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뉴시스 제공.
사진=뉴시스 제공.

서울에는 흔히 4대문이라 부르는 건축물이 있습니다.

조선은 명나라 요동지방을 정벌하러 가던 중 위화도에서 회군한 이성계가 1392년 개경(현재의 개성)에서 역성혁명(易姓革命:왕조가 바뀜)을 성공시킴으로써 창건된 나라입니다.

고려왕조를 무너뜨리고 새로 정권을 잡은 이성계는 개경의 지력이 이미 그 세를 다했다는 성리학자인 정도전의 건의를 받아들여 집권 3년 차 되던 1394년에 한양으로 천도(遷都:수도를 옮김)를 단행합니다.

고려시대의 불교가 지나치게 정치에 개입하고 타락함으로써 여러 부작용이 있었다는 것을 알고있던 이성계는 뼛속까지 철저한 유학자였던 정도전의 영향으로 숭유배불(崇儒排佛:유교를 숭배하고 불교를 배척함)정책을 실시하게 됩니다.

도성의 공사가 한창 진행되고 있던 중에 새로 세워지는 도읍지의 권위를 세우고 외적의 방어를 위해 궁전이었던 경복궁을 중심으로 사대문을 세우게 됩니다.

정동(正東)방향에 흥인문(興仁門)을 신축(1396~1397)하고 정서(正西)에는 돈의문(敦義門)을 세웁니다.

또한 정남(正南)에는 숭례문(崇禮門)을 짓고, 정북(正北)에는 숙청문(肅淸門)을 건축했습니다.
*숙청문은 대문의 형식을 갖추지 못하고 있다가 1504년(연산군 10년)에 이축하게 되었으며 중종 이후에는 숙정문(肅靖門)으로 이름이 바뀝니다.
그러다가 1715년(숙종 41년)에  홍지문(弘智門)이 신축됨으로써 북대문의 기능을 대신하게 됩니다.

그리고 경복궁 앞의 중심에는 1396년도(태조 5년)에  보신각(普信閣)을 세웠습니다.

궁궐을 중심으로 사방의 4대문과 중앙에 있는 보신각의 명칭에 붙은 인의예지신(仁,義,禮,智,信)이란 글자는 유교의 핵심적인 덕목이라는 점에서 조선이 얼마나 유교사상을 중시했는지를 알 수 있게 합니다.

이는 음양오행(陰陽五行)의 법칙과도 통하는데 기본이 되는 상생상극(相生相克)의 원리도 철저히 도입해서 건축지점을 정하고 건축물의 구조와 이름까지도 세심하게 살폈다는 점에서 선조들의 지혜를 엿볼 수 있습니다.

지금은 옛 건축물의 본래 이름보다는 건축물의 위치에 따라 흥인문을 동대문으로, 돈의문을 서대문으로, 숭례문을 남대문으로 부르는 일이 잦지만 우리 선조들이 남기신 문화유산의 배경 이야기 정도는 알아두는 것도 좋을 듯 싶어서 글을 씁니다.

유교사상에서 동쪽은 인(仁)을 상징하기에 흥인문이라 지었고 우리는 동대문이라 부릅니다.

의(義)는 서쪽을 의미하기에 돈의문(敦義門)으로 이름 지었지만 1915년 일제에 의해 철거되면서 지금은 그 터만 표시되어 있습니다.

원래 돈의문은 경희궁 서쪽에 있었기에 서전문(西箭門)으로 불렸었지만 1422년(세종 4년)에 원래 위치보다 남쪽 지점에 새로 건물을 지어 돈의문(敦義門)으로 부르게 되었답니다.

돈의문을 우리는 서대문으로 부르고 있습니다.

자주 접하는 "신문로 1가(新門路一街)"나 "새문안교회"등은 원래 서전문을 헐고 돈의문을 세우게 되자 새롭게 문이 생겼다는 의미에서 인용하여 이렇게 부르고 있는 것입니다.

남대문이라고 불리는 숭례문은 1398년(태조 7년)에 완성된 건물입니다.

숭례문의 예(禮)는 오행(五行)에서 화(火)에 해당합니다.

한양을 둘러싼 지형을 살펴보면 관악산은 화(火)에 해당되어 궁궐인 경복궁에 화가 미칠 수 있기에 대문을 건축하고 그 대문의 이름을 숭례문(崇禮門)이라 지었는데 흥인문(후에 흥인지문으로 개칭함)이나 다른 건축물은 가로로 글자를 새겨 현판을 달았지만 일반적인 형태를 벗어나 유독 숭례문(崇禮門)은 세로로 현판을 새긴 이유도 흥미롭습니다.

그것은 관악산의 화기가 경복궁에 도달하지 못하게 현판을 불꽃이 타오르는 모습인 세로로 만듦으로써 일종의 맞불 형태가 되게하여 경복궁을 보호하는 역할을 하게 했다는 뒷 이야기가 전해집니다.

북대문 격인 숙청문(肅淸門)은 대문의 형식을 갖추지 못하고 지어진 건축물이었는데 1504년(연산군 10년)에 이축하였고, 중종 이후에는 숙정문으로 불렸습니다.

숙청문은 풍수지리설에 의거 북쪽이 음(陰)에 해당하기에 이 북대문을 개방하면 음기(陰氣)가 왕성하여 도성 안의 부녀자들이 풍기문란을 일으킬 소지가 있다하여 북대문은 인마(人馬)의 통행을 금지시킨 채 항상 닫아두었다고 전합니다.

훗날인 1715년(숙종 41년) 홍지문(弘智門)이 건축되어 북대문의 역할을 대신하게 됩니다.

그리고 경복궁 지근거리에 1396년(태조 5년) 보신각(普信閣)을 세우게 되는데 보신각에는 커다란 종을 걸어서 국가적인 행사 등이 있을 때 종을 쳤다고 합니다.

이 보신각으로하여 종로(鍾路)니 종각(鍾閣)이니 하는 지명이 생겨난 것으로 유추됩니다.

위에서 살펴본 바대로 조선은 철저히 유교정신에 바탕을 두고 설계되어졌던 나라임을 알 수 있습니다.

4대문과 중앙에 위치한 보신각의 명칭에 "인의예지신"이란 유교의 핵심적인 덕목이 두루 쓰여졌다는 점에서도 이는 충분히 확인되는 것입니다.

배대열 칼럼니스트 BDYTYY@nvp.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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