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뉴시스 제공.
사진=뉴시스 제공.

"동암학원 재단의 양복규 이사장님을 존경합니다"! 

동암고등학교와 동암재활학교. 전북장애인복지관. 전북장애인보호작업장. 동암차돌학교. 동암자활자립장등 "동암 법인"내에 속한 모든 교직원과 재학생및 졸업생들은 설립자이신 양복규 이사장님을 한결같이 존경하고 동암학원을 자랑스럽게 생각합니다. 

동암복지촌은 지역사회에서 장애인과 비장애인이 함께 어우러져 서로 이해하고 존중하며 더불어 함께 살아가는 행복한 세상을 추구하는 장애인 복지의 요람입니다. 

다음 주 17일(목요일)은 2022년 수능일입니다. 

동암고등학교의 양복규 이사장은 수능 전날 동암의 모든 수험생들에게 직접 제조한 우황청심환을 선물하여 그동안 배우고 익힌 학문을 정신이 맑고 떨리지않는 마음으로 수능을 잘 치를 수 있도록 격려하고 있습니다. 

그동안 동암을 빛낸 자랑스런 인물들은 참으로 많이 있습니다. 

재선의 김윤덕.진성준 국회의원이 동암고 출신입니다. 

검찰국장과 대검반부패부장. 남부지검장등 주요 요직을 역임한 "심재철 검사장"과 대법관 후보와 법원행정처의 "김형두차장"등 법조계 인사도 동암고 출신입니다. 

우리 전북지역에는 최훈식 장수군수. 조지훈 전주시장후보. 전북청 김홍훈 총경. 서울대출신인 김삼형 농협지부장. 김용완 CBS 전북본부 보도제작국장. 의학계는 이태석신부상을 수상한 이제훈 의학박사 등이 동암고 출신입니다. 

장애인들의 영원한 아버지로 불리워지는 동암학원의 양복규 이사장님의 인간승리에 대한 감동적인 이야기를 올려드립니다. 

양복규 이사장님은 순창군 동계면의 가난한 집안에서 1938년 8.7일에 동계 관전마을에서 태어났습니다. 

돌이 되기전에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5살때 소아마비를 앓았지만 집안형편이 너무도 가난하여 약 한번 제대로 쓰지 못하고 걸음을 걸을 수 없는 중증 장애를 앓았습니다. 

어린시절을 오롯이 어머니 등에 업히어 생활해야만 했습니다. 

당시에는 휠체어 자체가 없었기에 어린 나이에 온갖 불편함과 설움을 받으며 살아가야 했습니다. 

가고싶은 곳이 있어도 마음대로 이동할 수가 없어 왼종일 집에만 앉아 한문책만 보는것이 유일한 취미였고 일과였습니다. 

그 옛날에는 장애인에 대한 혐오와 냉대가 아주 심하였기에 동네 어른들은  어머니가 일하는 논과 밭에 등에 업히어 오기라도 하면 "병신 자식 키워서 뭐하냐"며 산에다가 버려 버리라는 수모를 당하면서 어머니 가슴에 대못을 박기도 하였습니다. 

사실 그 옛날 옛날에는 장애아동을 버리는 일이 비일비재 하였다 합니다. 

그러나 양복규 이사장님은 어려서부터 총명하여 13살의 나이에 "사서오경"과 "명심보감"을 마스터 하시었고 모든 "한문"을 섭렵하였습니다. 

그러한 실력으로 17살의 어린 나이에 서당의 훈장이되어 같은 또래의 친구들을 가르쳤습니다. 

이때부터 훈장선생님으로 대우와 접대 존경을 받았습니다. 

한문을 많이 알다보니 자연스럽게 한약업에 대한 공부를 하게되었고 낮에는 한약방 밤에는 "서당의 훈장" 선생님으로 3년을 가르키셨습니다. 

그러나 뜻한 바가 있어 지금의 전주시 금암동으로 집안 식구들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혈혈단신 빈방 하나를 얻어 이사를 오게 되었습니다. 

하루는 주인집 어르신이 "자네는 장애인의 몸으로 뭐하는 사람인가"?

"네ᆢ저는 한약방을 운영하는 사람입니다" 하였더니 그러나 집 주인은 믿지 못하겠다는 표정으로 곧바로 손을 내밀더니 "그럼 내 손을 진맥 한번 해 보라고" 요구하였습니다. 

양복규 청년은 "찬찬이 진맥 후 어르신의 건강증세를 말씀드렸더니 갑자기 "무릎을 탁 치시며" 아주 용하다고 신기해 하셨습니다. 

그 후 집주인은 앞집과 뒷집에 소문을 내기 시작하였고 다녀간 환자의 그 소문은 꼬리를 물었고 많은 환자들이 밀려오는 바람에 한약방앞은 그야말로 문전성시를 이루었습니다. 

어느순간 금암동 지역에 용하다는 한약방 명의로 소문이 자자 하다보니 전주시내 전 지역에서 환자들이 몰려들었습니다. 

당시에 얼마나 많은 손님들이 문전성시를 이루었으면 2명의 환자를 동시에 양손으로 진맥하고 증세에 맞게 한약을 지어주는 일이 허다 하였습니다. 

그리고 그 후 3년이란 세월이 정신없이 흘렀습니다. 

그러나 누군가가 무허가 한약방을 운영한다고 관에 신고를 하였고 약방은 결국 문을 닫고야 말았습니다. 

양복규 청년은 한동안 아무일도 손에 잡히지 않았고 이내 실의에 빠졌습니다. 

그러나 양복규 청년은 다시금 정신을 가다듬고 굳은 결심을 하였습니다. "그래"! "도전한번 해 보는거야"! 

장애의 몸을 가지고 자격증 도전이 쉽지는 않았지만 
반드시 자격증을 따서 정상적으로 한약방 운영을 해 보리라는 결심을 하였고 마침내 시험에 응시하였습니다. 

그 당시에는 무허가 한약방이 오히려 더 많았지만 영업이 잘되는것을 배아파한 누구가의 신고정신이 차라리 잘 되었다 생각했습니다. 

드디어 1968년도에 전라북도와 충청남도에서 실시하는 약업사 시험에 응시하였습니다. 

양복규청년은 걸을 수 없는 소아마비 장애라 시험장에 업혀 막 들어가려는 찰나에 시험감독관은 매몰차게 제지하였습니다. 

"어어~거기 잠깐만" 그런 몸으로는 시험을 볼 수 없으니 어서 나가세요! 

"감독관님 저 시험 꼭 치러야 하거든요" 

"저 비록 몸은 소아마비 장애를 앓고 있지만 이 시험을 꼭 볼 수 있도록 부탁드릴께요" 

양복규청년은 몸이 불편하여 엎드려 하소연이라도 할 수 없는 처지라 그저 눈물을 글썽이며 할 수있는 최선의 예를 갖추어 연신 고개를 조아리며 손을 싹싹 빌었습니다. 

"안돼~ '병신의 몸'으로 어떻게 시험을 보고 일을 할 수 있다는거야! "그 몸으로는 시험을 볼 수 없으니 어서 데리고 나가요"하는 것 이었습니다. 

지금같은 현실에서는 일어날 수 없는 일이 지금으로부터 55년전인 1968년도에는 장애 비하 발언과 천대가 아주 심하였습니다. 

장애인이라는 이유하나로 시험 자체도 응시 할 기회조차도 주지 않았던 것입니다. 

참으로 감독관이 야박하고 세상이 원망스러웠습니다. 

청년 양복규는 다시 깊은 실의에 빠졌습니다. 

어떻게 하면 다시 도전 할 수 있을까 생각하며 다른 지역의 시험 응시기회를 알아보던 중 이번에는 경기도 시험에 응시하기로 마음을 먹었습니다. 

그동안 공부는 아주 많이 한 터이라 필기시험에는 자신이 있었지만 시험 감독관이 문제였습니다. 

시험 당일 날 이번에는 시험 감독관이 오기전에 미리가서 지정된 책상에 앉아 있으리라는 지혜를 짜내어 새벽같이 시험장으로 삼촌의 등에 업히어 시험장에 도착하였지만 이번에는 너무 이른 시간이라 문이 굳게 잠궈있었습니다. 

몇시간을 기다린 후 시험장마다 문을 열고 다니는 당시의 학교 "소사"의 모습이 보였고 가장 먼저 책상에 앉았습니다. 

한참의 시간이 지난 후 수험생들이 자신의 자리를 찾아 앉았고 이윽고 감독관이 들어왔습니다. 

하지만 이번 시험 감독관은 몸을 한번 살펴보더니 시험을 잘 보라는 듯 등을 한번 토닥여 주시는 것 이었습니다. 

참으로 다행이었고 감독관에게 고마운 마음이 들었습니다. 

양복규 청년은 많은 우려와 걱정했던 염려들이 사라지고 편안하고 침착하게 시험을 무사히 치를 수 있었습니다. 

드디어 만점에 가까운 우수한 성적으로 필기시험에 합격하였습니다. 문제는 이제 실기 시험이었습니다. 

실기시험 시험감독관의 매서운 눈초리가 문제였고 실기시험 특성상 걸어다니며 시험을 치러야 한다는 부담이 있었습니다. 

드디어 마지막 실기시험일이 다가왔습니다. 

실기시험은 온갖 희귀한 약재와 쓰임새등 약 효능을 알아 맞히는 시험이었습니다. 

양복규 청년은 몸을 움직일 수 없는 장애의 몸인지라 각종 약초를 돌아다니며 맞추어야 하는 시험을 앞두고 큰 어려운 난관을 맞이하였습니다. 

이번에도 "그런 몸으로 시험을 치를 수 없고 또 합격한다 하여도 환자를 볼 수 없으니 집에 가라"는 감독관을 만나지 않을까 내심 걱정이 되었습니다. 

다행히도 당시 시험 감독관이었던 홍종기 의학과장님의 따뜻한 배려로 영광스런 최종시험에 합격을 할 수 있었습니다. 

홍종기 시험감독관은 걸어다닐 수 없음을 알아채리고 손수 약재를 가져와 이 약재의 이름은 무엇입니까? 

그리고 약에대한 효능과 쓰임새등 여러 질문들을 장애의 눈높이에 맞게 배려 해 주시었습니다. 

오늘이 있기까지 어머니와 아내 그리고 홍종기 의학과장님등 세분을 영원히 잊지 못 할  은인이자 존경하는 분으로 생각하신다 합니다. 

평생을 장애인들의 복지증진을위해 큰 꿈을 키워왔던 이사장님은 1981년도에 동암고등학교를 설립하시고 올해 개교 41주년을 맞이 하였습니다. 

동암의 모든 수험생에게는 1회 졸업생부터 40회 졸업생까지 이사장님이 직접 제조한 우황청심환을 먹고 수능 시험에 임한다는 오랜전통이 쭉 이어져오고 있습니다. 

우황청심환을 먹으면 머리가 맑아지고 새로운 기운이 생겨 시험을 잘 치르라는 의미에서 지금까지 1만5천여명의 동암재단 수험생이 이사장님의 정성을 가슴으로 함께 하였습니다.

1만5천여명의 졸업생을 배출하고 졸업생들이 지역과사회 국가를위해 전국 각지에서 다양한 모습으로 활동하는 모습을보면 60년 동안의 희노애락이 회한으로 스쳐지나갑니다. 

졸업생들이 국회의원이되고 판.검사가되고 청와대 비서관이되어 찾아와 인사할 때 큰 보람을 느끼신다 합니다. 

당시 동암고와 상산고.덕진고등학교가 1981년도에 나란히 개교를 하였다 합니다. 

"동암"이라는 아호와 법인과 재단명은 고향 순창 동계면을 생각하면서 고향의 동쪽 산에 있는 바위를 연상하며 "동암"이라고 정했습니다. 

평생을 장애인으로 살아오신 이사장님은 전북장애인복지관과 장애인보호작업장. 동암재활원. 동암차돌 초.중.고등학교를 설립하시었습니다. 

장애인들도 일반인과 편견없는 공평하고 행복한 삶을 살아갈 권리가 있음을 강조 하시었습니다. 

양복규 동암학원의 이사장님은 일평생을 장애인들의 복지 증진과 나은 삶을 위해 전 재산을 바치신 이 시대의 살아있는 의인이십니다. 

장애인들이 일반 목욕탕이나 수영장을 드나들기가 쉽지않은 것을 감안하여 목욕탕과 수영장을 장애인들의 편의에 맞게 설계하여 신축하였습니다. 

또한 수영장에서의 재활치료에 큰 도움을 주시었고 장애우 500여명이 지금도 자유롭게 이용하고 있습니다. 

의지할 곳 없는 장애우들을 위해 특수학교인 차돌 초.중.고등학교를 효자동에 설립하여 기숙할 수 있는 편의시설을 제공하였습니다. 

합동결혼식.기능경기대회등을 통하여 장애우들의 보다 나은 삶을 위한 눈물겨운 헌신은 일반인도 감히 흉내 낼 수 없는 눈부신 공적이 아닐 수 없습니다. 

전라북도 전체 인구의 약 10%가 장애인이고 그중의 또 10%가 휠체어를 이용하는 중증 장애인이라 합니다. 

우리 지역에 이렇게 훌륭한 교육자가 계심은 전라북도의 자랑이 아닐 수 없습니다. 

올해로 85세를 맞으신 양복규 동암학원 이사장님의 크신 공적은 국민훈장 목련장 수상을 비롯한 삼성그룹의  호암상을 수상하는 영예를 안기도 하였습니다. 

박정희 대통령과 가족들에게 생시에 한약을 오랜동안 처방해드린 일화는 유명합니다. 

양 이사장님의 한약 처방비법은 국립민속박물관의 타임캡슬에 영구 보관되어 역사적인 사료로 후세에 전해지고 있습니다. 

양복규 이사장님은 지금도 한옥마을 전동성당 근처에서 동아당 한약방을 운영하고 계십니다. 

한 평생을 장애우들을 위하고 대한민국의 미래를 짊어질 후대  양성을 위해 헌신하신 동암학원 양복규 이사장님의 노고에 깊은 감사를 드립니다. 

겸손과 인성을 중시한 교육이념의 가르침은 우리모두의 가슴속에 영원히 꺼지지않는 등불이 될 것입니다. 

많은 분들이 동암학원의 설립자 양복규 이사장님의 불굴의 의지와 철학 그리고 인간승리의 모습을 궁금해 하심에 올려드렸습니다. 

장애인들이 마음껏 공부하고 꿈을 펼칠 수 있는 "동암복지촌"을 만드시고 이 시대의 큰 스승으로 남아 장애인의 아버지가 되신 양복규이사장님을 존경합니다. 

동암고등학교를 반석위에 올려 놓으시고 인성과 예를 중시하며 부모님께 효도하고 국가에 충성하는 "인재 양성의 요람"을 위해 한 평생을 바치신 양복규 이사장님을 존경합니다. 

이상기 칼럼리스트 sgrhee21@nvp.co.kr

 

※ 외부 필진의 글은 본지 편집방향과 일치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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