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비전e] 아내를 처음 만난 건 1941년 경성제대 1학년 때였다. 방학 때 평양 고향집에 들렀는데, 아버지께서 부르시더니 말씀하셨다.

“좋은 처자가 있으니 결혼하거라.”

좋은 처자가 있으니 한번 만나보라는 것도 아니고 무조건 결혼을 하라시니! 얼굴도 모르는 사람과 결혼하는 것이 하나도 이상하지 않던 시절이었다. 그 처자는 아버지 친구의 딸이었고 아버지는 친구와 이미 모든 얘기를 끝낸 상태였다.

신교육을 받으시고 평양에서 개업의로 활동하시던 아버지도 결혼에 관한한 보수적이셨다. 혼인이란 인륜지대사로 집안 간에 이루어지는 것이지 자유연애 같은 것은 상상도 못할 일이었다.

신붓감에 관해 약간의 설명을 듣긴 했다. 아내의 언니, 그러니까 나중에 나의 처형이 될 분이 앞서 가락골로 시집을 왔는데, 인물도 좋고 시어른들께도 잘 해서 나무랄 데 없다는 평판이 온 동네에 자자했다고 한다.

언니가 그처럼 호평을 받고 있었으니 그 동생도 틀림없이 좋은 며느릿감일 것이라는 기대를 모으고 있었다. 나의 부모님은 그 동생을 막내며느리감으로 점찍었다. 성은 박(朴)씨이고, 이름은 옥준(玉俊)이라고 했다.

당시 나는 스물셋이었고 신붓감은 나보다 두 살 어린 스물하나였다. 혼담이 오가기는 오히려 늦은 감이 있기도 했지만, 부모님에겐 서둘 만한 이유가 더 있었다. 기섭이 형을 잃은 슬픔에 나를 귀국시켜 놓고도 안심이 안 되셨던 것이다. 혼례도 올리지 못하고 떠난 아들 생각에 나의 결혼을 서둘렀다.

아내와 처음 만나기로 한 날 아침, 어머니는 몇 가지 주의사항을 일러주셨고 나는 다소 긴장된 마음으로 맞선 장소로 갔다. 형식은 맞선이었지만 사실상 이미 정해진 신붓감을 확인하는 것이었다. 큰형이 그랬던 것처럼 말이다. 마음에 안 든다고 퇴짜를 놓는다는 건 상상도 못할 일이었는데 그것은 아내도 마찬가지였으리라.

그래도 맞선은 맞선이니 신랑집도 신부집도 아닌 제3의 장소 — 어느 친척 집이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 에서 만났다. 어머니와 신붓감 어머니는 나와 아내만 남겨두고 자리를 비켜주었다.

난생 처음 본 이팔청춘 남녀는 한참 동안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서로 약속이나 한듯이 부끄러워 얼굴조차 쳐다보지 못했다. 이러다간 서로 벙어리인 줄 알고 맞선 아닌 맞선을 끝낼 지경이었다. 그보다 자기가 맘에 안 들어 그런가 오해를 살 수도 있겠다 싶었다. 그래선 안 될 일이었다. 힐끔 보아도 듣던 대로 참하고 무척 고운 여자였다. 서로 거절할 수 없는 중매로 만난 것이 오히려 다행이라는 생각마저 들었다.

‘그래도 남자 쪽에서 먼저 말을 거는 것이 도리가 아닌가.’

나는 용기를 내어 침묵을 깨고 천근 같은 입술을 뗐다.

“저…… 생일이 언제오?”

말을 건다고 대뜸 나도 모르게 나온 질문이었다. 지금 생각해도 한심하기 짝이 없는 노릇이었다. 처음 만난 자리에서 한 첫마디가 고작 생일이 언제느냐니! 이름은 들어서 알고 있으니 생일이 궁금했던 것이었을까. 낭만이라곤 찾아볼 수 없는, 공부밖에 모르는 학생이었으니 무리도 아니었으리라. 신붓감도 나의 뜬금없는 물음에 당황했는지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겨우 입을 뗐다.

“사월 열사흘이어요.”

순간 나는 피식 웃음이 나왔다. 4월 13일은 내 생일이었기 때문이다. 내 생일을 묻는 줄로 알아듣고 대답한 것이 분명했다. 중매쟁이한테 신랑감 생일을 들었나 보다 생각했다. 나는 좀 더 큰 목소리로 다시 물었다.

“아니, 내 생일 말고 그쪽 생일이 언제냐 그 말이오.”

나의 되물음에 아내는 짐짓 놀라는 표정을 짓더니 이번엔 기어 나오는 목소리로 대답했다.

“사월 열사흘이어요.”

멀쩡한 아가씨가 두 번이나 잘못 알아들었을 리는 없을 테고 나를 놀리는 건 더욱 아닐 터였다.

“정말, 정말 사월 열사흘이란 말이오?”

몇 번이나 확인한 끝에 우리는 서로 생일이 같음을 알게 되었고 둘 다 놀라며 신기해했다. 아내는 내가 태어난 지 정확하게 2년이 되는, 그러니까 1921년 4월 13일 나의 두 번째 생일에 태어났다. 그것도 넓게 보면 한 동네나 다름없는 좁은 지역에서 말이다.

생일이 같은 남녀가 결혼할 확률은 얼마나 될까? 수학이라면 누구에게도 뒤지지 않는다고 자신하던 나였지만 그건 확률로도 풀 수 없을 만큼 어려운 문제였다.

은혼(25주년)을 지나 금혼(50주년)을 넘어 금강혼(75년)이라는 해로(偕老)의 첫 만남은 그렇게 기적 같았다. 나는 1941년 9월 1일 결혼했다. 지금도 그때 찍은 사진을 보면 웃음이 나온다. 나도 아내도 너무 어려 보인다.

큰형이 살고 있는 명륜동 집에서 신혼살림을 시작했다. 그리 넓지 않은 집에서 큰형 식구와 더불어 살았지만, 아내는 불평하지 않고 살림에 충실했다. 1942년 혜화동에 집을 구해 분가했다. 목조로 된 양옥으로 대지가 60평 가까운 좋은 집이었다.

3년 동안 아이가 들어서지 않아 아내는 적잖게 맘고생을 했다. 부모님도 내색은 안 하셨지만 걱정이 많으셨을 텐데, 다행히 큰아들 광준이가 태어났다.

◆ 남기동 선생은...

1919년 평양에서 태어났다. 올해로 100살이다. 일본 제6고등학교를 수석으로 졸업하고 경성제국대학 신생 이공학부 응용화학과에 편입했다. 1946년 중앙공업연구소 지질광물연구소장, 요업 과장으로 근무하며 서울대, 고려대, 한양대 등에도 출강했다. 부산 피난 중에도 연구하며 공학도들을 가르쳤다. 6·25 후 운크라 건설위원장을 맡아 1957년 연산 20만 톤 규모의 문경시멘트공장을 건설했다. 화학과장, 공업국 기감(技監)으로 인천판유리공장, 충주비료공장 등 공장 건설 및 복구사업을 추진했다. 1960년 국내 대학 최초로 한양대에 요업공학과를 창설하고 학과장을 맡았다. 1962년 쌍용양회로 옮겨 서독 훔볼트의 신기술 ‘SP킬른(Kiln)’ 방식으로 1964년 연산 40만 톤 규모의 영월공장을 준공했는데, 최단 공사기간을 기록해 은탑산업훈장을 받았다. 영월공장 준공으로 우리나라는 시멘트 수출국으로 부상했다. 1968년 건설한 동해공장은 단위공장으로는 세계 최대 규모였다. 공장 증설을 거듭해 1992년 우리나라 시멘트 생산량은 세계 5위가 되었다. 1978년 동양시멘트로 자리를 옮겨 2차 오일쇼크 때 시멘트 생산 연료를 벙커씨유에서 유연탄으로 대체하는 기술을 개발, 특허 대신 공개를 택해 업계를 위기에서 살려냈다. 이 공적으로 1981년 '3·1 문화상(기술상)'을 받았다. 인도네시아 수하르토(Suharto) 대통령 요청으로 1992년 인도네시아 최초의 시멘트공장인 '시비뇽 시멘트플랜트(P.T. SEMEN CIBINONG)'를 건설했다. 한국요업(세라믹) 학회, 한국화학공학회, 대한화학회등 3개 학회, 대한요업총협회(지금의 한국세라믹총협회) 회장으로 학계와 산업계의 유대를 다졌다. 학교, 연구소, 산업체가 참석하는 '시멘트심포지엄'을 개최하고, 한일국제세라믹스세미나를 조직해 학술교류는 물론 민간교류에도 힘썼다. 세라믹학회는 그의 호를 따 장학지원 프로그램인 '양송 상'을 제정했다. 1993년 인하대에서 명예공학박사 학위를 받고, 2006년 서울대 설립 60돌 기념 '한국을 일으킨 60인' 상, 2007년 세라믹학회 창립 50주년 특별공로상을 받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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