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비전e 정선기 대중문화 칼럼니스트] 지난해 말 출간돼 올 초에 책방에서 산 정이현의 소설 <상냥한 폭력의 시대>를 이런저런 핑계로 다 읽지 못하다가 최근에 다 읽고 나서 과거에 읽었던 게 기억이 나질 않아 빠른 속도로 두 번을 읽게 됐다.

이번 소설은 지난 2013년 겨울부터 발표한 소설 가운데 중단편 일곱 편을 묶은 소설집이다. 작가는 독자들에게 무심한 듯 모멸감을 주는 '상냥한 폭력'이 일상이 되어버린 시대를 성찰케 한다.

대부분의 소설집과 달리 표제작이 없고 소설 <달콤한 나의 도시><오늘의 거짓말> 등을 통해 쿨한 '도시 기록자'란 애칭을 불리게 된 정 작가의 문체는 회색빛 아스팔트와 콘크리트 벽으로 둘러싼 도시의 차갑고 건조한 감성을 담아냈다.

작가는 전작과 달리 인물들로부터 한 걸음 떨어져 우리가 사는 세상을 들여다보면서 미소 없이 상냥하고 서늘하게 예의 바른 위선적인 캐릭터를 통해 '세속성'을 사유하고 있다.

또 자신의 욕구를 잃어버린 채 무서운 것도, 어색한 것도, 간절함마저 없어 보이는 삶에 엮인 사람들의 고통과 공허를 감각적이고 세련된 언어와 날카로운 시선으로 포착해낸다.

무라카미 하루키의 <상실의 시대>를 연상시키며 과거 십 년 전 일본의 전철을 밟듯 1인 가구의 증가와 소통의 단절, 전통 가족 체제의 해체가 낳은 일상 속의 폭력은 가족의 생계나 일상의 존속을 위해 다른 이들의 불행을 묵인하는 극단적 개인주의의 파국을 깊이 있게 성찰하는 것 같다.

소설집 중 '밤의 대관람차'에서는 사회의 부조리를 목격하면서도 '결정의 순간에 결단 없이 선택하고, 자신의 선택을 지키며 사는' 우리들의 무기력한 태도를 바라보기도 한다.

잘 알지도 못하면서 모임에서 몇 번 만난 사람을 소문으로 판단하며, 유치원 식중독 사건에서 존재론적 불안에 휩싸여 자신의 속물근성을 드러내는 단편 '안나'에서 경은 기간제 교사가 된 안나와의 재회에서 기성세대의 자기 변명과 같은 상냥하지만 서늘한 폭력을 마주하게 된다.

지난해 읽었던 은희경의 소설 <중국식 룰렛>처럼 삶 속에 행운과 불운을 사유하는 이번 소설의 단편 '밤의 대관람차' 속 한 구절은 공감을 불러 일으킨다.

「좋지 않은 조짐이 있을 때 가장 나쁜 경우를 상상하는 건 사소한 불운을 생애 전체의 불행에 대한 복선으로 확대 해석하는 버릇과 비슷했다.」
- ep.밤의 대관람차 중에서(p.147)

생기 넘치고 활기찬 도시 이야기는 아니지만, 전작 속의 캐릭터들이 시간이 흘러 이럴 것 같다고 가정한다면, 죽음을 받아들일 수 있는 나이에 이른 이번 소설집의 인물들은 관성과 체념의 태도로 자신의 결핍과 공허를 깨닫게 됐는지도 모른다.

문학평론가 백지은은 "닫힌 세태의 재현은 그 자체로 상냥한 폭력을 파헤치는 일이고, 역으로 세태의 폭력적인 모럴을 검증하는 일"이라며 "저마다 각자의 속도로 가는 것이 폭력의 시대를 건너는 상냥한 방법이 될 수 없을까"라고 평했다.

지난 7일 방영한 SBS 수목드라마 <다시 만난 세계>에서 무언가 비밀을 안은 채 은폐하려는 학교 이사장 부인 윤미나(방은희 분)는 상냥한 폭력을 행사하는 대표적인 캐릭터 같다.

윤미나는 아들 태훈(김진우 분)이 살인 누명을 쓴 해성의 동생 영인(김가은 분)과 사귄다는 사실을 알게 되자 영인의 출근길을 막아서서 "아가씨 오빠 살인자라며. 그런데 무슨 염치로 우리 태훈이를 만나냐"라고 말하며 눈물을 흘리는 영인의 눈물을 닦아주고 차갑게 뒤돌아섰다.

극 중 윤미나의 방식은 서늘하면서도 예의 바른 상냥한 폭력이 아니겠느냐란 생각이 들었다. 그러면서, 일상 속에서 무의식중에 주변사람에게 상냥하면서도 차가운 태도를 취한 적은 없었는지 되돌아보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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