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뉴시스 제공.
사진=뉴시스 제공.

"누구에게나 꿈은 있습니다" "생각하고 살지않으면 사는대로 생각하게된다" 

성공한 사람들은 그들의 목표를 달성하기 위하여 그저 사는대로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하루를 주도적이고 겨획적으로 살아간다고 합니다. 

우리는 꿈과 성공을 이루기위해 열심히 노력하고 자기의 맡은 바 분야에서 열심을 다하고 있습니다. 

필자는 그동안 우리지역 출신의 성공한 인물들의  성공 스토리를 올려드렸습니다. 

그 밖의 많은 분들의 성공스토리를 독자여러분들에게 전달하여 성공한 사람들의 삶을통하여 그분들의 철학을 배우고 강한 도전의식을 통한 자아발견으로 성공으로 인도하는 발판이 되었으면 하는 마음입니다. 

상기 분들의 특징은 무에서 유를 창조하는 긍정적인 마인드와 이루고자하는 목표가 분명합니다. 

실패와 좌절을 두려워 하지않고 꿈을 이루고자 하는 강인한 정신력과 감사와 겸손함이 넘치는 사람들입니다. 

누구나 성공을 위해 꿈을 갖습니다. 누구에게나 성공은 목표이자 희망입니다. 하지만 그 꿈을 이루는 사람은 많지 않습니다. 

이 분들은 타고난 금수저도 아니고 오로지 노력의 결실로 성공의 빛을 보게되었습니다. 

오늘 소개 해 드릴분은 전주 그랜드힐스턴호텔의 김금석 회장입니다. 

김금석회장은 완주군 용진면이 고향으로 가난한 시골의 아들로 태어나 당시 전주 시내 중앙극장 근처의 사진관 즉 오늘 날 스튜디오에서 사진 현상소를 운영 하였습니다. 

당시 열심히 일하며 꿈을 이루고자 하였으나 그만 실패를 하고 말았습니다. 

지금은 모든 핸드폰에 고성능의 해상도가 뛰어난 카메라가 달려있어 특별한 사진작가가 아니면 카메라가 필요없습니다. 

그 당시 친구들과 놀러갈 때는 으례껏 미놀타 카메라를 어깨에 메고 필름을 몇 통씩 사가지고 추억을 담았던 시절이었습니다. 

사진을 실컷 찍어 필름교체를 하다가 실수로 빚이 들어가 담았던 추억들을  모두 잃어버리는 일은 참 많기도 하였고 다반사였습니다. 

현상을 하고 사진을 분류하여 봉투에 이름을 담아 나누어주던 기억과 추억도 새록새록 나기도 합니다. 

당시에는 사진관이 엄청 잘 되었지만 무리한 투자로 그만 첫번째 실패를 맛보고 말았습니다. 

그러나 더 큰 무대에서 일하고픈 욕망이 생겼습니다. 

당시 19살의 나이로 단돈 5천원을 손에쥐고 무작정 서울로 상경했습니다. 

나는 반드시 성공하여 고향으로 금의환향 하겠다는 마음속으로 깊이 다짐며 이를 앙당 물었습니다. 

서울의 모 사진관 현상소에서 무려 3년동안의 숙식을 해결하며 급여도 받지않고 성실하게 일하였습니다. 

그러나 4월 어느 날  현상소 사장은 서울의 소요산 근처에서 뜻밖의 교통사고로 그만 세상을 뜨고 말았습니다. 

사진관은 문을 닫게되었고 새로운 일자리를 찾아야 했습니다. 

그러나 당시 김금석 청년에게는 새로운 성공의 발판을 마련하는 기회가 올 줄은 아무도 몰랐습니다. 

1980년도 봄.
그동안 동종업계의 사진관 인맥으로 넓혀왔던 거래처 사장에게 찾아가 뜻한 바를 말씀드렸습니다. 

"사장님 저에게 3백만원만 빌려주십시요"?ᆢ하고 자신감 넘치는 목소리로 아주 단호하고 대범하게 부탁을 드렸습니다. 

이윽고 한참을 노려보던 
"사장님 "왈~
"그 돈으로 무얼 하려고"?ᆢ 

네ᆢ돌아가신 사장님을 대신하여 제가 근무했던 사진관을 한번 인수 해 보고 싶습니다! 사장님은 한참을 골몰히 생각해 보다가 말문은 열었습니다. 

"지금 한번 가볼 수 있니 앞장 한번 서보렴"? 하시었고 다음 날 아침에 사장님과 함께 그곳에 가 보았습니다. 

사장님께서는 입지여건을 두루 살펴보시더니만 고개를 혼자 끄덕이시며 이제 됐다! 

이만한 장소면 되었다 하시며 임대보증금 3백만원을 선뜻 빌려주셨습니다. 

그동안 성실하게 3년동안을 무보수로 일하다보니 어느 새 동종업계에 소문이나고 서로 좋은 조건의 스카웃 제의를 하였지만 은혜를 배반할 수 없다는 신념과 성실함으로 스카웃 제안 거절이 오히려 인정을 받아 3백만원이라는 큰 돈을 선뜻 빌려주셨던 것입니다. 

당시 10만원의 금액도 큰 돈이었고 3백만원의 금액은 아주 큰 돈이었습니다. 

당시 7급 4호봉 공무원 월급이 10만2천원이었으니 당시 3백만원은 지금의 돈으로 환산을 해보면 6천만원의 가치였습니다. 

그렇게 큰 돈을 차용증 한장 받지않고 오직 성실과 신용만으로 빌려주셨던 것입니다. 

사업은 잘 되었고 어느 날 아시는 사장님의 부탁으로 출장 웨딩촬영을 처음 나가게 되었습니다. 

그동안 사진관에서만 촬영과 현상만으로 사진관 운영을 하였습니다. 

동종업계의 잘 아시는 사장이 일이 밀렸다고 웨딩촬영 부탁을 하시어 처음으로 예식장에 발을 들여놓게 된 동기가 되었습니다. 

새로운 웨딩사업에 대한 눈을 뜨게되고 열심을 다한 결과 당시 동대문구 회기동 근처의 "나윤 웨딩홀"을 인수 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웨딩사업은 황금알을 낳는 거위였고 서울에서 가장 잘 나가는 예식홀이 되었습니다. 

당시 사업의 신조는 돈보다 고객에게 최고의 만족을 드리자는 경영철학이 저의 모토였습니다. 

고객이 만족하지 않으면 전액을 감액 또는 환불 해 주는 고객 만족을 실현하다보니 소문은 꼬리를 물었고 예약은 차고 넘쳐났습니다. 

주변 사람들에게 인정을 받게되었고 김금석 회장이 운영하는 예식사업은 고객서비스의 기준 롤 모델이 되었습니다. 

이어서 인천의 대형 예식장인 "천년웨딩홀"을 인수 하였습니다. 

잇달아 수원과 용인에도 웨딩홀을 인수받는 웨딩업계의 선두 주자가 되었습니다. 

물론 당시 차용한 3백만원의 금원을 5백만원으로 되갚아 드렸습니다.

반드시 받은 은혜는 배로 갚아야 한다는 철학이 있었고 한사코 받지않으려는 이자를 오히려 사정하여 드리고 왔습니다. 

그 분의 도움이 없었다면 이렇게 큰 돈을 벌수도 성공할 수도 없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우리는 세상을 살아가면서 은혜를 원수로 갚는 경우를 흔하게 보게됩니다. 

그런 사람은 돈을 많이 벌었다하여도 결코 대인관계에 실패하였기 때문에 성공자라고 말할 수 없을 것입니다. 

김금석 청년은 그렇게 성공하기까지 그동안 숱한 고생도 참 많았습니다. 

성수동 옥탑방에 살면서 어린 두 남매를 키우며 갖은 고생을 다 하였고 마침내 그 분야의 업계에서 성공에 이르렀던 것입니다. 

김금석회장은 19살에 고향을 떠나 반드시 "금의환향" 하겠다는 마음속의 결의를 다시금 새기며 고향에 내려가서 사업을 펼쳐보고자 다짐하였습니다. 

당시 전주의 여기저기를 알아 보던중 서곡지구 썬플라워 웨딩홀이 임대가 나왔음을 알게되었고 먼저 임대사업을 병행하여 운영을 하였습니다. 

그 후 건물주가 어려움을 겪고있던 중 매입 제의가 들어와 썬플라워 웨딩홀 인수를 하게되었습니다. 

지금의 호텔부지 토지를 추가로 매입 후 오늘 날 전주의 랜드마크인 그랜드힐스턴호텔을 신축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호텔을 신축하면서 수도권에 있는 사업체들을 하나하나 정리를 하였습니다. 

이곳 전주에서 고향을 위한 가치있는 일과 봉사하는 삶을 살기로 마음의 결정을 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전주에서도 호텔 신축시에 갖은 어려움과 난관이 많았으나 마침내 준공을 받아 웨딩홀과 세미나등은 예약으로 초만원을 이루었습니다. 

하지만 어느 순간 코로나 바이러스가 전 세계를 휩쓸면서 사회적 거리두기의 가장 많은 피해 업종 중 하나가 되고 말았습니다. 

한 푼이라도 절약을 하기위해 모든 식자재를 직접 눈으로 보고 고르며 친 환경 제품으로 고객에게 보답하려고 열심을 다해 노력하였습니다. 

새벽3시에 출근을 하고 결혼식에 쓰일 꽃들을 새벽부터 두 부부가 일일이 꽃꽃이를 해 놓고 주방에서 설겆이까지 도맡아 직접 행하는 정신이야말로 성공의 기본방침이 밑 바탕에 깔려 있음을 알 수 있었습니다. 

2년여 동안의 코로나 여파는 웨딩업계에서는 실로 대단한 타격이었습니다. 

코로나가 극성을 부리며 예약했던 고객들이 에약을 취소하는 사태가 다반사였습니다. 

걸려오는 전화 받기가 무섭게 취소 또는 보류 해달라는 전화가 계속되었습니다. 

또한 각종 연회석 세미나가 모두 중단이되다보니 직원은 일이 없어도 월급을 주어야 하는 이중고까지 겹쳤습니다. 

2년동안의 손실은 백억원이 넘는 적자였고 호텔과 예식업은 쓰나미가 몰고 지나간 폐허같았습니다. 

2년동안의 홍역을 치르고 다행히 코로나19가 잠잠해졌고 일상이 회복되었습니다. 

코로나 팬더믹 사태가 풀리자 그동안 미루어왔던 예식과 세미나 일정등을 잡느라 고객들의 분주한 상담문의가 들어오고 다시금 희망을 갖게 하였습니다. 

단돈 5천원으로 19세에 무작정 서울로 상경하여 숱한 고생과 노력끝에 마침내 성공하였던 것입니다. 

1천억원대의 큰 성공을 이루고 금의환향한 김금석회장의 그동안의 노고에 깊은 감사를 드리며 축하의 박수를 보내드립니다. 

김금석회장님은 남 모르게 어렵고 소외된 이웃을 도우며 "노블레스 오블리주의" 사회적 책임을 다하는 훌륭한 성품을 가진  본 받고 싶은 경영자입니다. 

앞으로도 고향을 위한 많은 봉사활동과 어려운 이웃을 돕는 선한 영향력으로 고객이 감동할 수 있는 서비스로 보답 해 주시기를 부탁드립니다. 

이형권 칼럼니스트 leehyung@nvp.co.kr

 

※ 외부 필진의 글은 본지 편집방향과 일치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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