이들을 회유하기 시작했다.
“좋아. 다들 눈 감아. 누가 저런 불경스런 짓을 했는지 본 사람이 있으면 손을 들어라. 비밀로 해줄 테니 걱정 말고. 친구의 잘못을 감춰주는 것은 진정한 우정이 아니다.”
하지만 담임의 기대와는 달리 아무 반응이 없었다. 반 전체가 일왕 사진에 먹칠 하는 것을 보았지만, 모두 약속이나 한 듯이 손드는 아이는 없었다. 어린 마음에도 그래선 안 된다고 생각했던 것 같다. 당시의 조마조마했던 기억은 오래도록 잊히지 않았다. 그리고 총장의 다그침이 그 시절 담임이 협박하던 모습과 오버랩되었다.
오해를 풀기 위해서는 상대가 예상한 것보다 훨씬 단호한 역설이 필요했다. 나는 용기를 내어 말문을 열었다.
“외람되지만 총장께서는 동경제대 법학부를 나오셨지요?”
예상치 못한 질문이 훅 들어오자 총장은 눈초리가 올라가더니 버럭 화를 냈다.
“뭐라? 갓 들어온 신입생이 감히 총장인 나의 학력을 들먹이는 것인가!”
나는 차분한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저의 쌍둥이 형이 총장님과 같은 동경제대 법학부를 다녔습니다. 그런데 불행하게도 작년에 병으로 세상을 떠났습니다. 어머니는 큰 충격을 받으셨고 제게 조선으로 돌아와 공부를 계속하라고 간청하셨습니다. 제가 6고로 유학을 간 건 동경제대를 들어가기 위해서였습니다. 동경제대를 포기한 것이 아쉽지만 자식을 잃은 어머니를 더 힘들게 할 수 없어 이 학교로 오게 된 것입니다.”
나의 설명을 듣고 나서 총장은 놀라는 표정을 지었다. 그리고 민망한 듯 눈을 껌벅이더니 언제 그랬냐는 듯이 목소리가 수그러들었다.
“그런 일이 있었군. 이거 내가 큰 실수를 했네. 그러고 보니 자네 형님이 나의 후배였구먼. 동경제대가 아까운 인재를 잃었군. 자, 이제 모든 오해가 풀렸네. 내가 교수들에게 잘 설명할 테니 아무 걱정 말고 돌아가 학업에 열중하게.”
◆ 남기동 선생은...
1919년 평양에서 태어났다. 올해로 100살이다. 일본 제6고등학교를 수석으로 졸업하고 경성제국대학 신생 이공학부 응용화학과에 편입했다. 1946년 중앙공업연구소 지질광물연구소장, 요업 과장으로 근무하며 서울대, 고려대, 한양대 등에도 출강했다. 부산 피난 중에도 연구하며 공학도들을 가르쳤다. 6·25 후 운크라 건설위원장을 맡아 1957년 연산 20만 톤 규모의 문경시멘트공장을 건설했다. 화학과장, 공업국 기감(技監)으로 인천판유리공장, 충주비료공장 등 공장 건설 및 복구사업을 추진했다. 1960년 국내 대학 최초로 한양대에 요업공학과를 창설하고 학과장을 맡았다. 1962년 쌍용양회로 옮겨 서독 훔볼트의 신기술 ‘SP킬른(Kiln)’ 방식으로 1964년 연산 40만 톤 규모의 영월공장을 준공했는데, 최단 공사기간을 기록해 은탑산업훈장을 받았다. 영월공장 준공으로 우리나라는 시멘트 수출국으로 부상했다. 1968년 건설한 동해공장은 단위공장으로는 세계 최대 규모였다. 공장 증설을 거듭해 1992년 우리나라 시멘트 생산량은 세계 5위가 되었다. 1978년 동양시멘트로 자리를 옮겨 2차 오일쇼크 때 시멘트 생산 연료를 벙커씨유에서 유연탄으로 대체하는 기술을 개발, 특허 대신 공개를 택해 업계를 위기에서 살려냈다. 이 공적으로 1981년 '3·1 문화상(기술상)'을 받았다. 인도네시아 수하르토(Suharto) 대통령 요청으로 1992년 인도네시아 최초의 시멘트공장인 '시비뇽 시멘트플랜트(P.T. SEMEN CIBINONG)'를 건설했다. 한국요업(세라믹) 학회, 한국화학공학회, 대한화학회등 3개 학회, 대한요업총협회(지금의 한국세라믹총협회) 회장으로 학계와 산업계의 유대를 다졌다. 학교, 연구소, 산업체가 참석하는 '시멘트심포지엄'을 개최하고, 한일국제세라믹스세미나를 조직해 학술교류는 물론 민간교류에도 힘썼다. 세라믹학회는 그의 호를 따 장학지원 프로그램인 '양송 상'을 제정했다. 1993년 인하대에서 명예공학박사 학위를 받고, 2006년 서울대 설립 60돌 기념 '한국을 일으킨 60인' 상, 2007년 세라믹학회 창립 50주년 특별공로상을 받기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