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뉴시스 제공.
사진=뉴시스 제공.

도전을 두려워하지않고 모험을 즐겼던 정주영은 오늘을 살아가는 청년들의 표상(表象)입니다.

아산(峨山) 정주영 회장은 1915년 강원도 통천군 답전면 아산리에서 가난한 농부의 아들로 태어나 겨우 소학교(초등학교) 만을 졸업한 청년이었습니다.

그의 부친은 정봉식이었고 모친은 한성실이었는데 두 분 모두 전형적인 시골의 농사꾼이었습니다.

정주영은 아래로 남동생 5명과 누이동생 2명 등 6남 2녀의 장남입니다.

정주영은 소학교를 졸업한 후 부모님을 도와 농사를 짓던 중에 미래에 대한 비젼이 없다는 것을 느끼고 네번이나 가출을 시도한 끝에 드디어 가출(?)에 성공합니다.

첫 번째와 세 번째 가출은 아버님께서 소를 판 돈을 장롱 속에 둔 것을 훔쳐 갔었지만 거사에 실패했었다는 이야기도 전합니다.

마지막 가출이었던 네 번째 가출 지역은 인천이었습니다.

부두에서 일용직으로 배에 짐을 싣고 내리는 작업을 하던 중에 이듬해에는 경성(서울)으로 일터를 옮깁니다.

쌀 가게였던 "복흥상회"에 배달원으로 취직한 것이었는데 기골이 장대하고 힘이 세었던 정주영이 쌀 가게 주인의 눈에 쏙 들었던 모양입니다.

마침 주인 집 아들은 주색잡기(酒色雜妓)에 빠져 쌀 가게의 운영에는 관심도 없었고, 부모의 재산을 탕진함으로써 정주영이 쌀 가게에 취직한 지 2년 여 만에 주인은 쌀 가게를 정주영에게 물려주기에 이르릅니다.

쌀 가게에 취직해서 열심히 일하는 모습에 감동을 받은 주인은 1935년 11월 23일 밤에 정주영 청년을 중매하게 됩니다.

맞선을 본 지 40여 일 만인 1936년 1월에 정주영은 변중석 여사와 결혼을 하게 되지요.

결혼을 하고 쌀 가게까지 인수하여 안정을 찾아갈 무렵 중일전쟁이 발발하면서 쌀은 배급제로 전환됩니다.

이로 인해 쌀 가게는 문을 닫고 말았습니다.

이것은 정주영에게 위기이자 기회였습니다.

1940년, 정주영은 당시 경성에서 가장 큰 공장이었던 아도서비스(Art Service)를 인수하기도 했으나 인수한 지 2개월 여 만에 화재로 소실되었고, 다시 빚을 내어 신설동에다 자동차 정비공장을 열었으나 이마저도 1942년 5월, 일제의 "기업정리령"에 따라 사업체를 뺏기고 맙니다.

그 후 정주영은 잠시 광산업에 관심을 갖기도 하였지만 그러다가 해방을 맞았고 1946년 4월에 다시 현대자동차공업사를 열었고, 이듬해에는 현대토건사를 시작하게 됩니다.

1950년 6월 25일 새벽에 북한군의 남침으로 시작된 한국전쟁은 정주영에게 새로운 도전의 시작이었습니다.

미 8군 사령부에서 통역장교로 근무하던 친 동생 정인영의 도움으로 전쟁 시작과 함께 문을 닫았던 현대토건사가 다시 일을 시작하면서 미군부대에서 발주하는 공사는 거의 100% 정주영이 떠 맡았고, 이는 정주영이 기반을 다지고 재기하는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던 것입니다.

이후 전후 복구사업에도 정주영은 적극적으로 참여하였고, 1964년도에는 현대시멘트 공장을 설립하였으며, 1967년도에는  현대자동차를 세웁니다.

본격적으로 대기업으로의 발돋움을 시작한 것이지요.

정주영의 도전정신이 빛을 발한 것은 1971년 9월에 있었던 A&P사의 롱 바톰 회장과의 담판이었습니다.

당시 정주영 회장은 허허벌판이었던 울산 미포만의 사진 몇 장과 외국의 조선소에서 구한 유조선 설계도 하나를 들고 A&P사의 롱 바톰 회장을 찾아갑니다.

롱 바톰 회장의 추천서가 있어야만 영국 바클레이 은행의 차관을 받을 수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정주영 회장을 만난 롱 바톰 회장의 반응은 예상대로 "NO"였습니다.

하지만 여기서 쉽게 물러설 정주영이 아니었습니다.

롱 바톰 회장은 "어떻게 조선소도 없는데 차관을 주라고 추천할 수 있겠는가"였습니다.

누가 보더라도 그건 상식이었습니다.

그 때 난감한 상황에 처한 정주영의 뇌리를 스치는 영감(靈感)이 있었습니다.

자신의 지갑 속에서 500원 짜리 지폐 1장을 꺼내 이미 불가하다는 마음을 정한 롱 바톰 회장의 탁자 앞으로 내밀었습니다.

궁금해진 롱 바톰 회장이 묻습니다.

"이건 뭡니까?"

정주영 회장께서는 잠시 뜸을 들이다가 500원 지폐에 새겨진 거북선을 가리키며 입을 열었습니다.

"우리나라는 영국보다 300년이나 앞선 16세기에 이미 철갑선을 제작해서 외적을 물리쳤습니다. 우리는 반드시 성공할 수 있습니다 "

롱 바톰 회장과의 담판은 이렇게 끝났습니다.

회장실을 나서는 정주영의 손에는 롱 바톰 회장의 추천서가 쥐어져 있었고, 이로 인해 한국은 중화학공업국으로 발전할 수 있게 되었던 것입니다.

현대중공업의 시작이 이랬습니다.

그리고 정주영 회장께서는 1970년 대 중동 붐을 일으켜서 외자가 부족하던 시기에 나라의 돈줄이 되도록 함으로써 국가 경제를 부흥시킨 분이십니다.

훗날 정주영 회장께서는 88올림픽유치위원장을 맡아 올림픽을 성공적으로 유치하였고, 깔끔하게 대회를 마무리하는데 힘을 쏟아 대한민국을 세계 속에 빛나게 했던 사실은 역사가 증명하고 있습니다.

정주영의 삶은 도전과 열정, 그 자체였습니다.

정주영은 한반도의 통일에까지 관심을 가졌었지만 그 꿈의 성취를 후세들에게 남기고 2001년 3월 21일, 서울아산병원에서 폐렴(肺炎)을 이기지 못한 채 86세를 일기로 뜨거운 삶을 마감하셨습니다.

대한민국의 청년들은 아산 정주영 회장님의 진취적인 도전정신과 열정을 본받아 그가 못다 이룬 꿈을 이룰 수 있어야 할 것입니다.

배대열 칼럼니스트
유튜브 "배대열의 세상만사" 대표

 

※ 외부 필진의 글은 본지 편집방향과 일치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 

관련기사

저작권자 © 뉴스비전e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