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켈리 최 유튜브 캡쳐
사진=켈리 최 유튜브 캡쳐

정읍 출신의 "켈리 최"를 아시는지요? 

유럽에서 도시락을 팔아 성공한 기적같은 이야기의 주인공이자 선데이 타임지에 선정된 주인공입니다. 

현재 유럽 12개국 1200개매장, 연매출 6000억원이라는 고속 성장을 이룬 글로벌 기업 켈리델리의 창업자이자 회장입니다. 

정읍의 한 시골마을에서 8남매중 셋째딸로 태어났는데 집안이 너무 가난하여 두명은 영양실조로 안타깝게 사망하였습니다. 

소녀는 정읍의 시골 중학교를 졸업하고 집안 형편상 대학진학을 할 수 없었습니다. 

16세의 어린 나이에 부모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정읍역에서 서울행 기차표를 끊어 난생처음 기차를 타 보았습니다. 

서울에서의 삶은 쉽지가 않았지만 와이셔츠 봉제공장에서 열심히 일하고 밤에는 야간 고등학교를 다니며 주경야독하며 이를 악물고 살았습니다. 

라면 한 봉지로 일주일을 버티며 열심히 살았습니다. 

그러나 함께 기숙사 생활을하던 친구가 공장일을 마치고 야간 고등학교로 가는 버스 안에서 백설기 떡을 먹다가 목이막혀 허망하게 세상을 떠나고 말았습니다. 

배가 너무고파 급하게 끼니를 때우다 발생한 안타까운 사고였습니다. 

"그 친구도 나도 이렇게 살려고 태어난 것이 아니라는 생각이 번쩍 들었습니다". 

소녀의 꿈은 "패션디자인"이었습니다. 

패션디자인이 되려고 서점에서 수 많은 디자인 서적들을 접해본 결과 가까운 일본의 패션디자인 관련 잡지들이 아주 많았습니다. 

실제로 대학의 디자인학과 학생들은 일본의 패션 디자인 잡지들을 거의 참고하였고 이에 일본 유학을 생각하였습니다. 

야간 고등학교를 졸업하자 공장을 그만두고 어린나이에 자신의 큰 꿈을 위하여 아무런 연고도 없는 일본으로 무작정 떠났습니다. 

디자인을 꿈꾸게된 계기도 참으로 우연이었습니다. 

와이셔츠 공장에서 난생처음 외국인을 보았는데 자신이 매일 만들던 와이셔츠가 그 외국인이 디자인한 제품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 순간 나도 해 볼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동생에게 "유서"를 써서 맡겨놓고 무작정 일본으로 떠났습니다. 

일본에 와보니 일본의 디자인은 유럽의 디자인을 베낀 거라는 걸 알게되었습니다. 

모든 패션디자인들의 유행이 유럽에서 특히 파리에서 오고 있었던 것 입니다. 

그래서 다시 "봉주르"라는 단어하나도  모른 채 프랑스 파리로 또 무모하게 떠났습니다. 

프랑스어를  한 마디도 하지 못했지만 편입학에 성공하였습니다. 

그리고 알바를 해가며 패션 디자인 대학교를 두군데나 졸업하였습니다. 

그만큼 열정이 있었습니다. 

본명이 "최금례"라 프랑스에서는 이름이 복잡하여 교수님이 너는 앞으로 "프랑수아즈"라고 부르겠다고 하였습니다. 

젊은시절 유럽에서 생활을 많이한 탓에 한국어를 잃어버리게 되고 초등학교 수준도 안되어 사업하기가 어려워 그때 "금례"에서 " KERY" "로 다시 "Kelly"(켈리)로 부르게 되었습니다. 

소녀는 프랑스 파리의 패션학교에서 전시 광고업을 하던 친구를 도와주다 본격적인 동업을 하며 사업에 첫 발을 디뎠습니다. 

한때 화려했던 시절도 있었지만 결과는 보기좋게 "참패"였습니다. 

소녀는 정말 죽을만큼 열심히 살았는데 빚만 10억원이나 남았습니다. 

소녀는 다시 무일푼으로 인생 제 2막을 새롭게 시작하기로 마음을 먹었고 2년간 할 수 있는 모든 준비와 공부는 다 마치었습니다. 

그리고 "안되겠다 싶어" 그때부터 세계적인 성공한 사람들의 "습관"을 면밀히 공부하기 시작하였습니다. 

나는 5년안에 반드시 성공할 수 있다는 원대한 목표를 세웠습니다. 

목표를 세운 뒤 다시 성공한 사람들의 습관을 분석하기 시작하였습니다. 

"아마존 정글을 혼자 헤치고 가는 것과 누군가 지난간 길을 밟고 가는 건 천지차이"라고 생각 하였습니다. 

소녀는 "내가 무엇을 좋아하고 잘 할 수 있는지" 다시한번 진지하게 생각을 해 보았습니다. 

그리고 다시 "동양음식"으로 '도시락' 사업을 하기로 생각을 정하였습니다. 

드니 하네칸 당시 맥도날드 유럽의 최고 경영자이자 스시 장인 "야마모토 구니오"를 무작정 수소문 하여 찾아갔습니다. 

그러나 그를 만나는 건 쉽지가 않았습니다. 

그를 만나기 위하여 몇날 며칠을 노력하며 수없는 노크를 하였지만 만날 수 없었습니다. 

그는 매일 출근하는것도 아니었고 회사앞에 새벽부터 진을치고 기다렸지만 직원들은 번번이 거절하였고 실패하였습니다. 

드디어 어느 날 "야마모토 구니오" 대표가 차에서 내리는 것을 보았습니다. 

소녀는 손을 힘차게 흔들고 고함을 치며 그를 만나기 위하여 안간힘을 썼습니다. 

그 모습을 본 대표는 잠시 걸음을 멈추었고 직원에게 물었습니다. 

직원은 개의치 않는 듯 "며칠 째 대표님을 꼭 만나야 한다며 막무가내로 기다리고 있었다고 전하였습니다. 

드디어 맥드날드 유럽의 최고 경영자와 만날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소녀는 아주 겸손하고 간절하게 자신의 계획과 포부를 전하며 자문을 부탁하였습니다. 

"대표님의 고귀한 자문에 정말 감사드립니다"! 

"만약에 지금 대표님의 말씀처럼 제가 바로 실천 할 테니 저에게 기회를 한번 주시면 고맙겠습니다" 

소녀는 확신에 찬 어조로 당당하고 야무지게 악착같이 매달렸습니다. 

"대표님 제가 열심히 노력하여 초밥과 김밥을 만들테니 대표님의 체인점에 납품할 수 있도록 도와주십시요"! 

소녀는 기회를 놓치지 않았습니다. 

드디어 마음의 문을 연 "야마모토 구니오" 대표는 "알았다며" 답변을 하였습니다. 

이는 정읍 시골출신 소녀의 성공의 계기를 마련하는 큰 발판이 되었습니다. 

소녀는 열심히 준비하고 노력하여 유럽의 대형마트 체인에 초밥과 김밥을 납품하였습니다. 

마침내 유럽과 남미 12개국 1200개의 푸드매장과 연 매출 6000억원이라는 경이적인 기록을 단 5년만에 마침내 해 내었던 것 입니다. 

소녀가 세운 기업 "켈리델리"는 매해 지속적으로 성장해 가면서 100년 기업이 되기위한 혁신 시스템을 차례로 구축해 나갔습니다. 

그는 언제나 "행복"을 1순위로 정하고 이를 기업 문화에도 적용하여 자신과 가족뿐 아니라 직원. 가맹주. 파트너사. 고객. 나아가 전 인류까지 행복하게 만들기 위한 방법을 고민하였습니다. 

그리고 그 실천을 위한 방법으로 저술과 강연 유튜브등 다양한 활동을 통하여 자신이 깨달은 인생의 비밀들을 널리 전하며 많은 실의에 빠진 사람들에게 "인생의 멘토"가 되어 주고 있습니다. 

그 영향으로 "덕분에 삶이 바뀌었습니다"라는 많은 메시지를 다시 동력으로 삼아 오늘도 많은 이들에게 꿈과 희망의 에너지를 전하고 있습니다. 

남편은 동갑내기 프랑스인 제롬카스탕이며 슬하에 딸 하나를 자녀로 두었습니다. 

시골 정읍에서 16세의 어린 나이에 무작정 서울로 가출하여 봉제공장과 야간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동생에게 유서까지 맡겨놓았습니다. 

소녀는 자신의 꿈을 이루기 위하여 세계를 향한 험난한 항해를 시작하였고 그의 노력과 인생여정은 마침내 꿈을 이루었습니다. 

그의 소식은  KBS 아침마당에 90세이신 엄마와 함께 출연하여 전국에 방영되어 큰 화제를 낳기도 하였습니다. 

정읍시골의 8남매중 셋째로 태어나 찢어지게 가난한 집안 형편으로 두 동생을 영양실조로 잃게되고 무작정 서울로 상경한 정읍소녀의 꿈을 향한 대장정에 대해서 독자 여러분들의 소감은 어떠신지요? 

오늘 날 어렵고 실의에 빠진 많은 사람들에게 시사하는바가 아주 큽니다.

이형권 칼럼니스트 leehyung@nvp.co.kr  

 

※ 외부 필진의 글은 본지 편집방향과 일치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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