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초에 태국 여행을 다녀왔다. 라차부리에서 골프장을 운영하는 여장부 조카의 초청으로 부부가 여행을 했다. 동남아 여행은 처음이었다. 인도 태평양 정세 관련 동남아 지형 숙지에 많은 도움이 되었다. 방콕, 파타야 답사기는 별도의 장에서 후기로 소개하고 ‘콰이강의 다리’에 얽힌 내용을 먼저 정리해 보고자 한다. 

우리에게 “보기대령의 행진”이라는 휘파람 소리 음악으로 더 알려진 ‘콰이강의 다리’는 일본군의 무자비한 포로학대로 건설된 철로 상의 교량인데 일본군들이 포로현장 감독으로 조선인을 투입해 동경 전범재판에서 포로학대 혐의로 조선인 10여 명이 처형된 비운의 현장이다. 

동경전범 재판에서는 148명이 BC급 전범판결을 받았고 그중 129명이 포로감시원이었는데 23명이 사형, 125명이 11년형에 처해졌다. 그만큼 연합국으로서는 용서할 수 없는 일제의 비열한 행위로 보았다.  

콰이강의 다리는 말레이 전투가 배경

왜 ‘콰이강의 다리’를 건설하고자 했는지에 대한 자세한 배경을 잘 모르고 영화를 보아왔고 음악을 들은 영화였다. 이 영화는 우리에게 ‘혹성탈출’이라는 소설로 잘 알려진 프랑스 작가 피에르 볼이 1952년에 쓴 소설을 바탕으로 1957년에 영화화되었다. 

이 영화는 영연방군 10만이 제대로 싸워 보지도 못하고 배후 기습을 당해 항복한 ‘말레이 전투’를 배경으로 하고 있기에 프랑스군이 영국군을 디스한 영화로 영국 참전군인들이 항의도 하는 등 논란이 있었던 영화였다. 영화는 실제 현장이 아닌 스리랑카의 켈라니에서 촬영되었다.

반전 영화인 ’콰이강의 다리‘는 데이비드 린 감독하에 제작되었고 영화에 나오는 니콜슨대령의 회고록은 1991년 피터 데이비스가 The Man Behind the Bridge라는 제목의 책으로 편집발간하였다. 역사상 비극을 배경으로 하는 이 영화는 아카데미 작품상과 작곡상 등 7개 부문에서 수상을 했다. 

미드웨이 해전에서 제해권 상실 후 보급목적으로 철도 건설

1942년 6월 영국, 호주, 미국, 뉴질랜드, 덴마크, 네덜란드 포로 61,000 명과 인도, 중국, 인도네시아 출신의 노동자 약 20만 명이 동원되어 태국의 방콕에서 칸차나부리를 거쳐 버마의 탄부지야트에 있는 일본군 기지를 연결하는 415km 길이의 철도를 건설하는 작업에 투입되었다. 

이를 통하여 싱가포르에서 말라야와 태국을 통과하는 직행노선을 확보하였다. 일본은 버마기지 보급을 통해 철도를 이용하여 인도로 진출할 수 있는 발판을 마련코자 하였다. 

1942년 6월, 미드웨이 해전에서 일본 해군이 결정적인 패배를 당한 후 제해권을 상실한 가운데 버마주둔 일본군과 파푸아 뉴 기니아에 주둔한 일본군에 대한 보급을 해군에 의존해야 하는 상황에서 일본 전시내각에 의해 철도건설이 결정되었다. 

이 철도 노선은 1910년 버마와 태국을 연결하기 위해 영국이 검토하였으나 지형, 풍토병, 몬순 강수량 때문에 이 프로젝트를 포기했었다. 하지만 대본영 기획가들은 싱가포르와 말래카 해협을 통과하는 위험한 항로를 우회하는 해결책으로 본 철도를 구상했다.   

일본군은 캄보디아 바탐방에서 육지로, 돈무앙 공항에서 항공으로, 태국 구틀 해안의 후아힌과 파타니 사이에 7차례에 걸쳐 상륙하여 해상으로 태국을 침공했다. 이때 태국총리 피분 송크람 원수는 일본군에 저항하는 것은 자살행위라고 생각하고 휴전을 명령했다. 

이어서 41년 12월 21일 일본과 동맹을 맺었다. 한달 뒤 1월 25일 피분은 영국과 미국에 전쟁을 선포했다. 워싱턴 주재 태국 공사는 미국무장관에게 선언문 전달을 거부하고 자유태국운동을 개시했다. 

철도 건설을 위하여 1만2000명에 달하는 철도건설 2개 연대가 투입되었다. 제5연대는 버마의 탄부지야트에, 제9연대는 태국의 칸차나부리에 주둔했다. 철도건설 공기(工期) 단축을 위하여 일본군은 전쟁포로들을 버마와 태국으로 이송했다.

철도건설은 1942년 9월 16일 시작되었고 일본 기술자들은 최소 5년이 걸릴 것으로 판단했지만 기간 단축을 위해 연합군 포로를 투입하여 1943년 12월 25일 ‘죽음의 철도(le chemin de fer de la mort)’로 불리우는 이 철도는 16개월만에 완공되었다. 

죽음의 철도 건설에 노동자 10만, 포로 1만6000명 희생

이 철도건설에 10만명의 아시아 노동자들과 연합군 포로 16,000명이 목숨을 잃었다. 철도 선로 1km를 완공하는데 38명의 생명이 희생되었다. 태국쪽 길이가 263km, 버마쪽 길이가 152km였다. 1942년 12월 영국군은 태국과 말라야 북부에 상륙할 가능성이 있는 모든 장소에 일본군의 상륙을 거부할 ‘마타도르 작전’을 실시할 계획이었으나 제공권을 일본에 뺏긴상태에서 방어에 실패하였고 특히 말라야 배후로 기습을 당한 상태에서 일본군에게 주도권을 뻬앗겼다.  

철도건설은 전쟁포로를 투입하여 양쪽 끝에서 동시에 시작되었으나 베트남, 인도, 인도차이나의 프랑스인들은 일본과 외교적 양해로 철도 공사에 투입되지 않았다. 

하지만 철도건설은 측량을 위해 노선을 정찰하던 비행기가 추락하여 철도 기술자들이 전부 사망하는 바람에 철도가 어떤 경로로 건설되어야 하는지 알고 있던 전문가들이 전부 사라져 최적의 경로를 따르지 않아 2개월의 공기 지연과 우여곡절을 겪고 겨우 완성되었다.

철도건설 당시에는 예상보다 일찍 우기가 시작되었고 밤낮으로 비가 쏟아져 포로들을 괴롭혔다. 비에 젖은 대피소, 썩어가는 옷과 부츠로 인하여 처음에는 노동자들, 그 다음에는 포로들 사이에 콜레라가 창궐하였다. 시간에 쫒긴 일본군은 포로를 무자비한 노동에 혹사하였고 질병과 영양실조, 이질, 말라리아로 인하여 수 많은 포로들이 희생되었다. 

'콰이강의 다리' 옆에는 철도와 교량가설 관련 박물관이 있다. 1977년에 설립된 박물관 명칭은 일본, 영국, 호주, 태국, 네델란드의 영문 첫글자를 따서 제스(JEATH)로 명명되었다. 1층에는 당시의 비참했던 포로들의 생활과 위생상태를 알 수 있는 물품들과 생활모습을 담은 사진들이 진열되어 있고 2층에는 태국의 화폐들이 전시되어 있다. 

철도 건설에서 가장 위험한 작업중 하나가 교량가설인데 공사 현장에는 일부 중량물 이동에 코끼리를 이용하는 것을 제외하곤 인력에 의해 건설되었고 매일 수많은 인명 사고가 발생하였다. 일본군은 철도 건설 현장에 포로 수용소를 건설하여 24시간 교대로 밤낮없이 투입하여 공사를 강행하였다. 

시간을 단축하기 위해 계곡연결 교각 받침대를 목재로 만들었다. 당시 사진에는 삐쩍 마른 포로들이 철도 위로 침목을 나르는데 힘에 겨워 보인다. 당시 사망한 포로들을 매장한 유엔군 묘지는 세 곳이 있는데 그 중 두 곳은 칸차나부리 타마르캄과 타무앙에 있고 한 곳은 버마의 탄부지야트에 있다. 

2차대전 당시 콰이강(원래는 매클롱 강인데 콰이 야이 강으로 변경)에 목조다리 2개가 43년 2월에 건설되었다. 같은 해 6월 달에 오늘날 볼 수 있는 철근 콘크리트 다리가 완성되었다. 다리 경관은 일본군이 자바에서 기존 다리를 해체하여 칸차나부리로 조각내어 수송하여 왔다. 

다리 완성 후 다리를 파괴하기 위하여 연합군은 44년 말에 폭격을 하여 45년 2월에 파괴하였다. 연합군 포로들이 목재로 수리하였는데 45년 4월에 다시 공격을 받았고 45년 4월 2일 B29 폭격수 빌 헨더슨 중령에 의해 파괴되었다. 

철도가 완공된 후 포로들은 세갈래로 나뉘어 졌다. 일본군에 충성할 사람으로 판명된 사람은 일본으로 보내졌고, 두 번째 그룹은 철도 보수유지 그룹으로 남았고 환자로 판명되어 더 이상 노동이 불가한 포로들은 싱가포르 창이 감옥으로 보내졌다. 그런데 일본으로 보내진 그룹은 연합군 잠수함에 의해 중도에 격침되어 수장되었다. 

일본은 태국에게 인도로 가기위한 길을 비켜달라 제안해

태국은 일본으로부터 임진왜란 당시의 정명가도(명을 칠테니 길을 비켜달라)와 같은 제안을 받았다. 피분총리는 태국을 잘못된 편에 서서 전쟁에 참전했다하여 44년 7월 24일 사임했다. 전쟁이 끝난 후 태국 국영철도는 손상된 3개의 경간을 2개의 강철경간으로 교체하고 맨끝의 모든 목재 경간을 5개의 강철경간으로 교체했다. 1945년 전쟁이 끝나자 영국군은 3.95Km를 해체하였다. 태국 버마 국경을 넘나드는 철도는 1947년 태국 국영철도에 넘어갔다.     

퍼시발장군이 지휘했던 8만5000 명의 영국군이 야마시다가 지휘한 25,000 명의 일본군에게 항복하였다. ’말라야의 호랑이‘라는 별명으로 불리었던 야마시다 도모유키 25군 사령관은 싱가포르를 42년 2월에 함락하였다.

야마시다는 전후 전범재판 과정에서 “지휘관인 내가 책임이 없다고 하면 누구에게 책임이 있는가? 나는 절대로 비겁하게 부하들에게 책임을 떠넘길 수 없다.”고 했으며 “나는 몰랐다. 그러나 나에게 책임이 없다고 말할 수 없다”고 책임을 회피하지 않았다. 

처칠은 싱가포르의 함락을 역사상 가장 비참한 패배라고 불렀다. 비극을 안고 건설된 철도와 콰이강의 교량은 아이러니하게도 관광지가 되었다.

주은식 예비역 장군

한국전략문제연구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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