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면점화. 97.5 × 130.0cm(60F) 김환기[개인소장]](https://cdn.nvp.co.kr/news/photo/202204/303551_303994_3659.jpg)
김환기 화백(1913~1974)은 타고난 예술가적 기질과 의지, 불굴의 도전 정신으로 미술계의 혁신적인 예술경향과 추상미술의 선두주자가 된, 20세기 대한민국의 대표적인 예술가이다.
그는 강, 산, 달, 구름 등 우리 자연의 모습과 백자 항아리, 목가구 등 전통 기물에 담긴 아름다움을 발견해 민족 정서를 일깨웠으며, 망향(望鄕)의 애틋함과 인간을 향한 흠모를 감동적 예술작품으로 승화시켰다.
한국적 서정주의를 서구의 모더니즘에 접목해 독보적인 예술 세계를 정립한 김 화백은 선명한 민족 정취를 세계인이 공감하는 정제된 조형 언어와 명상적인 색감으로 구현해 뉴욕과 파리 등 세계 예술의 중심지에 이름을 알렸다.
그가 남긴 주옥같은 작품들은 예술성에 버금가는 대중성으로 미술사적 연구와 전시에서만이 아니라 미술 시장에서도 한국 현대 작가로서 최고의 호평을 받고 있다.
자신이 추구하는 예술에 관한 한 타협을 거부해 예술에 대한 치열한 성찰과 혁신적 사고로 새로운 기법에 대한 연구와 시도를 한시도 게을리 하지 않았으며, 그 흔적을 작품으로 고스란히 남겨 놓았다.
그가 청년기인 일본유학 시절부터 미술 전위 운동의 선봉에 서왔던 리의 자연과 골동, 민예품 등 정서를 일깨우는 소재들로서 예술계의 흐름을 선구적으로 이끌었다.
그의 혁신적인 조형 실험은 독보적 감수성과 예술적인 기질, 문화에 대한 특별한 안목과 사회에 대한 뛰어난 통찰력에서 온 자연스러운 현상이기도 했다.
김환기 화백은 작품에 대한 주관과 신조가 분명했으며, 예술 신념을 행동으로 실천해 보기 드물게 미술 행정가, 교육자로서도 남다른 능력과 소명 의식을 겸비한 화가였던 김환기는 자신이 겪고 있는 시대의 우울을 관조와 유머로 승화시킨 천상의 예술가인 것이다.
김 화백은 작품에 대한 주관과 신조가 분명했으며, 예술 신념을 행동으로 실천해 보기 드물게 미술 행정가, 교육자로서도 남다른 능력과 소명 의식을 겸비한 화가였던 김환기는 자신이 겪고 있는 시대의 우울을 관조와 유머로 승화시킨 천상의 예술가인 것이다.
![△어디서 무엇이 되어 다시 만나랴 1965년 캔버스에 유채, 145.5x112.1cm, [개인소장]](https://cdn.nvp.co.kr/news/photo/202204/303551_303995_01.jpg)
당시 그의 작품들은 물체를 여러 각도에서 보는 시점의 종합적인 복합체로 표현하는 후기입체파적 시도가 보이는 동시에 한국 정서의 발현 의지가 돋보이는 서정 주의적 향기가 짙다.
그의 작품들은 단순히 실제적인 묘사로서 구상적인 형태의 차원을 넘어선, 내용(주제)과 형식(조형성)의 긴밀한 대화였고 때로는 투쟁이 됐다.
그는 한반도 남쪽 끝자락, 작은 섬에서 태어났으며, 15세에 서울의 중동학교에 입학했으나 본격적인 미술 수업을 위해 일본으로 건너가 중학을 마치고 동경의 일본대학 예술학원 미술부에서 수학했다.
이어 일본 유학 시절, 청년 김환기는 유럽의 미술 조류들을 설렵하고 돌아와 이미 국제무대에서 인정받고 있던 도고 세이지, 후지타츠구시 등 진취적이고 개방적인 스승들로부터 입체파와 미래파 등 서양의 새로운 미술 경향을 익혔으며, 가장 전위적 미술 운동인 추상미술을 시도했다.
그는 파리에서 머무는 4년간 새로운 예술, 세계적인 예술로 나가기 위해서는 먼저 자신의 본질을 발견하고 근본으로 돌아가야 한다는 생각에 예술의 본질에 다가가기 위해 선택한 화제(畵題)인 고국의 자연이다.
고향 마당의 향기 뿜던 매화가지 사이로 둥실 떠오른 보름달, 고향 바다와 하늘의 쪽빛, 백자의 선(線)과 목가구의 면(面) 구성을 자연의 모습 그대로 간직하고 있는 것이다.
![△캔퍼스에 유채(oll on canvas) 60.6 x 72.7cm 해와 달 김환기 [개인소장]](https://cdn.nvp.co.kr/news/photo/202204/303551_303996_5225.png)
그의 작품 중에 “어디서 무엇이되어 다시 만나랴” 1965년 작품으로 캔버스에 유채이다.
김화백이 표현하는 한국의 푸른(청靑) 빛깔이 서양의 블루(BIue)와 다르다는 것을 강조했다.
그는 1937년 귀국할 때까지 일본 화단의 전위적 단체인 '자유미술가협회전' 창립에 관여해 본격 적인 모더니즘 운동에 참여했으며, '자유전' '백만회'등을 통해 유영국, 문학수, 이중섭, 이규상 등과 함께 활동하면서추상미술의 기반을 마련했다.
고향 마당의 향기 뿜던 매화가지 사이로 둥실 떠오른 보름달, 고향 바다와 하늘의 쪽빛, 백자의 선(線)과 목가구의 면(面) 구성을 자연의 모습 그대로 간직하고 있는 것이다.
김 화백은 파리 체류 시기, 한국의 자연과 전통 기물에서 영감을 구하는 성향이 짙어지는데 이는 서양의 화법에 의식 없이 젖지 않겠다는 결심으로서 자신의 본질을 찾아 정체성을 지키려는 의지 또한 강했다.
이어 30년대에 시도했던 기하학적 추상이나 40년대 한국적인 주제에의 몰입은 50년대에 이르러 보다 정제되고 고양된 절제와 직관적 표출로써 독창적 화면을 구성하기에 이르렀다.
그는 새로운 표현과 기법에 대한 불굴의 도전 정신과 그 이면에 존재하는 고향을 향한 그리움 그리고 인간 본연에 대한 연민은 자연에서 우주로, 구상에서 추상으로 변화하는 김환기 작품 세계의 전개 과정을 다양한 재료와 획기적인 조형 예술의 정점으로 안내 한다.
그가 페널로페(Penelope)가 한 올씩 베를 짜듯 자신의 긴 숙명의 시간 들로 한 점 새긴 점들은 마치 살아있는 세포처럼 증식되어 때론 강렬한 태양의 빛으로 때론 밤하늘 성좌의 명멸하는 독백으로 우리에게 다 가 온다.
김 화백이 찍어간 점들은 도시의 불빛이며, 고향의 산천을 날아다니는 반딧불 들이며, 그리운 금수강산에 두고 온 가슴속 깊이 새겨져 있는 얼굴들이기도 하다.
그는 세계의 관조적 시선을 통해 차가운 도시 문명 속에서도 자연과 무한한 우주적 공간을 향한 내면의 세계를 열어 지순한 시정을 토로하는 예술 표현으로 마음의 울림을 주며 예술의 고결한 성과를 음미하게 하며, 한국인에 가슴에 오롯이 살아 숨 쉬는 것처럼 남아 있을 것이다.
권병건 기자 gbg1632@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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