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뉴시스 제공.
사진=뉴시스 제공.

우리는 세상을 살아가면서 많은 후회들을 하며 살아갑니다. 

부자이든 가난하던간에 형제간의 갈등이나 불화들이 끊임없이 생기고 서로 화해하며 살아가는 세상사입니다. 

짧기만 한 우리네 인생 어느 덧 우리의 자녀들은 장성하여 결혼적령기의 모습으로 성장 하였습니다. 

요즘은 친구들이나 후배 자녀들의 결혼식장을 거의 매주마다 다니니다보니 세월의 무상함을 느낍니다.

우리는 누구나 세상을 열심히 살았거나 아니면 바보같이 살았을지라도 늘 희망과 후회의 반복된 삶을 살아갑니다. 

같은 형제 자매로 살다가도 때가 되어 가정을 꾸리게되고 결혼으로 인한 각자의 살림을 꾸리게 됩니다. 

그러나 살다보면 본가나 처가를 차별없이 똑같이 신경쓴다해도 저울로 똑같이 달을 수도 없는 경우가 허다합니다. 

형제 자매간에도 각자의 살림을 하면서 조그마한 서운한 감정도 쌓이게되는 일들은 허다합니다. 

부부간에 자그마한 것에 입씨름을 하게되고 서로의 작은 감정을 건드리다보면 "본가 식구는 어떻고 처가 식구는 또 어떻고" 이런식으로 흉아닌 흉을 서로 보다보면 감정이 쌓이게되는 경우도 흔한 일입니다. 

때론 형제간에도 모두가 똑같은 형편들이 아니기에 좀 더 형에게 또는 동생에게 베풀고 나누며 살걸하는
마음은 있지만 행동으로 옮기지 못한것에 대한 후회를 하는 경우가 많이 있습니다. 

여기 형제간의 작은 불화문제로 수십년간을 담을 쌓고 지내는 제 지인의 형제들이 있었습니다. 

그러다보니 서로 마음의 불편함은 이루 말할 수 없었습니다. 

세월은 덧 없이 흘러 어느 덧 20년이 흘렀습니다. 그동안 작은 감정 하나가 불신이되어 20년을 맞이하였습니다. 

많은 세월이 흐르다보니 형제들의 마음속에는 이제 서로 후회의 마음이 싹트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나 아직도 남아있는 서로의 자존심과 자존감이 허락하지않아 누구도 먼저 화해의 손을 내밀지 못했습니다. 

어느 날 큰 형은 바로 밑에 남동생의 딸인 조카가 결혼한다는 소식을 다른 고향 사람을 통하여 듣게되었습니다. 

조카가 언제 그리 장성하여 결혼 할 나이가 되었는지 세월의 무상함을 느꼈습니다. 

그만큼 형제간에는 오랜 단절을 말해주고 있었습니다. 

특히나 형제간의 단절뿐 아니라 동서들간의 단절도 함께 따랐기에 그 세월이 너무나 길었습니다. 

형님은 조카 결혼식장을 가야 할 지를 두고 큰 고민에 빠졌습니다. 

동생은 형님에게 결혼 소식을 알려야할 지 잠깐 고민 하였지만 먼저 결혼한 형님의 딸인 장조카가 결혼했다는 소식을 다른 사람으로부터 전해들어 늦게 알아 갈 수 없었던터라 마찬가지로 형님에게도 청첩이나 알릴 명분도 없었습니다. 

형님도 조카의 결혼식 소식을 들었지만 도저히 용기가 나지 않았습니다. 

드디어 조카의 결혼식 날 전주 서곡의 그랜드힐스턴호텔에서 12시30분에 많은 하객들의 축하를 받으며 예식을 진행하였습니다. 

그 시간 익산에 사시는 형님은 많은 갈등과 고민끝에 아내에게는 아무말도 없이 집을 나섰습니다. 

12시30분 결혼식을 1시간 앞두고 11시30분쯤에 호텔 주차장에 도착하였습니다. 

호텔 정문출입구가 가장 잘 내다보이는 주차선 안에 주차하고 차안에서 출입문쪽만 뚫어지게 바라보고 있었습니다. 

이윽고 대전에사는 막내여동생의 모습이 보이고 조카들의 모습이 보였습니다. 

뒤이어 오늘의 결혼식의 주인공인 조카딸의 모습이 제수씨와 함께 들어가는 모습이 보였습니다. 

잠시 후 말쑥하게 새 양복을 차려입은 동생과 그 밑의 막내 남동생의 모습도 보였습니다. 

동생은 시골 읍내에서 원예작물 농사와 개인택시 영업을하며 생활 하고 있었습니다. 

이렇게 멋진 양복을 말쑥하게 차려입은 동생의 모습은 참으로 거의 20년만에 보는 모습이었습니다. 

20년만에 동생들의 모습을 본 형님의 얼굴에는 어느 덧 눈물이 맺혔고 이내 한없이 흘러내리고 있었습니다. 

마침내 차안에서 혼자 소리내어 흐느끼기 시작했습니다. 

다행히 짙은 썬팅으로 바깥에서는 차량 내부를 볼 수 없어 다행이었습니다. 

그렇게 차안에서 지나온 세월에대한 후회와 질곡의 시간들을 한숨과 함께 깊은 생각에 빠져들었습니다. 

많은 축하객들이 들어가는 모습이 보였고 그중에 시골 동네의 잘 아는 고향사람들도 더러 있었습니다. 

시간은 잠시 흘러 어느 덧 낯익은 하객들의 돌아가는 모습들이 하나 둘 보이기 시작하였습니다. 

아마 바쁜 사람들이 축의금만 내고 가는 길 같았습니다. 

그 시간 예식 순서는 거의 끝나가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형님은 예식장에 차마 들어갈 수 없었습니다. 

오랜시간을 차안에 앉아 있다보니 형님은 화장실이 갑자기 급해졌습니다. 

도저히 참을 수 없어 호텔 로비의 화장실을 향해 잰걸음으로 뛰었습니다. 

이윽고 볼일을 다보고 누가볼세라 조심스럽게 주위를 둘러보며 호텔문을 막 빠져 나왔습니다. 

그때였습니다! 

형 형~~ ! ! !
하며 낯익은 목소리가 들려왔습니다. 

무심코 돌아보니 셋째  막내 남동생이 상기된 표정으로 서 있었습니다. 

형은 그 자리에서 당황하며 어쩔줄 몰라 안절부절하는 모습이었습니다. 

응ᆢ 0 0 이니? 하며 떨리는 음성으로 대답하였습니다. 

"형"~~~!
하며 동생은 형을 다시한번 큰 소리로 불렀습니다. 

그래ᆢ!
"동생아 ~  형이 미안하다" ! 

"형님 여기까지 오셨는데 왜 올라오지 않고 어디를 가실라구요"? 

"예식이 거의 끝나가니 어서 올라갑시다"! 하며 형님의 손을 잡아끌었습니다. 

동생은 하객들에게 드릴 뷔폐 식권이 떨어져 예약 사무실에서 추가로 받고 올라가는 중에 큰 형님을 보았던 것 입니다. 

이윽고 엘리베이터를 타고 3층 예식장을 향해 형제가 나란히 걸었습니다. 

마침 예식이 모두 끝나고 하객들이 쏟아져 나오며 두 형제를 보았습니다. 

고향이 인근 시골 봉동읍이라 아는 하객들이 형님을 알아보고 너도나도 아는 체를 하였습니다. 

형제간의 오랜 단절이 있었기에 시골 지인들은 마치 그 사실을 알기라도 하는 냥 한결같이 반가운 표정으로 아는체를 하였습니다. 

예식장 로비에서 그렇게 동네 시골분들과 잠깐 인사와 악수를 나누는 중 예식장안에서 사회자가 가족사진 촬영이 있으니 가족분들은 앞으로 나와달라는 멘트소리가 들렸습니다. 

동생은 형의 손을 끌고 가족사진 찍자고 식장안으로 이끌었지만 형님은 용기가 나지않아 도저히 들어갈 수 없었습니다. 

형님은 접수대에서 양복 안 주머니에 축의금으로 준비한 하얀 봉투를 내밀었습니다. 

그리고 사회자의 재차 가족사진 촬영 멘트 소리가 들려왔고 동생의 손에 이끌리어 어쩔수없이 식장안으로 들어섰습니다. 

이윽고 사진사를 바라보던 모든 가족의 시선이 입구 쪽으로 동시에 쏠렸습니다. 

두 형제의 걸어오는 모습을 본 결혼식 주인공의 동생과 가족들은 일제히 두눈을 의심했습니다. 

틀림없는 형님과 큰 오빠가 20년만에 우리앞에 모습을 보였던 것 입니다. 

순간적으로~~~~!
오빠~~~~!
형님~~~~~! 

예식장안은 마치 이산가족 상봉장을 방불케 하였고 기쁨의 눈물바다가 되었습니다. 

그동안 마음속으로만 서로 형제간의 정과 그리움이 있었지만 이것이 현실이되어 조카의 결혼식장에서 마치 이산가족 상봉이 이루어지고 있었습니다. 

사돈댁 가족들과 그 모습을 지켜보는 많은 신랑신부 친구들이 처음에는 의아한 표정이었지만 이내 눈치채고 이해한다는 밝은 모습이었습니다. 

사진사는 한참후에 자리를 정리하느라 10여분이 흐른뒤에 마침내 늦어진 촬영을 시작하였습니다. 

3형제는 신부 옆 자리에 나란히 한 손을 꼭잡고 그렇게 기쁨의 가족사진을 남겼습니다. 

그 날 봉동읍의 동생 시골집에서는 그 어느때보다 큰 겹경사가 났습니다. 

6남매는 서로를 부둥켜안고 손을 쓰다듬으며 서로가 잘못했다고 깊은 형제애의 정을 밤 늦도록 이야기 꽃을 피웠습니다. 

20년동안 서로의 왕래가 없었기에 어머니 아버지가 돌아가셨을때에도 와보지 못한 큰 형님은 부모님이 묻혀있는 산소에 고개를 묻고 오열 하였습니다. 

모처럼 6남매가 부모님 산소 앞 한자리에 모두 모여 말없이 형제애의 뜨거운 정을 나누고 있었습니다. 

큰 일도 아닌 사소한 감정 싸움이 어느 덧 깊은 골이되어 20년간의 시간의  흐른 후 비로소 해후를 했던 것 입니다. 

사소한 감정 싸움이었기에 형제 자매들은 서로간의 아무런 마음의 짐이 없었습니다. 

우리는 세상을 살아가면서 의외로 부모님이나 형제간의 갈등으로 서로간의 왕래를 하지 못하는 가족들이 의외로 많이 있습니다. 

돈 문제로 또는 동서 지간의 사이가 안 좋아 형제간에도 의가 상하는 경우를 흔히 보게됩니다. 

형제간에는 잘 지내다가도 동서들간의 집안 대소시 작은 갈등들이 불거져 결국 큰집과 작은 집간에 왕래가 끊기는 경우도 있습니다. 

돈과 사소한 집안 대소사시 부딪히는 많은 갈등들 그러나 인생에 있어서 결코 돈이 전부가 아니라는 것을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 

물질보다 형제간의 소중한 핏줄이 우선이고 마음의 화평과 평안이 우선입니다. 

부모와 자식간의 인연은 천륜이라 하지만 때로는 불효막심한 자식이 되는 경우도 있습니다. 

서로 아껴주고 사랑해야 할 소중한 가족인데 작은 갈등이나 물질로 인연을 끊고 사는 경우도 있습니다. 

어찌보면 사는게 별 것 아닙니다. 내려놓으면 모든게 편안해 집니다. 

내가 먼저 전화하고 손 내미는 아름다운 세상을 만들어 갔으면 참 좋겠습니다. 

오늘의 사연은 작은 불화 하나가 서로의 다툼이되고 
20년의 세월을 휘돌아와 가족이 하나되는 감동의 순간이었습니다. 

이 이야기는 6남매중 3형제로 막둥이인 제 친구 가족 이야기의 실화내용이었습니다. 

필자는 주위에서 이렇게 가족간의 작은 불화로 담을 쌓고 지내는 분들을 더러 보곤 합니다. 

언제까지나 형제 자매간의 담을쌓고 지내려 하는지 아직도 많은 분들이 의외로 많이 있습니다. 

이제 이번 주면 추석 명절 연휴가 시작됩니다. 

우리는 그동안 형제 자매간의 우애하지 못하고 작은 사소한 일로 단절하고 살지 않았나 생각해보는 소중한 시간이 되었으면 합니다. 

실제로 이런상태에 계신분들은 금번 추석 명절을 맞이하여 먼저 손 내미는 아량을 베풀어 반드시 화해 하시기를 권해드립니다. 

생각만 가지고 있지 그것을 서로 실천하지 못한다면 나중에 분명 더 큰 후회가 가슴에는 회한의 대못으로 박힐 것 입니다. 

형제 자매 가족간의 우애와 사랑은 분명 조카들도 따라 배웁니다. 

금번 추석 명절에는 그동안  형제 자매간의 단절로 많은 갈등관계로 고민하는 분들에게 의미있는 시간이 되었으면 하는 바램입니다. 

이형권 칼럼니스트 leehyung@nvp.co.kr

 

※ 외부 필진의 글은 본지 편집방향과 일치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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