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뉴시스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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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하면 살고, 막히면 죽는다"는 뜻입니다.

그야말로 건강 비결의 요체입니다.

오늘날 전 세계적으로 유명한 차(茶)는 수없이 많지만 중국의 보이차만큼 귀한 차는 드물다고 할 것입니다.

이제는 중국 보이차는 그 효능 면에서도 감비차로도 널리 인식되고 있습니다.

하지만 그렇게 유명한 보이차도 처음부터 중국인들에게 사랑을 받았던 것은 아니었습니다.

보이차는 중국의 고대 국가인 상(商)나라(B.C.1711~1066) 시대의 문헌에도 등장하고 있는 것으로 보아 그 역사가 최소한 3,000년은 된 것으로 추측되고 있습니다.

그 후로도 당(唐)나라와 송(宋), 원(元), 명(明)을 거치는 동안 그다지 빛을 보지 못했으나 대륙의 마지막 왕조(王朝)였던 청(淸)나라에 와서 황실의 공물(貢物)로 지정되면서 보이차는 드디어 그 진가를 드러냅니다.

청나라는 만주를 주 무대로 활동하던 여진족의 한 부족장이었던 누르하치가 세력을 확장하면서 부족들을 차례로 통합시켜 오늘날 요령성(遼寧省) 심양 부근인 흥경(興京)에 도읍을 정하고 국호를 후금(後金)이라 붙여서 건국한 나라입니다.

나라를 세운 태조 누르하치는 문화적으로 열등했던 자신들을 깔보는 명나라와 조선 등과 주변 부족장들의 극심한 반발을 진압하고 달래느라 많은 고초를 겪어야 했습니다.

누르하치(천명제,1559~1626, 재임 1616~1626)는 왕이 된 후에도 전쟁터를 누비면서 전투를 지휘했던 장수이기도 했습니다.

그는 1626년, 명나라를 정복하기 위해 명나라로 들어가는 길목이랄 수 있는 영원성(寧遠城) 전투에 참전하여 명나라 장수였던 원순환과 맞붙었으나 패배하면서 심한 부상을 당해 명나라 정복의 꿈을 후세에게로 미룬 채, 전장(戰場)에서 숨을 거둡니다.

제 2대 태종(숭덕제, 1592~1643, 재위 1626~1643)은 청의 입장에서 볼 때 많은 업적을 남긴 황제였습니다.

그는 재임 중이던 1636년도에 국호를 청(淸)으로 바꾸었고, 조선을 2차례나 침략하여 우리나라를 짓밟고 우리 역사에 치욕을 안긴 사람이기도 합니다.

그는 자신이 목표로 삼았던 명나라를 복속시키는데 걸림돌이었던 조선을 먼저 제압하기 위하여 정묘호란(인조 5년, 1627년 3월 ~5월)을 일으켜 형제국가의 예를 갖추는 조건으로 철군합니다만, 불과 2개월 남짓한 전쟁에서 입은 피해는 임진왜란 7년 동안의 피해를 능가할 정도로 조선이 입은 피해는 실로 막심했다고 전합니다.

그러다가 조선이 명나라와의 관계를 의식해서 후금과의 관계를 소흘히 하자 1636년 12월에 다시 군사를 일으켜 황제가 직접 조선을 침략하였습니다.

조선의 16대 임금이었던 인조는 청나라의 압도적인 군사력에 밀려 일단 남한산성으로 피신한 후 결사항전의 의지를 다지기도 하였으나 군량미와 군사력의 열세를 극복하지 못한 채 1637년 1월 30일, 삼전도(지금의 잠실 부근)로 하산하여 청나라 제 2대 황제인 홍타이지에게 굴욕적인 삼배구고두례(三拜九叩頭禮) 의식을 올리고 군신(君臣) 관계를 맺음으로써 전쟁은 끝이 났습니다.

조선을 굴복시킨 청 태종은 52세가 되던 1643년에 뇌출혈로 갑작스럽게 사망합니다.

태종이 사망하자 그의 5살 난 아들인 순치제(세조, 1638~1661, 재임 1643~1661)가 황제의 자리에 오릅니다.

당시 명나라는 북동쪽으로는 청나라가 급격하게 세력을 키우는 중이었던 데다 폭정에 불만을 품은 백성들이 각지에서 반란을 일으키는 바람에 큰 혼란을 겪고 있었는데 그 중에서도 섬서성 연안의 역졸(驛卒) 출신이었던 이자성(李自成)은 세력이 가장 강했던 반란군이었습니다.

이자성은 1644년, 북경을 함락시켜 자신이 대권을 잡을 수 있는 절호의 기회를 가졌으나 산해관(山海關)을 지키던 명나라 장수인 오삼계(吳三桂)가 청나라에 투항한 후 청나라 군을 이끌고 이자성의 반란군을 격파함으로써 청나라는 큰 출혈도 없이 명나라를 접수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세조는 약체(弱體)였던 데다가 심혈관질환에 시달리다가 23살 나이에 요절하고 말았습니다.

겉으로 드러난 세조의 질병은 천연두였지만 이 질환 역시 면역력이 부족한 사람들에게 잘 걸리는 병이었습니다.

제 2대 황제인 태종이 뇌출혈로 사망한데 이어 제 3대 황제인 세조도 20대 초반에 요절하는 등 황실의 사람들이 심혈관계 질환과 면역력 부족 등으로 많은 질병에 노출된 것은 인과관계가 확실히 드러났습니다.

원래 여진족은 만주 벌판에서 산야를 누비며 사냥을 주업으로 생계를 유지하던 민족이었는데 갑자기 중원을 지배하는 계층으로 신분이 급상승 하다보니 운동량은 절대적으로 부족한 상황에서 지나친 육식과 도를 넘는 방사(房事) 등으로 황실에서 일하는 사람들의 건강이 크게 위협받는 처지가 되었던 것이었고, 이로인해 어의(御醫:궁궐 안에서 임금이나 대신들을 돌보는 의사)들은 비상이 걸리게 됩니다.

그렇다고 황제나 대신들에게 식사를 제한하거나 운동, 방사 등 금욕을 강요할 수도 없었기에 "어의"들의 고충도 컸을 터였습니다.

그런 상황에서 어의들은 변방인 운남성 산골에서 생산되는 보이차가 심혈관질환의 원인물질인 콜레스테롤을 없앤다는 사실을 경험으로 터득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현대 과학으로 밝혀진 사실이지만 콜레스테롤을 화학식으로 쓴다면 CH(탄소와 수소의 결합)입니다.

보이차의 주성분인 폴리페놀을 같은 방법으로 쓰게되면 OH‐로서 수산기가 됩니다.

콜레스테롤 수치가 정상을 벗어나는 분들이 보이차를 음용하게 되면 장(腸)에서 혈관 속으로 흡수된 OH‐가 혈관 속에 있던 콜레스테롤(CH)을 만나자마자 화학반응을 일으켜 H²O로 되면서 콜레스테롤이 녹아버리고 C(탄소)는 방귀가 되어 체외로 배출됩니다.

혈액이 맑아지는 이치가 그렇습니다.

이런 사실을 알아낸 "어의"들이 보이차의 생산지에 관리들을 파견하여 이른 봄에 나오는 햇 차를 수거하여 황실에 공물(貢物)로 바치게 하였고, 이러한 사실들이 백성들에게 널리 알려지게 되면서 보이차는 심혈관질환에 특효라는 소문이 나게 되었던 것입니다.

이런 연유로 보이차는 현재 중국을 넘어 전세계적으로 유명세를 타게 되었고, 감비차(減肥茶)라는 별칭까지 덧붙여지면서 그 성과를 드높이고 있습니다.

배대열 칼럼니스트 BDYTYY@nvp.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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