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비전e] 6고 시절 추억이 있다. 1학년 때는 학교 기숙사에 있다가 2학년이 되면서 기숙사를 나와 하숙을 해야 했다. 리어카에 책과 몇 가지 세간을 싣고 여기저기 끌고 다니며 하숙집을 찾아보았다. 유학생의 설움 같은 것은 없었다 해도 ‘조선인라고 하숙을 주지 않으면 어쩌나?’ 하는 걱정이 없지 않았다.

당시 외지인들 가운데 인근 섬에서 온 사람들이 있었는데 그중엔 한센병 환자가 종종 있어 모르는 사람은 집에 들이기를 꺼리는 분위기였다.

몇 군데 퇴짜를 맞고 헤매다가 어느 집 문을 두드렸는데, 인자하게 생긴 아주머니가 반갑게 인사를 하며 맞아주었다. 조선에서 온 학생이며 6고에 다닌다고 했더니 깜짝 놀라는 표정을 지었다. 오카야마에서 오랫동안 하숙을 쳤는데 조선학생은 처음 본다고 했다. 인상 좋은 아주머니는 나를 선뜻 받아주었다.

입주한 후 아주머니로부터 가장인 남편은 몇 해 전에 불의의 사고로 세상을 떠났고 중학교에 다니는 두 딸을 키우며 하숙을 쳐 생계를 꾸려간다는 얘기를 들었다.

아주머니는 나에게 “내 집처럼 편하게 지내라”며 자상하고 세심하게 챙겨주었고, 두 딸도 처음에는 수줍어하며 말도 잘 붙이지 못하다가 나중에는 친해져 나를 오빠처럼 잘 따랐다. 그중 평양에 있는 여동생 기진이 또래의 아이가 내게 공부도 가르쳐 달라고 상냥하게 조르면서 나와 함께하는 시간이 많았다. 웃는 얼굴이 참 예쁜 아이였다.

6고 시절 오카야마 하숙집에서

그 아이는 조선사람을 처음 본 것도 신기한데 일본어를 유창하게 하는 게 더 신기했던 모양이다. 시간이 지나면서 나는 그 아이가 나한테 호감을 가지고 있음을 알게 되었다. 아주머니도 우리 둘이 얘기하고 있는 걸 볼 때마다 잘 어울린다며 흐뭇한 표정을 짓곤 했다.

그렇다고 무슨 로맨스 같은 것이 있었던 것은 아니다. 착하고 예쁜 학생이었지만 당시 나는 공부에 전념하고 있어서 크게 마음이 동하지는 않았다. 설령 내가 어떤 감정을 가지고 있었다고 해도 달라지는 것은 없었을 것이다.

영화나 드라마에서처럼 사랑했다고 해도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이었다. 나도 그 아이도 너무 어렸을 뿐만 아니라 자유연애가 허용되지 않던 시절에, 그것도 일본여자와 교제를 한다거나 결혼한다는 것은 우리 집안에서는 절대로 용납될 수 없는 일임을 나는 너무나 잘 알고 있었다.
학창시절의 추억이 다 그렇듯 어른이 되면 문득문득 아련해지다가 일상 속에서 서서히 잊혀질 인연이었다. 전쟁 같은 비극이 없었다면 말이다.

해방이 되고 업무차 일본에 갔을 때 오카야마에 있는 동창을 만나러 갔다가 그 옛날 하숙집을 찾아간 적이 있다. 변함없이 친절한 하숙집 아주머니는 예전처럼 환한 얼굴로 나를 반겨주었다. 그런데 내가 보이지 않는 딸들의 안부를 묻자 아주머니는 갑자기 눈물을 훔치면서 목이 메어 가까스로 말문을 열었다.

“가엽게도 원폭 때 희생되고 말았어요. 우리 아이가 미나미 상을 참 좋아했는데, 내 욕심 같아선 미나미 상에게 시집보내고 싶었다니까. 만약 그랬다면 조선으로 건너가 살았을 테니 그렇게 허망하게 떠나진……”

아주머니는 말을 잊지 못했고, 나 역시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대신 아주머니의 손을 꼬옥 잡아주며 오카야마의 하늘처럼 해맑게 웃던 아이의 얼굴을 잠시 떠올려보고 명복을 빌어주었다.

인간은 무엇을 얻으려고 전쟁을 일으키지만 어리석게도 결국은 너무 많은 것을 잃게 된다. 전쟁을 일으킨 자들은 아무것도 얻지 못하고, 아무 죄없는 사람들에게 상처만 남기고 만다.

◆ 남기동 선생은...

1919년 평양에서 태어났다. 올해로 100살이다. 일본 제6고등학교를 수석으로 졸업하고 경성제국대학 신생 이공학부 응용화학과에 편입했다. 1946년 중앙공업연구소 지질광물연구소장, 요업 과장으로 근무하며 서울대, 고려대, 한양대 등에도 출강했다. 부산 피난 중에도 연구하며 공학도들을 가르쳤다. 6·25 후 운크라 건설위원장을 맡아 1957년 연산 20만 톤 규모의 문경시멘트공장을 건설했다. 화학과장, 공업국 기감(技監)으로 인천판유리공장, 충주비료공장 등 공장 건설 및 복구사업을 추진했다. 1960년 국내 대학 최초로 한양대에 요업공학과를 창설하고 학과장을 맡았다. 1962년 쌍용양회로 옮겨 서독 훔볼트의 신기술 ‘SP킬른(Kiln)’ 방식으로 1964년 연산 40만 톤 규모의 영월공장을 준공했는데, 최단 공사기간을 기록해 은탑산업훈장을 받았다. 영월공장 준공으로 우리나라는 시멘트 수출국으로 부상했다. 1968년 건설한 동해공장은 단위공장으로는 세계 최대 규모였다. 공장 증설을 거듭해 1992년 우리나라 시멘트 생산량은 세계 5위가 되었다. 1978년 동양시멘트로 자리를 옮겨 2차 오일쇼크 때 시멘트 생산 연료를 벙커씨유에서 유연탄으로 대체하는 기술을 개발, 특허 대신 공개를 택해 업계를 위기에서 살려냈다. 이 공적으로 1981년 '3·1 문화상(기술상)'을 받았다. 인도네시아 수하르토(Suharto) 대통령 요청으로 1992년 인도네시아 최초의 시멘트공장인 '시비뇽 시멘트플랜트(P.T. SEMEN CIBINONG)'를 건설했다. 한국요업(세라믹) 학회, 한국화학공학회, 대한화학회등 3개 학회, 대한요업총협회(지금의 한국세라믹총협회) 회장으로 학계와 산업계의 유대를 다졌다. 학교, 연구소, 산업체가 참석하는 '시멘트심포지엄'을 개최하고, 한일국제세라믹스세미나를 조직해 학술교류는 물론 민간교류에도 힘썼다. 세라믹학회는 그의 호를 따 장학지원 프로그램인 '양송 상'을 제정했다. 1993년 인하대에서 명예공학박사 학위를 받고, 2006년 서울대 설립 60돌 기념 '한국을 일으킨 60인' 상, 2007년 세라믹학회 창립 50주년 특별공로상을 받기도 했다.

저작권자 © 뉴스비전e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