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까지 올려드린 글중 가장 가슴졸이며 감동적으로 읽었던 사연입니다.
아직 읽지 않으신 분들과 많은 독자들의 앵콜 성원에 추석을 맞이하여 6일동안 연속해서 6편을 보내드릴 예정입니다.
가족의 소중함을 느껴 볼수 있는 동화 속 장화 홍련 같은 친구이야기 입니다.
어렸을 적 익산 고향의 한 친구가 있었습니다.
이 친구가 태어난지 얼마 지나지않아 어머니가 세상을 떠나셨습니다.
3년 후 아버지는 새 어머니를 맞으셨습니다.
새 어머니는 두 명의 남동생을 낳으셨습니다.
그 친구의 아버지는 당시 지금의 한전회사에서 전봇대 세우는 공사일을 하셨습니다.
당시에는 전봇대 세우는 일이 매우 힘든 중 노동이라 늘 피곤해 하시며 막걸리를 즐겨 드셨습니다.
어느 덧 그 친구의 3형제는 국민학교를 다니게 되었고 그 시간부터 친구의 안타까운 사연이 시작됩니다.
그 친구는 초등학교 다닐 때부터 새 엄마의 심한 학대와 매질로 몸에는 늘 상처 투성이었습니다.
새 엄마는 농사 일을 하셨고 품앗이 일도 나가셨습니다.
그 친구는 어렸을 때부터 마을 공동수도에서 물 긷는 일과 청소 그리고 빨래를 도맡아 해야 했습니다.
어느 때 부터인가 저녁 밥 짓는 일도 했습니다.
어린시절 친구들과 함께 놀다가도 그 친구는 집안 일 때문에 먼저 집에 들어가야 했고, 만일 늦거나 집안 일을 소홀히 하게되면 그날은 새 엄마에게 죽도록 매 타작이 시작되었습니다.
어린 나이에 놀다가 밥을 잘못 짓거나 새까맣게 태우는 날은 어김없는 매타작과 함께 그날은 쫄쫄 굶어야 했습니다.
친구는 집안일 하느라 새 엄마의 눈치로 동네에 나오지 못할 때에는 우리가 가끔 그 친구의 집에가서 놀다가 오면 그날도 어김없는 새 엄마의 매 타작을 견디어야 했습니다.
친구들이 집에와서 어지럽혔다고ᆢ
당시 그 친구집의 마루와 방안은 머리카락 한올 먼지 한톨이라도 있으면 안되는 것이었습니다.
그만큼 새 어머니의 깔끔한 성격 탓인지 아니면 무언지는 모르겠지만 당시 국민학교 어린시절을 혹독한 가사노동과 매질로 보내야만 했습니다.물론 아버지는 새 엄마의 혹독한 학대를 모른 체 하셨습니다.
어느 날. 아버지에게 새 엄마의 심한 학대를 견디다 못하여 이야기 했지만 다음 날 더 큰 매질로 부메랑이 되어 돌아왔습니다.
그 아버지가 이 친구의 마음속에는 깊은 서운함과 한으로 겹겹이 쌓이고 있었습니다.
새 어머니는 배 다른 남동생들과의 차별대우는 이루 말할 수 없었습니다.
맛있는 음식과 좋은 옷 좋은 신발은 두 남 동생이 먼저였고 친구는 언제나 허름한 옷과 낡은 신발을 신어야만 했습니다.
우리가 어린시절에는 형제들이 많았고 형들의 옷을 물려받아 입어었는데 이 친구는 새 엄마가 동생들에게만 새옷을 사 입히니 물려받을 옷도 없었습니다.
어느 덧 중학생이 되었고 그 친구의 새 엄마는 땔감까지 구해오도록 시켰습니다.
예전에는 부엌의 아궁이에 불을 지피고 걸어놓은 무쇠 솥에 밥을 지었습니다.
불 피워 밥 짓는 일이라 맛있는 밥 짓는게 어린 나이로서는 무척 힘드는 일이었고 가끔 까맣게 태우기도 하고 고돌밥을 짓기도 했습니다.
그 후 어느 덧 숙련되어 밥짓는 일은 물 맞추는 것부터 맛있는 밥짓기까지 달인이 되었습니다.
당시의 새 엄마의 학대는 동네에 어른 아이 할 것 없이 소문이 자자했고 이웃 마을까지도 널리 알려졌습니다.
어느 때는 새 엄마가 불담근 연탄집게 부지깽이로 얼굴을 때려 살이 타면서 이그러지어 흉터가 생기기도 하였습니다.
그 심한 새 엄마의 학대를 그 친구는 어린시절부터 끔찍이도 견디며 노예처럼 살아왔고 우리는 그 모습을 지켜보아 왔습니다.
어느 날 인가 중학교 중간고사 시험이라 일찍 학교를 끝나고 집에 가는 길에 이 친구를 이리역 지금의 익산역 근처에서 만났습니다.
당시에는 중학교 육성회비가 있었고 그 육성회비를 오랫동안 내지 못하다보니 선생님께서 화를 내시며 학교에 나오지말라 했답니다.
그러다보니 집에서는 육성회비를 주지않고 학교에 가라하고 학교 선생님은 나오지 말라하니 어린마음에 혼자 거리를 방황하고 있었던 것 입니다.
그 친구는 학교를 여러번 가지못하고 늘 방황하며 새 엄마의 학대속에 마음속은 심한 갈등을 하고 있었습니다.
이 친구의 마음속에는 어느 때부턴가 가출을 하리라는 굳은 마음이 싹트고 있었습니다.
이리역에서 열차를 타고 어디론가를 떠나 지금의 이 지긋지긋한 암담한 현실에서 벗어나고픈 마음이 서서히 자리잡고 있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그 친구의 새 엄마가 급히 저를 부르시더니 우리 ○○이 못 보았냐고 물으시는 것 이었습니다.
저는 보지 못했다고 말하자 이틀간 집에 들어오지 않고 있으니 혹 ○○이를 보면은 연락 달라고 말하곤 사납게 가셨습니다.
저는 순간 직감했습니다.
드디어 이 친구가 억압과 속박에서 벗어나 자신의 자유를 향해 긴 여행을 떠났구나~~~!
내일 2탄의 이야기로 이어집니다.
로마서 5장 3-4절에는 "우리가 환난 중에도 즐거워하나니 이는 환난은 인내를 인내는 연단을
연단은 소망을 이루는 줄 앎이로다."고 하였습니다.
이형권 칼럼니스트 leehyung@nvp.co.kr
※ 외부 필진의 글은 본지 편집방향과 일치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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