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미국 내 물가 상승이 지속되며 생활 부담이 커지고, 국민 불안감이 확산되는 가운데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소고기·커피·토마토·바나나 등 필수 식품을 포함한 수백 개 품목에 대한 상호 관세를 전격 면제했다. 이는 “관세가 물가를 올리지 않는다”던 기존 입장을 사실상 뒤집는 조치로 평가된다.
트럼프 대통령은 11월 14일(금) 행정명령에 서명해 여러 농산물 수입에 적용돼 온 보복 관세를 철회하고, 면제 발효 시점을 전날 0시 1분으로 소급했다. 면제 대상 품목 중 상당수는 최근 가격이 급등한 품목들로, 다진 소고기 가격은 1년 새 13%, 스테이크는 17%, 바나나는 7%나 올랐다.
이번 조치는 미국과의 무역 협정 체결 여부와 관계없이 모든 국가에 적용되며, 미국 내에서 자체 생산하는 식품(예: 빵, 오렌지 주스) 일부도 포함됐다. 백악관은 “무역 협상에서 가시적 진전을 이뤄 관세가 더 이상 필요하지 않다”고 설명했지만, 미국 여론은 물가 급등에 따른 민심 악화를 의식한 대응으로 해석하고 있다.
최근 지방선거에서 민주당이 생활비 문제를 집중 공략해 큰 승리를 거둔 것도 공화당 정부에 정치적 압박으로 작용했다. 유럽경영대학원(IESE) 경제학자 안토니오 파타스는 “트럼프 행정부는 관세가 실제로 물가를 끌어올린다는 사실을 뒤늦게 인정한 셈”이라며 “관세는 문제 해결책이 아니다”라고 지적했다.
다만 파타스는 트럼프 대통령이 일부 필수품의 관세를 인하했더라도 전체적인 관세 정책 기조는 변하지 않을 것이라고 분석했다. 이는 다른 상품 가격과 원자재 비용이 여전히 상승 압력을 받을 수 있음을 의미한다. 그는 “바나나와 커피는 내려갈 수 있지만, 나머지는 어떤가?”라며 구조적 문제를 강조했다.
미국 산업계의 반응도 엇갈리고 있다. 미국 대두 협회는 비료 관세 면제 조치에 감사의 뜻을 밝혔지만, 제조업계는 생산 설비·원자재에 부과되는 관세가 유지돼서는 안 된다며 반발하고 있다. 유럽·영국산 주류에 면제가 적용되지 않은 점 역시 미국 호텔·요식업계를 중심으로 불만이 표출됐다.
트럼프 대통령은 워싱턴을 떠나는 전용기 탑승 직전 “추가 관세 조정은 필요 없다고 본다”고 말했지만, 정책 전문가들은 이를 곧이곧대로 받아들이지 않는다. APAC 어드바이저스 CEO 스티븐 오쿤은 “이번 조치는 전체 인플레이션 대응이 아니라 생활비 부담을 낮추기 위한 제한적 조치”라며 “트럼프 행정부는 앞으로도 물가와 직결된 항목에 대해 더 많은 관세 완화를 단행할 것”이라고 전망했다.
그러나 그는 전반적인 관세 수준이 여전히 매우 높고, 대규모 이민자 송환과 같은 백악관의 다른 정책들은 오히려 인플레이션을 유발할 가능성이 있다고 지적했다. “결국 유권자들은 트럼프가 경제를 어떻게 관리할지 더욱 예의주시할 것”이라는 분석이다.
한편 파타스는 백악관이 성장과 인플레 우려에 더 민감하게 대응하면서 기존 결정을 뒤집는 일이 앞으로 늘어날 것으로 보이지만, 이러한 불안정한 정책 전환은 시장에 불확실성을 키울 것이라고 전망했다. 더 나아가, 트럼프 대통령이 전 세계 무역 파트너에게 부과한 대규모 상호 관세가 유지될 수 있을지 여부는 미국 대법원의 판단에 달려 있는 또 다른 리스크로 떠오르고 있다.
오쿤은 “트럼프 대통령의 이번 조치는 국가 안보를 이유로 관세를 정당화해 온 기존 논리를 일부 약화시키는 결과가 될 것”이라며 향후 통상 정책의 방향성에 대한 의문이 더욱 커질 것이라고 평가했다.
최규현 기자 kh.choi@nvp.co.kr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