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정폭력에 대한 러시아 특유의 인식이 이제사 많이 바뀔 모양이다. 가부장적인 전통에 어쩔 수 없이 실내에서 오래 같이 부대껴야 하는 기후적 환경, 너무 먼 법률적 보호 체계 등이 그동안 만들어 놓은 '러시아식 가정폭력'의 벽이 조금씩 무너지고있다. 활발한 SNS 소통을 통해 분출된 '여성 파워'가 이끌어내는 결과라고 할 수 있다.

현지 언론에 따르면 가정폭력을 일삼아온 아버지를 살해한 혐의로 최고 20년 징역형을 받을 위기에 처한 세 자매의 석방 운동이 조만간 성과를 거둘 전망이다. 세 자매의 석방 탄원서에는 이미 30만 명 이상이 서명했으며, 다양한 석방운동이 재판부를 움직이고 있다.

살해 사건이 발생한 것은 지난해 7월 27일. 아버지 미하일 하차투랸(57) Михаил Хачатурян 은 당시 19세였던 크레스티나, 18세 안젤리나, 17세 마리아를 집안이 너무 더럽다는 이유로 폭력을 행사했다. 그날 밤 세 자매는 칼과 망치 등으로 아버지를 살해했다. 세 자매는 경찰에 자수한 뒤 체포됐다.

그러나 경찰 조사가 시작되면서 아버지가 최소 3년 이상 세 자매를 때리거나 고문, 감금하는 등 가정폭력을 행사한 사실이 드러났다. 인권 단체들이 "세 자매는 아버지의 학대로부터 피할 수도, 보호받을 수단도 없었다"며 "가해자가 아니라 사실상 피해자"라고 들고 일어났다.

검찰은 세 자매가 자고 있던 아버지를 살해한 점, 사건 당일 아침에 범행에 쓸 칼을 미리 준비했던 점 등을 이유로 계획적인 살인을 저질렀다고 주장했다. 또 세 자매의 범행 동기를 '복수'라고 명시했다. 이 살해 혐의가 유죄로 인정되면 세 자매는 최고 20년 징역형을 받게 된다.

재판부는 고심 끝에 세 자매가 당한 가정 폭력을 조사하도록 명령하고, 조사가 끝날 때까지 가택연금 조치를 처했다.

그로부터 1년이 지났다. 법원은 세 자매를 다시 구류 조치한 뒤 재판을 재개했다. 희망적인 것은 "'가정 폭력 조사위'가 세 자매를 피해자로 사실상 결론냈다"는 보도가 잇따르고 있는 점이다. 변호인 측도 조만간 변론이 종결되고 '자기 방어에 의한 살해'라는 결론이 나올 것으로 기대한다.

[ 가정폭력 반대 플래시몹(운동)에 여성들 지지 /러시아 인터넷 사이트 캡처 ]
[ 가정폭력 반대 플래시몹(운동)에 여성들 지지 /러시아 인터넷 사이트 캡처 ]

재판부를 움직이는 것은 또 있다. SNS를 통해 확산되고 있는 '가정폭력 처벌 강화'를 위한 청원 운동이다. 이미 60여만명이 서명했다고 한다. 러시아 여성 인권운동가인 알리오나 포포바가 가정폭력 가해자 처벌 및 피해자 보호 규정 명문화를 촉구하며 시작한 이 청원은 세 자매 재판 재개와 맞물려 큰 반향을 불러일으켰다.

특히 인권운동가 알렉산드라 미트로시나는 얼굴에 멍이 들고 칼로 베인 상처를 화장으로 표현한 뒤 ‘#나는 죽고 싶지 않았다’ янехотелаумирать 는 문구의 해시태그를 달아 인스타그램에 올렸다.

그녀는 당초 올가 사디코바라는 여성의 억울한 사연을 전하기 위해 이 해시태그를 사용했다. 사디코바는 지난 7월 8살짜리 아들이 보는 앞에서 남편에게 살해당했다고 한다. 미트로시나는 "제대로 된 가정폭력법이 있었다면, 사디코바가 살아 있었을 수도 있었다"며 동참을 호소했다. 이후 SNS에는 칼자국이나 멍, 혈흔 등으로 얼굴을 화장한 여성들의 게시물이 잇따랐다.

이 청원이 요구하는 것은 지난 2017년 개정된 가정폭력에 관한 법을 제대로 다시 바꾸라는 것. 이 법은 뼈가 부러지거나 뇌진탕에 걸려 병원에 실려가지 않을 정도의 구타나 멍, 출혈은 '심각하지 않은 가정 폭력'으로 규정해 벌금 또는 2주 이하의 징역에 처하도록 했다. 경찰 역시 이 법과 관례에 따라 신고가 들어와도 '가정폭력은 단순한 가족 문제'로 여겨 개입조차 꺼리는 형편이다.

그러다 보니 러시아에서 가정 폭력은 상당히 만연한 것으로 보인다. 인권단체 측은 4가구당 1명꼴로 여성이 가정 폭력 피해를 당하고 있다고 추정한다. 매년 가정폭력 피해자가 1,600만명에 이른다는 주장도 있다. 한 범죄 전문가는 "러시아의 여성 수감자 80%는 가정 폭력에 대한 자기방어 중에 일어난 사건에 연루된 것"이라고 추정하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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