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남태평양의 작은 섬나라 투발루가 기후 변화로 인한 생존 위협에 직면한 가운데, 시민들의 대규모 이주 움직임이 본격화됐다. 호주 정부의 공식 자료에 따르면, 최근 개방된 ‘기후 비자’ 제도에 따라 투발루 인구의 약 3분의 1에 해당하는 3,125명이 불과 4일 만에 호주 이주를 신청한 것으로 나타났다. 이는 기후 변화 대응을 위한 세계 최초의 제도적 이동 경로로 평가된다.
이 비자 프로그램은 지난해 체결된 ‘팔레필리 연합 협정(Falepili Union)’에 근거한 것으로, 호주는 매년 280명의 투발루 시민에게 호주에서 거주, 학습, 취업할 수 있는 새로운 형태의 비자를 제공하게 된다. 호주 외교부는 이번 조치가 “점점 심화되는 기후 위협 속에서 인간다운 이동의 권리를 보장하려는 전례 없는 시도”라고 밝혔다.
투발루는 지구상에서 기후 변화로 가장 큰 위협을 받고 있는 국가 중 하나로, 전체 아홉 개 산호 환초 중 두 곳이 이미 거의 바닷물에 잠겼다. 해수면 상승은 이 섬나라의 물리적 존속은 물론, 국가로서의 미래를 송두리째 위협하고 있다. 과학자들은 현재의 추세가 지속될 경우 투발루는 80년 이내에 사람이 거주할 수 없는 지역이 될 것이라고 경고하고 있다.
앨버니지 호주 총리는 협정 체결 당시 “호주는 태평양 파트너들과 평화롭고 번영하며 단결된 지역 비전을 공유하고 있다”며, “우리는 투발루의 신뢰할 수 있는 진정한 동맹국이 될 것”이라고 강조했다.
협정은 단순한 이주 지원을 넘어 외교 및 안보 측면에서도 양국 간 새로운 관계를 설정했다. 호주는 자연재해, 감염병 대유행, 군사 위협 발생 시 투발루를 지원하기로 약속했으며, 동시에 투발루가 제3국과 안보 협정을 맺을 경우 호주에 발언권을 부여하는 조항도 포함되어 있다. 이는 투발루의 주권 일부가 외부에 넘어가는 것이 아니냐는 논란을 야기하고 있다.
투발루의 펠레티 테오 총리는 “이번 협정은 기후 재난 속에서도 국가로서의 지위를 법적으로 보장받겠다는 역사적인 첫 약속”이라며 의미를 부여했지만, 일각에서는 엇갈린 평가도 나온다. 일부 학자들은 이주 정책이 단기적 구호책은 될 수 있으나, 젊은 인재와 기술 인력을 빠르게 유출시켜 투발루 사회의 지속 가능성을 약화시킬 수 있다고 우려하고 있다.
이처럼 팔레필리 협정은 인도주의, 안보, 지정학이 복합적으로 얽힌 기후 대응 모델로 주목받고 있으며, 향후 기후 위기로 고통받는 다른 국가들에게도 하나의 선례가 될 수 있을지 귀추가 주목된다.
차승민 기자 smcha@nvp.co.kr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