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스크칼럼] 『단테는 지옥을 썼지만, 나는 지옥을 보았다.』

프랑스혁명기 빅토르 위고가 불후의 명작 <레 미제라블>의 서문에 쓴 문장이다. “빵을 달라!”고 절규하는 비참한 사람들(레 미제라블)이 살아가는(어쩌면 죽어가는) 파리가, 위고의 눈에는 단테가 <신곡>에서 상상으로 묘사한 지옥의 실체였던 것이다.

230년 전 파리, 위고의 소설 속에서 ‘장발장’은 빵을 훔친 죄로 ‘빵살이’를 했지만, 2018년 대한민국에는 ‘파리의 빵(바게트)’을 더이상 팔지 않는다는 이유로 ‘레 미제라블’이 된 부부가 있다.

부부는 9년 전 충남 아산에 ‘파리바게뜨’ 가맹점을 열었다. 읍내라지만 중심에서 벗어난 주택가여서 좋은 입지는 아니었다. 남편은 30대 초반 박봉을 견디지 못해 대출을 받고 지인들에게 돈을 빌려 창업전선에 뛰어들었다. 아이들을 학교에 보낸 후에는 아내도 전우가 되었다. 부부가 워라밸을 포기한 대가로 그럭저럭 생계는 이어갈 수 있었다.

하지만 몇 해 전부터 매출이 떨어지기 시작하더니 지난해부터는 일매출 140만 원도 찍지 못했다. 이것저것 ‘떼이고’ 나면 월 200만 원도 손에 쥘 수 없었다. 매상이 줄어든 데는 본사가 이런저런 구설수에 오르면서 브랜드 이미지가 실추된 것도 한몫했다.

단골손님들마저도 파리바게뜨에 곱지 않은 시선을 보낼 지경이 되자 부부는 시름이 깊어졌다. 절망의 순간 탈출구가 보였다. 비교적 가맹조건이 나은 베이커리 브랜드의 제안을 받게 된 것이다.

​속칭 ‘갈아타기’였지만 매출 감소를 감수하면서 9년이나 버텼지만 부부가 인당 100만 원도 벌지 못하는 상황에서 본사와의 ‘의리’는 사치였다.

‘갈아타기’의 대가는 가혹했다. 파리바게뜨 본사인 SPC는 부부가 간판을 바꾼 지 2주 만에 바로 옆에 직영위탁 매장을 오픈했다. 이른바 ‘보복출점’이었다. 본사는 ‘대응출점’이라고 주장하지만 이후 벌어진 조치를 보면 ‘대응’보다는 확실히 ‘보복’에 가까웠다.

한 개 매장도 월 4,000만 원 매출이 안 나오는 골목상권을 나눠 갖겠다고 출점한 것 자체가 장사가 아니라 훼방이 목적이었다. 1+1 행사에 원가 이하 할인까지 서슴지 않았다.

​출혈을 감수하더라도 가맹점주들의 ‘갈아타기’는 반드시 응징한다는 의지가 결연해 보였다. ​지방 소도시골목에서 전국의 모든 가맹점을 향해 “배신은 곧 끝장”이라는 섬뜩한 경고 메시지를 보낸 것이다.

‘보복’은 성공적이었다. 부부가 운영하는 매장은 6개월 사이에 일매출 100만 원 이하로 쪼그라들었다. 적자가 시작된 것이다. 생존을 위한 선택이 생존을 위협한 꼴을 보며 웃음을 짓고 있을 사람들은 누구인가?

​프랑스혁명은 자유, 평등, 박애 세 가지 정신을 유산으로 남겼다. 평등을 가져간 사회주의는 끝내 붕괴되었고, 자유를 가져간 자본주의는 그 병폐가 극에 달하고 있다. 양쪽 다 ‘박애’를 외면했기 때문이다.

SPC에게 박애 같은 프랑스혁명 정신은 기대하지도 않는다. 최소한의 부끄러움이라도 알면 다행이다.

‘바게트’는 프랑스 사람들의 주식이다. 우리의 밥 같은 것이다. ‘크라상’ 역시 바게뜨에 버금가는 주식이다. 바게트가 밥이면 크라상은 라면이다. 평일에는 바게트를, 주말에는 크라상을 먹는다.

나의 프랑스 친구 중 한 사람이 “한국엔 왜 이렇게 파리바게뜨가 많으냐?”고 물은 적이 있다. 내가 “좋지 않느냐?”고 반문하자 그들은 “그런데 정작 파리바게뜨에서 제일 맛없는 게 바게트”라며 쓴웃음을 지었다.

바게트를 맛없게 만든다고, 크라상이 크라상 같지 않다고 해서 프랑스의 명예를 훼손한 것은 아니다. 하지만 한진그룹 조씨 일가의 갑질에 분노한 대한민국 국민들이 사명에서 ‘대한’을 빼고 로고에도 태극마크를 쓰지 못하도록 하자는 청원까지 했던 것을 SPC는 주목해야 한다.

‘파리바게뜨’, ‘파리크라상’ 같은 브랜드로 보복출점 같은 극악무도한 짓을 서슴지 않는다는 것을 프랑스 정부와 파리 시민들이 안다면 브랜드명에서 ‘파리’, ‘바게트’, ‘크라상’ 같은 단어를 쓰지 못하도록 국제사법기관에 제소할지도 모를 일이다.

SPC 홍보담당자들은 언론사의 전화조차 받지 않는다. 도대체 무엇이 두려운 것일까. 그들도 오너와 경영진의 선택이 잘못되었음을 알고는 있을까.

‘프랜차이즈’에서 ‘차이’를 빼면 ‘프랜즈’가 된다. 대한민국에서 그 차이는 지옥과 천국 만큼이나 큰것처럼 보인다.

위고가 <레 미제라블>의 서문에 쓴 문장을 참고해 이 칼럼의 마지막 문장을 이렇게 쓰면 너무 자조적일까?

『단테는 지옥을 썼고, 위고는 지옥을 보았지만, 나는 지옥을 보면서도 부부를 위해 아무것도 할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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