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비전e] 아버지는 아주 명철하고 꼼꼼한 분이셨다. 현미경으로 들여다보듯 사물이나 현상을 세밀하게 관찰하고 분석하셨다.

대범할 때는 대범하셨지만 평소에는 잔소리를 많이 하셨다. 어머니보다 훨씬 심하셨는데, 어머니가 하나하나 따르기가 힘들었을 정도다.

바닥에 먼지 한 점이라도 보인다 싶으면 절대로 그냥 넘어가는 법이 없었다. 기숙사 사감처럼 검지로 먼지를 찍어 시커멓게 된 손가락을 치켜세우며 말씀하셨다.

“여기 먼지 좀 봐라. 병원 하는 집에 먼지가 있으면 되겠느냐?”

우리 4남매는 어떻게든 아버지의 잔소리를 모른 체하고 피하려 했지만 늘 헛수고였다. 결국은 아버지가 가리키는 대로 먼지를 닦아내야 했다.

아버지는 세 분 형제 중에서 유일하게 고등교육을 받아 집안에 상의할 일이 있으면 형님들에게 진언하는 입장이었고 큰아버지들은 아버지 말을 귀담아 들으셨다. 아버지는 굉장히 근검절약하셨다. 자식들이 밥을 먹다 밥풀을 하나 흘리기라도 하면 레퍼토리처럼 잔소리를 하셨다.

“한 톨의 쌀(米)이 문자 그대로 여든여덟(八十八) 번의 손이 가는 노력의 소산임을 알아야 한다. 모든 물건이 귀한 것이니 아껴야 한다.”

길게 맨 넥타이

넥타이 하나도 그냥 매지 않으셨다. 늘 같은 길이로 매면 매듭 부분이 금방 헤진다며 새 넥타이를 처음에는 길게 매고 날마다 조금씩 줄여나가 매듭이 지어지는 위치를 옮겨 넥타이의 수명을 늘렸다. 그래서 아버지의 넥타이는 적당한 적은 별로 없고 항상 길거나 짧았던 것으로 기억한다.

나도 아버지처럼 평생 넥타이를 그렇게 매었다. 아이들이 자라서 내게 넥타이를 선물하며 그러지 말라고 했지만 나는 이렇게 말하곤 했다.

“모르는 소리야, 그래야 타이를 오래 매지.”

절약도 절약이었지만, 그보다는 넥타이를 맬 때마다 북녘에 계신 아버지가 떠올랐기 때문이다.

그렇게 근검절약이 몸에 밴 아버지였지만, 우리 4남매나 큰집 형님들의 교육에 대해서는 지원을 아끼지 않으셨다. 근검하셨지, 구두쇠처럼 인색한 분은 절대 아니었다. 꼭 필요하다 싶은 것은 아무리 비싸도 제대로 된 것을 장만해두고 여러 사람과 나누어 쓰셨다.

대표적인 것이 허리가 잘록하고 아랫단이 무릎까지 내려오는 프록(Frock) 코트였다. 나의 어린 눈에도 정말 근사한 옷이었다. 하지만 정작 아버지보다는 다른 어른들이 입고 다니는 것을 더 많이 본 것 같다.

◆ 남기동 선생은...

1919년 평양에서 태어났다. 올해로 100살이다. 일본 제6고등학교를 수석으로 졸업하고 경성제국대학 신생 이공학부 응용화학과에 편입했다. 1946년 중앙공업연구소 지질광물연구소장, 요업 과장으로 근무하며 서울대, 고려대, 한양대 등에도 출강했다. 부산 피난 중에도 연구하며 공학도들을 가르쳤다. 6·25 후 운크라 건설위원장을 맡아 1957년 연산 20만 톤 규모의 문경시멘트공장을 건설했다. 화학과장, 공업국 기감(技監)으로 인천판유리공장, 충주비료공장 등 공장 건설 및 복구사업을 추진했다. 1960년 국내 대학 최초로 한양대에 요업공학과를 창설하고 학과장을 맡았다. 1962년 쌍용양회로 옮겨 서독 훔볼트의 신기술 ‘SP킬른(Kiln)’ 방식으로 1964년 연산 40만 톤 규모의 영월공장을 준공했는데, 최단 공사기간을 기록해 은탑산업훈장을 받았다. 영월공장 준공으로 우리나라는 시멘트 수출국으로 부상했다. 1968년 건설한 동해공장은 단위공장으로는 세계 최대 규모였다. 공장 증설을 거듭해 1992년 우리나라 시멘트 생산량은 세계 5위가 되었다. 1978년 동양시멘트로 자리를 옮겨 2차 오일쇼크 때 시멘트 생산 연료를 벙커씨유에서 유연탄으로 대체하는 기술을 개발, 특허 대신 공개를 택해 업계를 위기에서 살려냈다. 이 공적으로 1981년 '3·1 문화상(기술상)'을 받았다. 인도네시아 수하르토(Suharto) 대통령 요청으로 1992년 인도네시아 최초의 시멘트공장인 '시비뇽 시멘트플랜트(P.T. SEMEN CIBINONG)'를 건설했다. 한국요업(세라믹) 학회, 한국화학공학회, 대한화학회등 3개 학회, 대한요업총협회(지금의 한국세라믹총협회) 회장으로 학계와 산업계의 유대를 다졌다. 학교, 연구소, 산업체가 참석하는 '시멘트심포지엄'을 개최하고, 한일국제세라믹스세미나를 조직해 학술교류는 물론 민간교류에도 힘썼다. 세라믹학회는 그의 호를 따 장학지원 프로그램인 '양송 상'을 제정했다. 1993년 인하대에서 명예공학박사 학위를 받고, 2006년 서울대 설립 60돌 기념 '한국을 일으킨 60인' 상, 2007년 세라믹학회 창립 50주년 특별공로상을 받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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