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비전e] 해방과 동시에 북쪽에는 곧 소련군이 들어와 38선까지 포진했고, 미군은 9월 말 남쪽으로 들어와 38선을 사이에 두고 나라가 두 동강이 났다.

해방정국은 혼란스럽기 그지없었고 미군정에 이어 남한에서 단독 정부가 수립된 이후에도 여전히 갈등과 분쟁은 끊이지 않고 전운마저 감돌고 있었다.

38선은 초기에는 감시가 그리 심하지 않아 사람들이 쉽게 왕래할 수 있었지만, 1948년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되기 직전에는 폐쇄되다시피 해 사람의 왕래가 거의 끊겼다.

아버지는 1947년까지 세 차례 정도 서울에 다녀가셨다. 청단을 거쳐 38선을 넘고 거기서 기차로 온다고 하셨다. 아버지는 평양을 떠나실 때 돈이 될 만한 물건을 가지고 오셔서 서울에서 돈으로 바꿔 우리 3남매 부부에게 나누어 주셨다. 그 시기에 큰형이나 나나 몇 천원의 봉급으로 살아가느라 살림이 곤궁했었는데 아버지가 주시는 돈이 큰 도움이 되었다.

준성 이모가 1947년 봄에 서울에 와서 이화고등여학교에 입학하고 명륜동 큰형 집에서 통학했다. 이모는 스케이트를 아주 잘 탔다. 그 해 겨울 학교 대표선수로 출전해 한강에서 멋진 경기를 했는데 우리 3남매 부부도 아이들을 데리고 나가 응원한 생각이 난다. 그 시절엔 한강이 얼면 스케이트장이 만들어졌다. 이모는 1년만 다니고 1948년에 다시 평양으로 돌아갔다.

한겨울 한강 스케이트장에서

중앙공업연구소가 기틀을 잡아가는가 싶더니 1950년 6・25가 발발했다. 휴전선이 뚫린 지 불과 사흘 만에 서울이 인민군에게 함락되고 말았다. 너무 순식간에 일어난 일이라 아연실색할 뿐이었다.

우리 가족은 피난을 갈 틈도 없었다. 서둘러 짐을 쌌다고 해도 피난을 가지는 못했을 것이다. 한강철교가 폭파되었기 때문이다. 큰형도 나도 강북에 살고 있어 속수무책으로 적지에 놓이게 된 것이다.

며칠 후 한밤중에 인민군 장교 복장을 한 젊은이 몇이 우리 집에 들이닥쳤다. 나는 덜컥 겁이 났다. 그런데 자세히 보니 모두 낯이 익었다. 바로 몇 해 전 내가 서울대 이공학부에 출강할 당시 나의 수업을 듣던 제자들이었다.

“아니, 자네들은……”

“맞습니다, 선생님. 긴 말씀 드릴 시간이 없습니다. 어서 피하십시오. 곧 선생님 같은 분들을 데려가려고 인민군들이 들이닥칠 것입니다. 나중에는 저희도 어떻게 할 수가 없습니다. 속히 몸을 숨기셔야 합니다.”

그렇게 신신당부한 후에 제자들은 서둘러 밖으로 나가버렸다. 나는 일단 몸을 숨겼다. 그러면서 그 제자들에 관한 기억을 더듬어 보았다.

해방 직후 나의 강의를 듣는 이공학부 학생들 가운데는 좌익사상에 심취한 이들이 몇 있었다. 그들은 학업은 뒷전이고 사회주의 모임에 참가하느라 수업은 물론 시험 때도 결석하는 일이 잦았다. 자연히 낙제점을 면하지 못했다.

학점 때문에 졸업을 할 수 없을 지경에까지 이른 그들은 급한 마음에 우리 집까지 찾아와 모자란 학점을 달라고 통사정을 했다.

교수들에게 사정해봐야 아무 소용이 없을 것이라고 판단한 학생들은 비교적 자율권을 발휘할 수 있는 강사인 나를 찾아왔던 것이다. 나를 너무 쉽게 생각하고 부탁하는 것 아닌가 하고 살짝 언짢기도 했다. 내가 완곡하게 타일러 돌려보냈는데, 며칠 후 또 찾아와 사정을 했다. 그때도 타일러 돌려보내려고 하자 아내가 나섰다.

“그래도 제자들인데 그렇게 매정하게 돌려보내면 얼마나 실망이 크겠어요? 수업을 제대로 듣지 않는 것은 잘못이지만, 졸업은 할 수 있게 해주어야 하지 않겠어요? 이렇게 집에까지 찾아와 사정하는 게 너무 딱하잖아요.”

아내의 말을 듣고 보니 틀린 얘기도 아니었다. 다른 공부를 해서 그렇지, 무능하거나 나쁜 학생들은 절대 아니었다. 나는 아내의 의견을 받아들여 학생들에게 낙제를 면할 만큼만 학점을 주겠다고 약속했고, 아내는 제자들에게 과일을 내와 깎아주며 “기운 내라”며 다독여 돌려보냈다.

나는 약속을 지켰고, 그 덕분인지 문제의 제자들은 무사히 졸업할 수 있었다.

인민군 복장을 한 젊은이들은 그때 우리집으로 찾아와 학점을 달라고 간청하던 제자들이었다. 결초보은하겠다는 마음으로 나를 살리기 위해 본대에서 몰래 이탈해 찾아왔던 것이다. 고마운 일이 아닐 수 없었다.

나중에 알게 된 사실이지만 당시 교수들 중에는 몸을 피하지 못해 인민군에게 붙잡혀 북으로 끌려가거나 변을 당한 이들이 적지 않았다. 원칙대로 학점을 준 교수들은 앙심을 품은 제자들에게 보복을 당하기도 했다. 그 제자들이 귀띔해 주지 않았다면 나 역시 납북되거나 목숨을 잃었을지 모른다.

먼 훗날 막내 명현이가 사위를 보았는데, 손녀 내외가 내게 인사를 하러 온 적이 있다. 손녀사위가 자신의 할아버지께서 서울대 화공과 교수로 재직 중에 6・25 때 내려온 제자들에게 변을 당하셨다고 했다. 함자를 물어보니 정말로 내가 잘 아는 교수였다. 내가 그 시절 앨범을 꺼내 나와 여럿이 함께 찍은 사진에서 “이 분이네” 하고 알려주었더니 손녀사위가 눈시울이 붉어지며 말했다.

“저희 아버지도 당시 세 살밖에 안 되었고 사진 한 장 남아 있지 않아 할아버지가 어떻게 생기셨는지 알 수 없어 늘 한스러워하셨습니다.”

손녀사위의 할아버지인 그 교수는 좌익 학생들이 학점을 올려 달라고 억지를 부릴 때 들어주지 않았는데, 졸업을 못하고 북으로 가서 남침 때 내려온 제자들에게 해코지를 당했던 것이다. 사실 원칙을 지켰을 뿐인데…….

결과적으로는 아내의 선견지명이 아니었다면 나 역시 어찌 되었을지 알 수가 없다.

◆ 남기동 선생은...

1919년 평양에서 태어났다. 올해로 100살이다. 일본 제6고등학교를 수석으로 졸업하고 경성제국대학 신생 이공학부 응용화학과에 편입했다. 1946년 중앙공업연구소 지질광물연구소장, 요업 과장으로 근무하며 서울대, 고려대, 한양대 등에도 출강했다. 부산 피난 중에도 연구하며 공학도들을 가르쳤다. 6·25 후 운크라 건설위원장을 맡아 1957년 연산 20만 톤 규모의 문경시멘트공장을 건설했다. 화학과장, 공업국 기감(技監)으로 인천판유리공장, 충주비료공장 등 공장 건설 및 복구사업을 추진했다. 1960년 국내 대학 최초로 한양대에 요업공학과를 창설하고 학과장을 맡았다. 1962년 쌍용양회로 옮겨 서독 훔볼트의 신기술 ‘SP킬른(Kiln)’ 방식으로 1964년 연산 40만 톤 규모의 영월공장을 준공했는데, 최단 공사기간을 기록해 은탑산업훈장을 받았다. 영월공장 준공으로 우리나라는 시멘트 수출국으로 부상했다. 1968년 건설한 동해공장은 단위공장으로는 세계 최대 규모였다. 공장 증설을 거듭해 1992년 우리나라 시멘트 생산량은 세계 5위가 되었다. 1978년 동양시멘트로 자리를 옮겨 2차 오일쇼크 때 시멘트 생산 연료를 벙커씨유에서 유연탄으로 대체하는 기술을 개발, 특허 대신 공개를 택해 업계를 위기에서 살려냈다. 이 공적으로 1981년 '3·1 문화상(기술상)'을 받았다. 인도네시아 수하르토(Suharto) 대통령 요청으로 1992년 인도네시아 최초의 시멘트공장인 '시비뇽 시멘트플랜트(P.T. SEMEN CIBINONG)'를 건설했다. 한국요업(세라믹) 학회, 한국화학공학회, 대한화학회등 3개 학회, 대한요업총협회(지금의 한국세라믹총협회) 회장으로 학계와 산업계의 유대를 다졌다. 학교, 연구소, 산업체가 참석하는 '시멘트심포지엄'을 개최하고, 한일국제세라믹스세미나를 조직해 학술교류는 물론 민간교류에도 힘썼다. 세라믹학회는 그의 호를 따 장학지원 프로그램인 '양송 상'을 제정했다. 1993년 인하대에서 명예공학박사 학위를 받고, 2006년 서울대 설립 60돌 기념 '한국을 일으킨 60인' 상, 2007년 세라믹학회 창립 50주년 특별공로상을 받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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