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뉴시스 제공.
사진=뉴시스 제공.

라승용 전 농촌진흥청장은 국장시절 정부기관 지방이전과 관련한 틀을 마련하고 수원에서 전주이전을 적극 추진하였습니다. 

전주 혁신도시로의 원활한 이전을 위하여 농촌진흥청 산하기관 7개를 4개로 축소하였습니다. 

창원에 있는 농업기계화연구소를 포함한 농업 RND 구성을 통한 시너지 효과를 내기 위해서는 모든 산하기관의 집단 이주가 필요함을 주장하였습니다. 

혁신도시법에는 농촌진흥청과 충돌되는 법적인 조항이 있어 농진청이 혁신도시로의 이전은 사실상 불가하였습니다. 

그러나 라승용국장은 혁신도시법 변경을 위한  끈질긴 노력과 열정으로 마침내 법을 변경하였고 전주 혁신도시로 이전을 할 수 있었습니다. 

수원에서 전주 혁신도시로 8개월에 걸쳐 5톤 트럭 6000대 분량으로 대장정의 이사계획을 세우고 안전하게 모두 이전 하였습니다. 

고향인 전주 혁신도시로의 이전을 위해서 일부러 자원하는 선택을 하여 지방이전 단장을 맡았고 마침내 혁혁한 공을 세웠습니다. 

수원에서 전주로 단순한 공간 이동으로는 큰 의미가 없어 전북의 농.생명 산업의 발판을 마련하기 위하여 큰 프로젝트를 계획 하였습니다. 

현재 전주 혁신도시의 농촌진흥청은 전체면적이 약 2백만평입니다. 

하지만 적어도 3백20만평이 되어야 농,생명 산업의 발전을 위한 시험포와 연구단지 그리고 한식과 식품클러스터 등 도내 전체를 아우르는 시너지 효과를 낼 수 있을 것입니다. 

아울러 명실공히 전북이 농.생명 산업의 메카로 거듭나 세계적인 트렌드에 발 맞추어 인구감소및 출산율 감소에 따른 농촌의 대안과 현실을 반영해야 할 것입니다. 

라승용 청장이 전북대에서 특강을 할 때의 일화입니다. 

"학생들 왜 농대에 지원했지요?"

청장의 질문에 어떤 학생이 바로 질문에 답하였습니다. 

"네. 수능점수에 맞추어 지원했습니다"! 

라승용 청장은 많은 학생들이 농촌에 대한 열과 사명감없이 단지 수능점수에 맞추어 지원하는 것에 대해 적잖이 실망 하였습니다. 

이어서 한 학생이 "교수님이 가르치는 수업은 인터넷에 다 떠있어 새로울 것 없습니다"라고 하는 것 이었습니다. 

그때 라승용청장은 학생들에게 특강을 통해 심훈의 소설 "상록수"를 연상 할 수 있는 청년의 농촌 계몽운동을 들려주었고 

농촌에 대한 사명감과 다시 가르치는 "농업치유"에 대해 생각을 해 보게 하였습니다. 

농과대학 교수들에게 학생들의 농업에 대한 다양한 스킬과 코칭이 더 중요함을 전달하였습니다. 

청년농업인들이 정착할 수 있는 환경을 만들어 주어야 하는데 그에대한 대책이 시급함을 알게되었습니다. 

경북 성주에서 농업에 종사하는 한동대 졸업생중 연봉이 1억원이 넘는 8명중 6명이 장가 좀 보내달라는 하소연을 하였습니다. 

도시의 젊은 여성들이 시골로 시집을 오지 않기 때문에 빚어진 일입니다. 

농촌에서 힘들게 농사를 지으며 살아가지 않으려는 세태가 반영되었기 때문일 것입니다. 

지금은 농촌지역도 유리온실과 스마트 팜등을 통하여 샐러드및 각종 친환경적이고  과학적인 방법으로 얼마든지 편안하게 농사를 지을 수 있습니다. 

필자는 지난 효자동의 한 카페에서 라승용 전 농촌진흥청장과 차담을 나누었습니다. 

겸손함과 온화한 품격을 한 몸에 느낄 수 있었지만 살아있는 눈빛과 에너지는 마치 무슨 일이라도 해낼 수 있는 양 기력이 충만 하였습니다. 

9급 공무원으로 시작해 농촌진흥청장까지 37년만에 전설의 1급 승진까지는 하늘의 별따기나 마찬가지입니다. 

"근면과 성실" "근성과 뚝심"은 라승용 청장의 삶의 철학을 보여주는 단어입니다. 

우리 지역의 김제 신풍동 출신으로 김제 중앙초와 김제중학교를 졸업하였지만 어려운 집안 사정으로 김제농고에 진학하여 3년 장학금을 받고 열심히 공부하였습니다. 

대학에 진학하고 싶었지만 집안이 가난하여 돈을 벌지 않으면 안되었습니다. 

친한 친구가 농촌지도소 시험을 보는것을 보고 "농촌진흥청" 시험을 보기로 결심하였습니다. 

그리고 농업고등학교를 나온터라 농림직 9급 공무원 시험에 응시하여 합격 하였습니다. 

1976년도 농림부 국립부산생사 검사소에서 공직생활을 시작하였습니다. 

그후 1981년도 농촌진흥청에 신설된 농약연구소 자리로 발령을 받았습니다. 

농약연구소에는 고졸 출신으로는 단 2명뿐이었습니다. 

당시 상관은  "고졸 출신인데 농약검사 업무를 수행할 수 있느냐며" 다른 부서로의 전출을 제안 하였습니다. 

그러나 라 청장은 단호히 거절 하였습니다. 

"제가 주어진 업무에서 잘못된 것이 있다면 그에 대한 분명한 책임을 지겠습니다." 

"어떤일이든 주어진 일에 최선을 다하여 열심히 하겠습니다"

라청장은 농약연구소 업무를 소화하기 위해서는 생소한 물리및 기초 화학분야와 영어공부가 필수라는 것을 깨닫고 시간이 날 때마다 틈틈이 공부하였습니다. 

그리고 더 많은 공부를 하기 위해 한국방송통신대 농학과에 입학하였습니다. 

업무의 특성상 농촌의 현장과 연구소를 밤낮으로 뛰어다녀야 했고 방통대의 필수 학점에 반영되는 출석 일수를 채우지 못해 입학 후 10년이 지나서야 힘들게 방송통신대 졸업장을 받을 수 있었습니다. 

농약연구소에서 어려운 연구관 승진시험에 합격하였습니다. 

이어서 부산 원예연구소와 수원의 원예시험장으로 잇따라 자리를 옮기었고 맡은 바 주어진 일은 물론 우리나라의 밝은 농촌 현실에 대해서 깊은 고민을 해 보았습니다. 

더 깊이있는 공부를 하기위해 고려대학교 농학과 대학원에 입학하여 농학석사와 원예학 박사 학위를 취득하는 놀라운 자기 개발의 모습을 보여주었습니다. 

원예학 박사학위는 소비자가 안심하고 배를 먹을 수 있도록 안전한 생산을 지원하고 생산자들은 적정한 소득을 통해 삶을 영위 할 수 있도록 

현장에서 필요한 기술을 개발하고 보급하는데 큰 역할을 하였습니다. 

맛좋은 품종개발과 건강 개선효과를 지속적으로 연구하여 소비자가 일 년 내내 찾는 과일이 되도록 우리 배 소비 확대와 농가소득 증대에 도 기여 하였습니다. 

또한 김치로만 먹던 "고들빼기"를 유산균으로 발효시켜 항산화 성분이 7배 증가된 고들빼기 발효차를 개발하여 국민의 건강과 농가의 소득 향상에도 크게 기여 하였습니다. 

누구든지 담을 그릇이 준비되어야 기회가 주어졌을 때 담을 수 있는 법입니다. 

하지만 우리는 세상을 살아가면서 자격과 준비가되어 있지않아 기회를 놓쳐버리는 경우를 흔하게 보게됩니다. 

그것이 각종 자격증일 수도 있고 졸업장이나 학위 또는 원만한 자기의 대인 관계의 평판과 그릇 일 수도 있습니다. 

당시의 라승용 청장은 성실과 겸손으로 많은 직원들의 칭송과 존경을 한몸에 받았고 농촌진흥청이 농촌과 농민들에게 어떠한 역할과 책임을 다 할 것인가 하는 깊은 연구를하게 되었습니다.

이형권 칼럼니스트 leehyung@nvp.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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