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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 시멘트산업의 살아있는 역사] 남기동 회고록(34) 금강산의 3형제

[뉴스비전e] 1937년 내가 6고 입학에 성공하면서 큰형은 경성제대 의학부 1학년, 기섭이 형은 사가고 2학년, 나는 6고 1학년으로 모두 최고 명문학교에 다니게 되었다. 3형제가 이렇게 공부를 잘하기는 평양은 물론 조선에서도 우리밖에 없었을 것이다. 아버지와 어머니는 더없이 자랑스러워하셨다.

큰형은 의학부 1학년이 되면서 사각모를 쓰고 예과 때보다 행동도 의젓해진 것 같았다. 본과에 올라오면 마음가짐도 달라지는 모양이었다. 예과의 학과는 교양과목이 많았으나 본과에서는 전부 의학이었다. 1학기 중간쯤 사체해부가 시작되었는데, 큰형은 처음 사체를 해부해 보고 나서 한 달 넘게 고기를 먹지 못했고 괴로움에 담배까지 배웠다. 고기를 보면 해부했던 사체가 떠오른다고 했다.

그 해 여름방학 때 우리 3형제는 금강산으로 여행을 떠났다. 평양에서는 가는 길이 좋지 않아 일단 서울로 내려와 철원으로 가기로 했다. 철원에서 기차를 타고 내금강 장안사에 도착했다. 비로봉을 넘어 구미산장에서 하룻밤을 묵었다. 만물상, 구룡연, 구룡폭포 등을 구경하고 외금강 온정리로 나왔다. 해금강은 가보지 않았고, 삼일포를 기차에서 내려다보면서 관동팔경의 하나인 총석정을 구경했다. 바다에 원통형의 바위가 우뚝우뚝 솟은 모습은 지금 생각해도 장관이었다. 그곳 여관에서 모기장을 치고 셋이 잠을 잔 기억이 생생하다.

통천 고저에서 원산 쪽으로 기차를 타고 가다 송전역에서 내렸다. 그곳 해수욕장에서 큰형의 동급생이 도쿄상대에 다니는 아우와 있는 것을 보았다. 큰형은 그 형제에게 기섭이 형과 나를 소개하며 어깨가 살짝 올라가는 듯했다.

그 다음 원산 송도해수욕장에 가서 수영을 했다. 도중에 우리와 눈이 마주친 어느 일본인 중학생이 함께 온 아우들한테 나와 기섭이 형을 차례로 가리키며 말했다.

“이쪽은 6고생이고, 이쪽은 사가고생이다.”

모자에 교표가 붙어 있어 어느 학교인지 알 수 있었다. 두 학교 모두 일본 수재들도 가기 힘들다는 것을 일본인 중학생은 잘 알고 있었던 것이다. 그 얘기를 듣고 큰형이 무척이나 자랑스러워하는 표정을 지었다. 어깨가 전보다 더 올라간 듯했다.

큰형은 여름방학 개학을 1주일 앞두고 학교에서 농구합숙훈련이 있어 서울로 가려 했다. 그런데 아버지께서 천천히 가라고 말려서 더 머물렀는데, 그때 중매쟁이가 드나들더니 두 집안의 혼담이 성사되었다.

형수님은 관후리에서 순천의원을 운영하시던 어른의 3녀1남 중 맏이로 당시 평양보통학교 4학년이었고 17세였다. 양가 부모님이 좋다고 하셨고 큰형과 형수는 삼중정백화점에서 스치듯이 한 번 보았다. 모든 것이 결정된 일이었고 그냥 눈코입이 제자리에 있는 것을 서로 확인하는 자리였다고 한다. 그래도 사진은 미리 보았다고 한다. 형님은 사촌 기항 형님과 동행하고 형수님은 친정어머니와 동행했다고 한다.

그 후에 형수님은 서문고등여자학교 졸업반 때 큰형과 약혼한 후 일본 동경여자고등학원에 입학했다. 큰형이 형수님을 보러 도쿄에 왔을 때 내가 두 분에게 일본구경을 시켜드렸다. 오카야마에 있는 일본 3대 정원 중 하나인 ‘고라쿠엔(後楽園)’에도 갔다. 1938년 두 분이 결혼해 형수님이 황금동으로 시집을 왔다. 아버지는 큰형이 광현이를 낳은 후에 집을 사주리라 생각하시고 1940년 봄 우선 명륜동 1가 14번지에 집을 샀다. 형님과 나이 든 식모만 이사했다. 하숙생활을 청산한 것이다.

6고 10년 만의 첫 개근상

내가 6고 2학년을 마쳤을 때 기섭이 형은 사가고를 우수한 성적으로 졸업하고 목표로 한 동경제대 법학과에 입학했다. 나도 동경제대 공학부를 목표로 마지막 1년을 충실히 보내고 있었다.

6고를 졸업할 때 나는 평중 졸업 때처럼 우등상과 함께 개근상을 받아 역시 현지 신문에 소개되었다.

학교가 있는 오카야마에는 해마다 전염병이 돌아 현지 학생들도 대부분 학교에 나오지 않는 기간에도 나는 이를 악물고 등교했다.

그 결과 나는 6고에서 10년 만에 첫 개근상 수상자가 되었다. 그러니 신문에 대서특필되는 것도 이상한 일이 아니었다.

◆ 남기동 선생은...

1919년 평양에서 태어났다. 올해로 100살이다. 일본 제6고등학교를 수석으로 졸업하고 경성제국대학 신생 이공학부 응용화학과에 편입했다. 1946년 중앙공업연구소 지질광물연구소장, 요업 과장으로 근무하며 서울대, 고려대, 한양대 등에도 출강했다. 부산 피난 중에도 연구하며 공학도들을 가르쳤다. 6·25 후 운크라 건설위원장을 맡아 1957년 연산 20만 톤 규모의 문경시멘트공장을 건설했다. 화학과장, 공업국 기감(技監)으로 인천판유리공장, 충주비료공장 등 공장 건설 및 복구사업을 추진했다. 1960년 국내 대학 최초로 한양대에 요업공학과를 창설하고 학과장을 맡았다. 1962년 쌍용양회로 옮겨 서독 훔볼트의 신기술 ‘SP킬른(Kiln)’ 방식으로 1964년 연산 40만 톤 규모의 영월공장을 준공했는데, 최단 공사기간을 기록해 은탑산업훈장을 받았다. 영월공장 준공으로 우리나라는 시멘트 수출국으로 부상했다. 1968년 건설한 동해공장은 단위공장으로는 세계 최대 규모였다. 공장 증설을 거듭해 1992년 우리나라 시멘트 생산량은 세계 5위가 되었다. 1978년 동양시멘트로 자리를 옮겨 2차 오일쇼크 때 시멘트 생산 연료를 벙커씨유에서 유연탄으로 대체하는 기술을 개발, 특허 대신 공개를 택해 업계를 위기에서 살려냈다. 이 공적으로 1981년 '3·1 문화상(기술상)'을 받았다. 인도네시아 수하르토(Suharto) 대통령 요청으로 1992년 인도네시아 최초의 시멘트공장인 '시비뇽 시멘트플랜트(P.T. SEMEN CIBINONG)'를 건설했다. 한국요업(세라믹) 학회, 한국화학공학회, 대한화학회등 3개 학회, 대한요업총협회(지금의 한국세라믹총협회) 회장으로 학계와 산업계의 유대를 다졌다. 학교, 연구소, 산업체가 참석하는 '시멘트심포지엄'을 개최하고, 한일국제세라믹스세미나를 조직해 학술교류는 물론 민간교류에도 힘썼다. 세라믹학회는 그의 호를 따 장학지원 프로그램인 '양송 상'을 제정했다. 1993년 인하대에서 명예공학박사 학위를 받고, 2006년 서울대 설립 60돌 기념 '한국을 일으킨 60인' 상, 2007년 세라믹학회 창립 50주년 특별공로상을 받기도 했다.

남기동  news@nvp.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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