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뉴시스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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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은 우리고장의 겸손한 성품으로 축산업조합 발전을 위해 큰 공로를 세우신 김창수 조합장의 삶을 소개 해 드리며 이 글을 통하여 독자님들의 많은 교훈과 감동을 함께 나누었으면 합니다. 

김창수 조합장은 김제 용지의 한센인 정착마을에서 태어났습니다. 

김제 용지는 한센인 정착농원으로 1960년대 축산단지가 형성되어 마을에서 소 돼지와 닭등을 사육하며 생계를 이어왔습니다. 

김창수 조합장의 아버지는 한센병이 오기전에는 시골에서 배움과 덕망이 높은 분으로 존경을 받는 분이셨습니다. 

하지만 한센병이 찾아오면서 이곳 용지에서 양돈과 양계농장을 운영하면서 성실하게 살아오셨습니다. 그러나 당시 아버님은 60세의 나이에 위암을 걸리셨고 낙담한 나머지 당시 26세인 창수에게 모든 농장 사업을 맡기셨습니다. 

당시에는 암에 걸리면 무조건 죽는걸로 인식되어 있었기 때문에 아버지는 일손을 놓으시고 청년 창수에게 하시던 양돈 양계사업을 물려주었습니다. 

어렸을 때부터 한센인 마을에있는 교회를 섬기며 믿음생활을 하였던 청년 창수는 위암 수술을 앞둔 아버지의 병상에서 두손을 잡고 눈물로 간절하게 기도하였습니다. 

"하나님! 히스기아 왕이 죽을병에 걸렸지만 그의 간절한 기도를 들으시고 15년의 생명을 연장시켜 준 것 처럼 사랑하는 우리 아버지 히스기아 왕처럼 딱 15년만 생명을 연장시켜 주십시요" 

"앞으로 제가 주님의 복음을 위해 평생을 순종하며 살겠습니다"라며 눈물 콧물이 범벅이 되도록 주님께 간절히 기도를 드렸습니다. 

아들 창수는 아버지의 간절한 바램과 소망을 위해 열심을 다하였고 며느리 손으로 따뜻한 식사라도 대접하려고 결혼을 서둘러 마침내 6년 반을 쫓아다니며 짝사랑하던 지금의 사모님과 대학 3학년 재학중 결혼을 하였습니다. 

결혼을 한 아내는 부모님을 지극정성으로 섬기며 농장일의  궂은 일도 마다하지 않았습니다. 

사실 분뇨 냄새는 참을 수 없는 두통과 고통의 연속이었지만 젊은 새색시인 아내는 코를 막아가며 참아주었고 농장일을 열심히 도왔습니다. 

어렸을 때부터 한센병을 "문둥이"라고 하였고 "문둥이 촌"에 산다는 이유로 친구들에게 많은 놀림을 당하였습니다. 

아마 지역마다 어렸을 때 한센농원에 살고있는 학교친구들의 왕따 당하는 모습들을 기억하실 것 입니다. 

병을 옮긴다는 이유로 그 친구들을 멀리하였고 왕따를 시킨 경험을 저는 또렷이 기억합니다. 

사실 축협조합장에 처음 출마할 때에만 하여도 한센인 마을에 산다는 이유만으로 많은 손가락질과 멸시를 받았습니다. 

"문둥이 촌에 사는 사람이 무슨 조합장이냐" "소나 돼지나 닭이나 키우고 살지"하며 일부 비아냥과 조롱을 당하였지만 그때마다 청년 창수는 네, 맞습니다! 

"저는 어려운 환경에서 태어나 자랐고 축산 농가들의 어려움과 고충을 누구보다도 잘 알기에 조합을 위해서 그리고 조합원들의 권익을 위하여 더 열심히 일 할수 있습니다"라고 고개를 숙이며 더 낮은 자세로 겸손하게 조합원들을 응대하였습니다. 

어렸을 때부터 한센인 농원에 산다는 이유만으로 친구들의 왕따를 경험하였기에 어려운 사람들의 마음을 누구보다도 잘 이해 할 수 있었습니다. 

그후 많은 조합원들이 "저 친구는 성실하고 겸손하니 도둑질 해 먹지는 않겠다"는 평들이 조합원들 사이에 나돌았습니다. 

마침내 그러한 진정성을 조합원들은 알아주었고 2001년도 처음 김제 축협조합장에 도전하여 2등과는 400표라는 큰 차이로 따돌리고 조합장에 당당히 당선되었습니다. 

당시 39세의 나이는 전국 축협조합장 역대 선거중 최연소로 당선되었던 것입니다. 

또한 하나님께서는 아들의 간절한 기도에 응답하셨고 위암에 걸리신 아버님은 완치 판정을 받으시고 15년이 아닌 30년을 더 사시고 지금은 90세의 연세에도 건강한 삶을 영위하는 축복을 주셨습니다. 

군복무는 의무경찰로 군산 항 근처의 지서에서 근무하였고 이때 소위 빽있는 사람들과 힘없는 약자의 설움을 눈으로 똑똑이 지켜보았습니다. 강자에게 약하고 약자에게 강한 어른들의 이중성에 "나는 반드시 약한자의 편에서서 돕는 일을 하겠다고 굳게 결심하였습니다" 

결혼을 하고 부모님에게 용지의 토지 1500평을 물려받았고 사육한 이익금으로 옆 축사와 토지를 조금씩 늘려갔습니다. 

어느 날 아버지께서는 창수를 부르시더니 "창수야 너는 왜 그리 바보갔니"? 하시는 것 이었습니다. 

"아버지 왜 그러시는데요" 하고 물었더니 아버지께서는 엊그제 계약한 토지를 평당 5만원에 내 놓았는데 5만원이면 구입 할 땅을 왜 6만5천원에 계약 체결을 했느냐는 것 이었습니다. 

그러면서 또다시 "바보니"? 하시는 것 이었습니다. 

아~ 네 아버지  "그것은 요"ᆢ 매도 하시는 분은 얼마나 힘들고 어려웠으면 급하게 내 놓았겠습니까?ᆢ 

"그리고 매도 하는 입장에서는 비싸게 매각하여도 서운한 생각이 드는법 입니다. 그래서 평당 5만원을 6만5천원에 일부러 서운하지 않게 해 드린 것 입니다" 

아버지는 그런 창수의 변명이 바보같았지만 밉지는 않았습니다. 그후 아버지는 창수가 계획하는 모든 일에 특별한 간섭을 하지않고 기도로 도왔습니다. 

토지나 축사를 매입하고 계약금과 중도금 잔금까지 하나님께서는 한치의 오차없이 계속하여 도와주시어 넓혀갈 수 있었습니다. 

김제 축협과 전주완주 축협이 합병할 당시에 김제 축협은 85억원 전주.완주축협은 210억원의 부실이 있었지만 합병 후 김창수 조합장은 6년만에 모든 부실을 털어내어습니다. 

마침내 금융자산이 1조1800억원.경제사업이 2200억원의 성과를 이끌었고 임직원 200여명에 조합원 2200여명의 명실공히 최고의 탄탄한 조합으로 발전 시켰습니다. 

젊은 청년들이 근무하고싶은 최고의 직장으로 부러움을 사고있는 축협조합의 경쟁율은 80대1로 근무하고싶은 최고의 금융직장으로 선정되었습니다. 

김창수 조합장은 아침에 사무실에 출근하면 책상에 앉아 두손을 모으고 기도로 하루를 시작합니다. 

"하나님 오늘도 교만하지 않게 하시고 오늘 만나는 사람과 직원들에게 주님의 사랑을 실천하는 본이되고 조합원의 어려움을 내일처럼 돌보며 도와주는 빛과 소금의 역할을 다할 수 있도록 기도합니다"라고 기도를 드리며 아침 일과를 시작합니다. 

1991년도 한센인 마을에 목사님이 새로 부임하셨습니다. 어려운 지역인 이곳 한센인 농원에 오시어 영혼 구원을 위해 수고하시는 목사님께 존경심이 우러 나왔습니다. 

목사님 말씀은 "해외에서 복음 전하시는 선교사님들은 어려운 환경가운데 그 지역의 영혼 구원을 위해 고생하지만 돈이없어 어려움을 겪고있습니다" 

"여러분들의 작은 선교 헌금이 현지에서 복음전하는 선교사님들께 큰 힘이되니 적지만 작정헌금을 통하여 영혼 구원에 쓰임받기를 바란다는 설교 말씀에 청년 창수의 마음에 강한 이끌림이 있었습니다. 

그동안 한센농원에 있는 사람들은 외부사람들의 도움만 받았고 또 받는것에 익숙하였고 한번도 남을 도와준적이 없으니 이번기회에 우리도 한번 선한일을 해 보자는 마음들이 싹을 틔웠습니다. 

당시 91년도 작정헌금으로 성도들은 보통 월 2천원을 하였지만 젊은 창수는 10만원을 하나님께 약속하였습니다.

매달 10만원씩의 선교헌금을 드리다가 해가 바뀌면 물가 상승률을 반영하여 또 10%씩을 상향하여 드렸습니다. 

그 선교헌금이 어느 덧 매월 600만원으로 올라갔고 지금까지 지속적으로 600만원의 금액을 작정하고 수년째 선교헌금으로 예물을 드렸습니다. 

누구나 세상을 살다보면 온갖 어려움과 풍파가 있기 마련이지만 김창수 조합장은 아무리 어려워도 동네에서 2부이자와 사채를 빌리고 은행에서 마이너스 통장을 만들어 한번도 선교헌금을 거르는 일이 없었습니다. 

만약에 어렵다고 선교헌금을 보내지 않으면 현지에서 선교사님이 겪어야 할 고충을 생각하면 잠을 이룰 수 없었습니다. 

1991년부터 지금까지 31년간을 선교헌금으로 하나님께 드리었고 그 금액은 15억원이 훨씬 넘었습니다. 

김창수 조합장은 아무리 어려워도 하나님께 드리는 선교헌금이 단 한번도 아깝다거나 망설이는 법이 없었습니다. 

지금도 매월 600만원씩 급여의 50%와 농장의 수익금을 합하여 아프리카 오지에서 선교하시는 선교사님께 보내드리고 있습니다. 

선교사님들은 그곳에서 복음을 전하시고 우물을 파드리고 간이 학교를 만들어 그 지역의 계몽운동을 통한 잘 살수 있는 삶을 위해 힘쓰고 계십니다. 

이렇게 훌륭한 삶을 살고 계시는 김창수 조합장에게 하나님께서는 한 없는 축복을 주십니다. 

그 공로로 대한예수교 장로회 세계선교회에서는 5명의 선교사를 31년 동안 꾸준히 돕는 김창수 조합장에게 감사의 공로패를 담아 감사의 뜻을 기리었습니다. 

또한 4선의 조합장을 역임할 수 있도록 하나님께서 도와주시고 양돈 7500돈 한우 1200두의 축사등을 허락하시어 물질의 축복을 주시었습니다. 

아들은 연세대 경영학과를 졸업하고 한국자산운용회사에 중책으로 근무하고 딸은 이화여대 환경공학과를 졸업하고 경기도 환경연구원에 공무원으로 근무하고 있습니다. 

아버지의 성품을 이어받아 아들과 딸 사위와 며느리 모두 일정금액을 작정하고 어려운 이웃과 선교헌금으로 나눔을 실천하는 아름다운 가정입니다. 

온 가족이 월드비젼.굿네이버스.초록우산.국경없는 의사회.CBS방송국 그리고 장애인 돕기등을 꾸준히 실천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나에게 조합장 직분을 주신것도 복음을 위한 선교와 어려운 이웃을 도우며 예수님의 사랑을 실천하라는 사명"이라고 생각합니다. 

어느 아들이 불치병에 걸려 네팔에 트레킹을 위해 방문하였을 때 트레킹을 하다가 만난 현지의 학생들이 학교를 향해 몇시간씩을 험한 산과 강을 건너는 모습을 텔레비젼을 보고 이곳에 학교를 신축해 주어야겠다는 마음이 생겨 기도중에 있습니다. 

학교는 그곳 현지 주민들도 종교를 떠나 무조건 자녀들을 입학시키려는 부모들의 마음이기에 현지의 선교사를 통하여 학교건립을 돕기위하여 서두르고 있습니다. 

학교를 신축하는데 우리 돈으로 약 2천만원의 비용이 소요된다고 합니다. 

앞으로 몇개의 학교를 제가 지어줄 지는 모르지만 하나님께서 하라는 데까지 할 예정에 있습니다. 

그 지역의 어린 학생들이 몇시간씩을 걸리며 등.하교 하는 모습의 안타까움을 한국의 어느 약사가 학교를 지어주는 내용이  "인간극장"에 5부작으로 소개되기도 하여 그 감동을 지금도 잊을 수 없다고 합니다. 

어느 젊은 날 선교사님이 교회에 방문하시어 목사님의 낡은 쏘나타 차량을 함께 타고 식당을 향하던 중 목사님께 새 차를 사드리고 싶은 마음이 들었습니다. 

마침 신호등에 차가 정차되었을 때 하나님께서 마음에 감동을 주셔서 "목사님 내일 현대자동차 직원을 보내드릴테니 차량을 고르시고 주문하십시요"!ᆢ라는 말이 나도 모르게 튀어 나왔습니다. 

목사님께서는 사양하였지만 결국 쏘나타 신형 새 차를 공제보험을 깨트리고 사드렸습니다. 

"마음속에 헌신하려는 마음이 있을 때 그 기회를 놓치지말고 실천하라" 는 목사님의 말씀을 기억하고 이 또한 하나님의 새로운 축복의 기회라고 믿었습니다. 

김창수 조합장은 기도할 때마다 하나님께서 많은 응답을 주셨고 반드시 응답해 주신다는 확신이 있었고 그 축복을 누리는 참된 믿음의 장로님이었습니다. 

축협직장내에서도 믿음의 사람끼리 신우회를 만들어 월1회 예배를 드리고 선교헌금도 꾸준히 드리고 있습니다. 

전주김제완주 축협조합은 본점을비롯한 8개의 금융점포와 2개의 사료공장. 참예우명품관. 한우육종개량쎈타. 한우전자경매시장.완주자원순환쎈터.육가공사업소등을 운영하며 완주로컬푸드 6개점과 전주푸드2개점 그리고 고산.봉동.소양 농협등 3개점을 운영하고 있습니다. 

1954년 조합설립이후 그동안 눈부신 발전과 함께 수차례에 걸친 경영대상과 실적평가에 대한 많은 수상실적을 기록하였으며 조합원들의 권익보호를 위하고 시민들을 위한 금융점포와 바른 먹거리를 위하여 최선을 다하고 있습니다. 

올 8월에 오픈 예정을 앞두고 김제 진입로에 새롭게 신축한 건물은 대지가 2,450평에 건평900평의 대형건물이 들어섰습니다. 

1층에는 조합원들을 위한 사랑방과 금융점포. 동물병원. 축산물판매장이 들어서고 2층에는 300석규모의 대형 쇠고기 전문식당이 들어 설 예정에 있습니다. 

3층에는 대강당과 세미나실등이 구비되어 있어 전체건물을 조합원들을 주인처럼 모시는 조합원을 위한 전주김제완주 축협이 되고자 노력하는 임직원들과 조합장의 의지가 엿보였습니다. 

끝으로 김창수 조합장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라고 명령하신 하나님께서 저희에게 주신 귀한 은혜와 값없이 받은 주의 자녀들이 주님의 사랑을 소리높여 전하길 바란다며 마지막 인터뷰를 마치었습니다. 

여러분들은 김창수 조합장님의 삶을 통하여 무엇을 느끼며 마음속의 감동을 받았는지요? 

저는 가끔 성공한 사람들의 삶은 어떤 삶을 살고있을까 하는 궁금증과 배울점들을 인터뷰를 통하여 조명해보고 많은 독자들에게 그 감동을 함께 누려보고자 하는 마음입니다. 

이형권 칼럼니스트 leehyung@nvp.co.kr

 

※ 외부 필진의 글은 본지 편집방향과 일치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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