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뉴시스 제공.
사진=뉴시스 제공.

나라가 어지러운 이 시대에 조선 선조 때의 명(名) 재상이었던 서애(西涯) 유성룡(柳成龍)의 삶을 반추해 봅니다.

계서야담(溪西野談)에는 유성룡이 우의정 때 있었던 일화가 전해오고 있습니다.

계서야담은 조선조 후기 이희평(李羲平)이라는 학자가 민간에 전해오는 이야기들을 모아서 편찬한 책으로서 청구야담(靑邱夜談) 동아휘집(東野彙輯)과 함께 조선시대의 3대 야담집의 하나입니다.

야담(野談)은 사실에 기초하면서도 학식이 있는 사람이 읽는 사람으로 하여금 재미를 느낄 수 있도록 글 솜씨를 덧붙인 것인데 한자로 기록되었으며 조선시대 후기의 사회, 경제적 변화를 반영하고 있다는 점에서 의미있는 저작물입니다.

계서야담에는 유성룡이 우의정으로 재임 중일 때의 전설같은 이야기가 전해오고 있습니다.

유성룡에게는 바보로 불리던 삼촌(痴叔)이 있었습니다.

전하는 바로는 보리와 콩을 구분하지 못할 정도였다고 합니다.

어느날 오후 시간에 그 바보 삼촌이 유성룡을 찾아옵니다.

삼촌은 유성룡에게 느닷없이 바둑을 한판 두자고 제안합니다.

위계질서(位階秩序)가 분명하던 봉건시대였던지라 아무리 바보라 할지라도 아버지와 형제인 삼촌이 찾아와서 청하는 일이니 거절할 수가 없었습니다.

하인을 시켜 바둑판을 내어오게 하여 대국(對局)이 이루어집니다.

평소에 바보라고 알려진 삼촌과 바둑판에 마주앉아 대국을 한다는 것이 내키지 않았으나 침착하게 임했습니다.

쉽게 끝날 줄 알았던 대국은 어둠이 깔리고 나서야 유성룡의 완패로 끝났습니다.

당시 조선에서는 국수(國手)라고까지 소문이 자자했던 유성룡이 바보라고 불리던 삼촌에게 처참하게 깨져버렸으니 진땀이 날 지경이었습니다.

상황이 이렇게 되고보니 이제 유성룡은 재상의 체면도 잊고 바보 삼촌에게 한판을 더 청합니다.

그러나 두 번째 대국도 첫판과 마찬가지로 삼촌의 불계승(不計勝)으로 끝나고 유성룡의 간청으로 붙은 세 번째 대국도 결론은 참패였습니다.

바보 삼촌과의 대국에서 내리 세 판을 당한 후 어찌할 바를 몰라하는 유성룡에게 바보 삼촌이 말합니다.

"내일 저녁 시간에 자네에게 손님이 찾아올 것인 즉, 자네는 바쁘다는 핑계를 대고 그 손님을 내가 머무는 뒷산 암자로 보내게"

삼촌의 말씀대로 다음 날 유성룡을 찾아온 중이 있었습니다.

유성룡은 중에게 차 한잔만 대접한 후 종을 시켜 중을 삼촌의 처소로 안내합니다.

치숙(痴叔:바보 삼촌)은 중을 반갑게 맞이하였습니다.

오래된 술을 꺼내와서 중과 함께 밤이 늦도록 술잔을 주고 받았습니다.

술에 취해 정신을 잃고 골아떨어진 중의 바랑(중이 일상 용품을 넣어 짊어지고 다니는 배낭)을 뒤져보니 삼촌의 예상대로 바랑 속에는 관청과 군대의 주둔지가 표시된 조선의 지도, 그리고 날카로운 비수가 들어있었습니다.

치숙은 비수를 꺼내들고 세상 모르고 잠든 중의 몸에 올라타고 목을 조이면서 중에게 묻습니다.

"네 이놈, 너의 정체를 밝히지 않으면 지금 당장 네 숨통을 끊을 것이다"

서슬퍼른 치숙의 고함소리와 날카로운 비수를 쳐다보니 더 이상 버티다가는 끝장이겠다 싶었던지 중은 자신이 재상(宰相)에게 접근한 이유를 실토합니다.

그는 훗날 조선을 침략한 풍신수길(豊臣秀吉:토요토미 히데요시)이 조선을 침략하기 전에 우리나라의 정황을 염탐하고 요인(要人)을 암살하는 임무를 주어 파견했던 첩자(諜者:간첩)였던 것입니다.

자칫 유성룡도 그 첩자에게 죽을 뻔한 위기를 치숙 덕분에 넘기게 되었습니다.

유성룡은 당시 율곡 선생이 주창한 10만 양병설(養兵說)을 적극적으로 반대하는 등 전쟁 대비에 소극적이었으나 이 사건을 계기로 심경에 변화를 일으켜 전쟁 준비에 박차를 가하게 됩니다.

그는 권율 장군을 광주 목사로 임명하였고, 종 6품의 말단에 머물러 있던 이순신을 7계급이나 승진시키는 파격으로 발탁하여 전라좌수사(全羅左水使)로 임명합니다.

전라좌수사는 남해경비사령관 쯤 된다고 보면 됩니다.

그런 후 1년 여 만에 임진왜란(壬辰倭亂 1592년~1598년)이 발발합니다.

육지에서의 권율 장군과 해상에서 이순신 장군의 전공(戰功)이 없었더라면 우리나라는 지금 쯤 일본 영토의 일부분이거나 속국(屬國)이 되어 있었겠다는 생각을 하면 등골이 오싹해지는 두려움에 젖기도 합니다.

두 분 장군들의 역할도 대단했지만 그들을 발탁한 명 재상 유성룡의 예지력(豫知力)도 역사는 충분히 기려야 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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