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비전e 정선기 대중문화 칼럼니스트] 피천득의 「인연」 만큼이나 1980년대 교과서에 실린 수필로 잘 알려진 김태길의 「글을 쓴다는 것」 기억하는가?

학창 시절에 교과서에서 읽고 어렴풋이 기억이 떠오른다. 김 작가는 책에서 "글을 쓴다는 것, 그것은 즐거운 작업이어야 하며, 진실의 표명이어야 한다. 그러기 위하여 우선 필요한 것은 나의 자아를 안으로 깊고, 크게 성장시키는 일이다"라고 밝히고 있다.

소설 「채식주의자」로 맨부커 인터내셔널상을 수상한 소설가 한강은 지난해 한 매체와의 인터뷰에서 자신의 소설 「소년이 온다」를 소개하며 글쓰기가 "인간의 참혹함과 잔혹함에서 출발해 인간의 존엄함으로 기어가려고 애쓰는 것"이라고 했다.

이어 한강은 "그걸 딛고 사랑을 향하는 것이 쉬운 일이 아닌 것 같다. 그래도 조금씩 애쓰면서 더 써보려고 노력하고 있다"라며 "글쓰기는 그렇게 계속되어야 할 것 같다고 생각한다"라고 설명했다.

이와 같은 생각을 지닌 작가가 한 명 더 있다. 바로 최근 극장가 박스오피스에서 정상을 달리고 있는 영화 <살인자의 기억법>의 원작자이자 JTBC의 예능 프로그램 <알쓸신잡> 등에 출연하면서 박식함과 작가 특유의 관찰력이 주목받는 소설가 김영하다.

CBS의 강연 프로그램 <세상을 바꾸는 시간 15분>(이하 세바시) 무대에 올라 '자기 해방의 글쓰기'를 주제로 한 김 작가의 강연에서는 영화 <잠수종의 나비> 원작자이자 패션잡지 '엘르'의 편집장이기도 했던 장 도미니크 보비의 일화를 소개하며, "글쓰기는 우리에게 주어진 마지막 자유이기에 참혹한 현실과 절망의 순간에도 글쓰기를 한다"고 강조했다.

소설가가 주인공인 영화를 찍은 영화감독을 만난 적이 있는데, 찍을 화면이 없어 고민이 많아 보였다고 한다. 옛날 소설가는 조금 낫다고 하면서. 

"타자기 앞에서 쓰다가 종이를 뽑아서 구겨 버리면, 옆에 수북이 쌓여있는 장면이 있는데, 요즘 작가는 자라목이 되어 머리 좀 긁적이다가 노트북 커서가 깜빡이다가 백스페이스로 지우는 장면을 어떻게 두 시간짜리에서 영화에서 보여주겠나"라며 김 작가는 이야기를 시작했다. 

이토록 글씨기는 어려운 작업인 동시에 직업적인 작가의 수명이 짧다면서 신문 부고란에 실린 수명을 20년간 추적조사 한 결과, 작가와 저술가가 61세로 가장 수명이 짧은 것으로 나타났고 바로 위에 언론인이 있어 기자에게 얘기했더니 "아마 종군 기자가 포함됐을 것이라는 말을 들었다"고 한다.

그는 "글을 쓴다는 것은 위험한 것이고 건강의 적이라는 걸 알수 있다"라며 "그러나 정신과 육체가 모두 파괴된 극한의 한계 상황에서도 사람은 글을 쓸 수 있다"고 세바시 청중들의 주의를 환기했다. 

김영하 작가는 "글을 쓸 수 있는 한 우리는 살아 있는 것이다"라며 "신체적, 육체적, 물리적, 권력으로부터 한 인간을 억압하는 모든 억압으로부터 해방하는 것"이라고 했다.

이어 장 도미니크 보비가 1995년 12월에 뇌졸중으로 쓰러져 병상에 누워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상황에서도 왼쪽 눈꺼풀만 움직일 수 있어 눈을 깜빡이는 횟수로 단어를 정하고 주변 사람에게 대필하는 방식으로 「잠수종과 나비」라는 회고록을 썼다고 소개했다.

20만 번 이상 눈을 깜빡여서 15개월 동안 글을 써서 출간된 지 18일 만에 작가는 심장마비로 세상을 달리하는데, 육체라는 것은 갇혀있으나 영혼은 멀쩡했다는 말과 함께 말이다. 

소설의 제목이 의미하는 것은 잠수종(복) 안에 갇혀 있던 영혼이 나비가 되어 날아간 것인데, 마지막 순간에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상황에서도 글을 썼다고 한다.

이뿐 아니라, 혹한의 시베리아 수용소에 갇혔던 솔제니친도, 나치 치하의 유대인 대학살이 자행됐던 아우슈비츠 수용소에서 유명한 심리학자인 박토르 프랭클도 「죽음의 수용소에서」라는 글을 썼다고 전했다.

따라서 글을 쓰는 것은 인간적 존엄을 확보해 준 것이며, 전쟁터에서도 무수한 글이 써졌다고 강조했다.

헤밍웨이나 조지 오웰 같은 작가들은 스페인 내전과 이후에 벌어질 유럽의 비극을 암시하는 끔찍한 전쟁이었는데 참전 경험을 가지고 「카텔루니아 찬가」나 「누구를 위하여 종을 울리나」와 같은 글들이 나온 것도 이 같은 이치라면서.

예수의 죽음 이후에 구심점을 잃은 제자들은 생명의 위협을 받는 가운데도 글을 썼다고 한다. 마태오와 요한 등 네 제자의 직업은 달랐지만, 복음서를 썼고 「신약성경」이라는 책으로 나와 세계 역사를 바꾸게 된다고 했다.

"예로부터 압제자들은 글을 쓰는 사람을 늘 경계했다"라며 "글을 쓴다는 것은 만만한 인간이 아니라는 뜻이고 글을 쓰는 동안에 우리가 변화하면서 우리 자신을 해방한다"고 작가는 성찰했다.

단 몇 문장만으로도 우리는 과거의 기억과 대면할 수 있고 한 글자씩 한 문장씩 써나가는 동안 우리에게 변화가 생기고 이게 축적되는데 이것이 자기 해방의 힘이라고 설명했다.

언어에 논리가 있어 말이 되게 써야 하기에 논리적인 글쓰기의 과정에서 우리를 좀 더 강하게 만들고 마음속에 어둠과 공포가 힘을 잃게 만든다는 것.

특히, 작가들은 수명은 짧지만 죽는 순간조차 글을 쓰고 있거나 다음 글을 구상하고 있어 은퇴를 모른다고 강조했다. 

김영하 작가는 세바시 청중들에게 "직장이나 학교, 가정 등에서 비인간적인 대우나 육체적, 정신적 학대를 받은 이들도 있을 것"이라며 "글쓰기를 통해 세상의 폭력에 맞서고 내면을 직시할 수 있을 것"이라고 전했다.   

열패감으로부터 자유로우면서 살아있다는 자각을 일깨우는 글, 첫 문장을 지금 써보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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