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뉴시스 제공.
사진=뉴시스 제공.

(주)유경덴탈워크 창립 20주년을 축하드립니다. 

필자는 지난 토요일 주)유경덴탈워크 창립 20주년을 맞아 김제 문화예술회관 대공연장을 찾았습니다. 

회사 창립 20주년을 기념하여 그동안 전 직원이 2년여 동안 함께 준비한 합창 공연이 있었습니다. 

김제 문화예술회관 대 공연장 전 좌석 500여석이 꽉 들어찬 열기 가운데 감동적인 콘서트가 이곳을 찾은 많은 김제시민과 관객들에게 눈물과 감동을 선사 하였습니다. 

시종일관 눈과 귀 가슴을 뜨거운 감동의 도가니로 몰아넣는 이처럼 아름다운 휴먼 감동적인 공연이었습니다.

회사의 전 직원 60명의 합창단으로 구성된 콘서트는 이제까지 국내 그 어디에도 없었습니다. 

유경 대표의 감동적인 인간 승리의 삶을 이해한다면 감동의 콘서트가 더욱 빛을 발할 것입니다. 

대학입시 시험에 우수한 성적을 거두고 약학대학 입학 문턱에서 장애인이라는 편견으로 좌절을 겪었으나 인간 승리의 모습을 보여준 유경덴탈워크 대표인 유 경 대표님을 소개합니다. 
 
소녀는 소아마비라는 병으로 또래 친구들처럼 뛰어 놀 수도 없었고 다른 삶을 살았습니다. 

소녀는 걸을 수가 없어 나이가 8살이 되었어도 학교에 입학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러나 슬퍼하거나 부모님께 불평하지 않았습니다.

언젠가는 나도 스스로 걸을 수 있다는 희망과 믿음을 가져보았습니다. 

하반신이 불편한 소녀는 몸을 가누지 못하여 넘어지고 또 넘어지는 불편함을 매번 겪어야 했습니다.

몸이 불편하니 마음까지도 더욱 나약해져 갔습니다. 

소녀는 6남매중 둘째로 태어났습니다. 

그중에 소아마비로 장애인이 되었으나 부모님은 소녀를 절대 특별하게 생각하거나 더 강하게 보살피지도 않으셨습니다. 

부모님은 공무원으로 맞벌이를 하셨고 형제 자매들이 모두가 학교에 등교하게되면 집에는 소녀와 할머니만 남았습니다. 

학교를 다닐 수 없었던 소녀가 할 수있는일은 빨래를 갠다거나 물건을 정리하는 일을 하였습니다. 

집밖으로 나가는것은 생각이나 엄두도 내지 못했습니다.

혼자서는 절대 나갈 수 없었기 때문이었고 엄마가 등에 업어주시어 세상 구경을 간혹 할 수 있었습니다. 

처음 등에 업혀 밖을 나갔을 때 처음으로 또래 아이들을 볼 수가 있었고 바깥공기를 마실 수 있었습니다.

하루종일 집에만 있던 소녀는 학교에서 동생이나 언니가 오기만을 기다렸습니다. 

그래야 등에 업히어 바깥구경을 한번이라도 더 나갈 수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소녀는 글을 배우지 못하여 한글을 전혀 몰랐습니다. 

어느 날 부모님께서는 하루종일 집에만있는 딸을 위해 동화책을 사오셨습니다. 

그리고 언니가 주일학교에 나가 주기도문을 외워오라는 교회 선생님의 숙제에 소녀도 따라서 주기도문을 외우고 싶어졌습니다. 

엄마와 언니가 주기도문을 읽어주면 소녀는 그 소리와 글씨를 비교해 가며 무조건 외웠습니다. 

그렇게 무작정 외우다보니 어느 새 한글을 깨우치게 되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소녀에게 주기도문을 외우던 중 지혜를 주시어 한글을 깨우치게 하셨나 봅니다. 

그 뒤로는 무엇이든지 읽을 수 있었고 동화책을 닳도록 읽기도 하였으며 형제들의 교과서를 들춰보았고 한번도 보지 못한 수학문제도 골똘히 풀어보기도 하였습니다. 

어머니는 소녀에게 "남을 돕고 살아야한다"라는 말씀을 귀에 박힐정도로 말씀하셨고 소녀 또한 어머니의 말씀에 순종하리라 생각했습니다. 

소녀는 처음으로 14살의 나이에 보조기를 양발에 착용하였습니다. 

온 몸이 아프고 양발 끝에서부터 조여오는 느낌이 금세 몸 전체로 고통이 전해졌습니다. 눈물을 뚝뚝 흘리며 참아야 했습니다. 

보조기를 착용하고 목발로 걷는 건 너무나 힘든 과정이었지만 무던히도 걷는 연습을 많이하였습니다.

그렇게 걷게되면서 소녀는 어느 덧  열 다섯살이 되었고 처음으로 초등학교에 가서 6학년 수업을 청강생으로 들을 수 있었습니다. 

정상적인 소녀의 또래 친구들은  중학고 2학년이었지만 15살의 나이에 처음으로 6학년 교실의 학교라는 곳을 가보았습니다. 

정식으로 입학을 한 건 아니었지만 소녀에게는 큰 희망과 꿈이 용솟음쳤습니다. 

새로운 세상에 다시 태어난 느낌이었습니다. 

또래보다 2살 아래인 학교친구들과 잘 어울렸고 비록 청강생이었지만 선생님께서 잘한다고 상을 따로 만들어 주셨습니다. 

소녀는 검정고시를 거쳐 그후 신태인 여중과 여고를 우수한 성적으로 졸업하였습니다. 

그리고 대학입시에 약대를 지원하여 우수한 성적을 거두었으나 면접에서 장애인의 몸으로는 "수업불능" 이라는 불합격 통보를 받고 좌절감을 맛보았던 것입니다. 

이렇게 소녀의 인생은 약사의 꿈을 접고 다시 새로운 대학을 찾아야 했습니다. 

그러다 우연히 언니가 친구아버지 "치기공과"에 대해 말씀하시는 걸 듣고 집에 이야기를 하였습니다. 

생소한 이름이었고 정보도 없었던터라 어머니는 직접 대학의 치공기과 교수님들을 만나보시어 상담결과 입학이 가능하니 지원해도 된다는 답변을 들었습니다. 

그리고 다음 해에 다시 대학을 치르고 원광보건대학 치기공과에 장학생으로 입학 할 수 있었습니다. 

당시 약대에 면접을 보러가는 도중에 치과대학 학생을 만난적이 있었습니다. 

면접 안내를하던 치과재학생은 무슨과에 면접을 왔느냐고 물었습니다.

"약대에 왔습니다" ᆢ했더니 "치과대학으로 오시지 그랬어요"?하는 것이었습니다. 약대와 치대가 같은 날 면접이었던 것입니다. 

그랬던 소녀가 지금은 치아 보철물을 만들고 치과의사들과 일감을 주고 받는 거래관계가 되었다는게 웃기고 신기할 뿐입니다. 

소녀는 장애를 가졌기 때문에 보통사람의 앉은키 정도의 작은 키를 가졌습니다. 

학창시절 체육시간은 운동장 한켠 그늘에 앉아 친구들의 체육활동을 물끄러미 바라보아야 했습니다. 

소녀는 치공기과에서 열심히 공부하여 1차 필기시험과 2차실기 시험을치르고 드디어 국가고시 자격증을 손에 쥐었습니다. 

치과기공소는 당시 흔하지 않았기 때문에 취업하는것이 어려웠고 다리가 불편한 소녀는 자신감이 떨어졌습니다. 

그러나 운좋게 3개월 무보수 실습을 거친 후 정식 입사 할 수 있었습니다.

처음에는 선배를 돕는 어시스트로 일을 시작하였고 그 직장에서 7년동안 성실하게 일하였습니다. 

소녀는 장애인도 오토매틱 면허를 딸 수있다는 광고를 보게되었고 "반드시 따고야 말겠다 "라는 희망에 부풀었습니다. 

택시와 버스를 탈때마다 느끼는 불편은 이루 말 할 수 없었습니다. 

필기시험은 한번에 합격하였으나 코스에서 4번 주행에서 3번 도합 7번이나 떨어지고 8번째 도전에 면허증을 취득할 수 있었습니다.

그야말로 7전8기의 도전으로 운전 면허증의 꿈을 이루었습니다. 

소녀가 타는 차는 조금 특별합니다. 

핸들 왼쪽에 브레이크와 엑셀이 스틱으로 달려있는 저의 맞춤형 자동차입니다. 

키가 너무 작아 스티로폼을 잘라 만든 방석에 앉아 꿈도꾸지 못했던 운전을 합니다. 

그동안 몸이 불편하여 가보지 못했던 곳의 딴 세상으로 소녀는 마음껏 날아다녔습니다. 

소녀는 새로운것에 대한 도전을 생각하였습니다. 

바로 캐나다 치과 기공사 면허증을 취득하는 과정의 수업을 기초이론부터 6개월동안 마친 후 캐나다 현지로 국가시험을 보러갔습니다. 

낯선 캐나다에 도착하여 덴처리스트 교육을 현지에서 받고 곧바로 시험을 보았습니다. 

치과용 침대에 눕혀 직접 보철물 제작을 하는 시험이었고 이어서 세균관리와 처치에 대해서도 시험 감독관은 눈여겨 보았습니다. 

소녀는 시험에 합격하였고 면허증을 받고 기쁜 마음으로 귀국하였습니다. 

덴처리스트 자격증은 캐나다에서는 틀니를 제작하여 환자에게 직접 시술하는 면허증을 말합니다. 

그러나 우리나라에서는 모든 치과 의료행위는 오직 치과 의사선생님만 할 수  있지만 그 자격증은 기공소에서 주문받은 보철물 제작하는데 큰 도움이 되고있습니다. 

소녀는 3명의 직원들과 함께 김제 우석병원 앞에 "유경덴탈워크"라는 사업자를 내고 치과기공소 문을 열었습니다. 

사업장을 내고 목발을 짚으며 일일이 치과의원을 찾아 영업을 하였습니다.

사업의 일감은 늘어났고 매출도 상승하였습니다. 

소녀는 기공소를 운영하면서 모든 기업들이 추구하는 회사의 최대의 이윤보다는 적당한 이윤과 직원들의 최대행복이 우리회사의 목표라고 생각하였습니다. 

최대의 이윤을 생각하고 욕심이 지나치다보면 문제가 생기고 자칫 치과 의사들과의 믿음과 신뢰에도 금이가기 때문에 욕심을 부리지 않았습니다. 

이러한 믿음과 신뢰는 치과의사들 사이에 소문이났고 어느 덧 100여개 이상의 치과병원 거래처가 생겨났고 직원의 수는 60명으로 불어 났습니다. 

2년넘게 믿고 거래했던 치과병원의 외상 매출이 쌓여갔지만 어느 날 문을 닫고 떠난 일부 치과에 큰 돈을 떼이기도 하였지만 대부분의 좋으신 치과원장님들의 한결같은 거래에 깊은 감사를 드립니다. 

소녀는 모교인 원광보건전문대학 후배들을 위해 매년 장학금을 지급하고 있습니다.

장학금을 받은 후배가 졸업을 하고 우리 회사에 근무를 합니다. 

환자의 보철물을 만들지만 우리는 제품이 아닌 작품이라고 말하고 직원들과 작품 전시회를 열기도합니다. 

누가 작품을 최고로 잘 만드는지를 평가하여 시상도 하고 고객들에게 최고의 작품을 선사하기위해 부단한 노력과 연구를 하고 있습니다. 

김제에 신사옥을 신축하고 직원들과 한 가족으로 고객의 건강한 치아를 위하여 최선을 다하고 있습니다. 

유경덴탈워크의 유 경 대표는 5척도 안되는 작은키로 목발을 의지하며 평생을 건강하게 살아왔습니다. 

도서출판  "더클" 에서 출판한 "거꾸로 걷는 CEO"라는 책을 유경대표는 출간하고 벤처기업으로 급 성장을 하고 있습니다. 

"거꾸로 걷는 CEO" 책 제목은 유경대표가 계단을 올라갈 때 반대로 서서 목발에 힘을주고 동시에 두발을 계단에 올려놓기를 반복하며 

"앞으로 가기위해 뒤로걷는 " 당당하게 전진하는 모습을 제목으로 삼았습니다. 

앞으로 올라가다가는 자칫 뒤로 넘어질 수가 있어 계단은 거꾸로 올라갑니다. 

책을 읽으신 많은 사람들은 감동과 함께 자기자신을 뒤돌아보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몸은 비록 중증의 장애인이지만 결코 장애가 부끄럽거나 비겁하지 않았습니다. 

호남에서는 최고의 매출과 직원수만 무려 60명으로 회사는 성장하였고 치과 기공계에서는 대기업으로 불리워지는 유경 대표의 인간 승리는 많은 일반인들에게 시사하는바가 아주 큽니다. 

유 경 대표는 어렸을 때 소아마비를 앓은 장애인의 몸으로 마침내 인간 승리를 이루었습니다. 

비록 몸은 불편하지만 일반인 보다 훌륭한 일을 해내는 자랑스런 인간승리가 우리들에게 시사하는 바가 아주 크다 할 것입니다. 

만약 유경대표가 소아마비 장애인이 아닌 정상인이었다면 얼마나 더 크게 성공했을까 생각을 해 봅니다. 

반대로 몸과 마음이 멀쩡하기만 한 우리는 그동안 무엇을 했는지 부끄럽기만 합니다. 

내 몸이 조금만 불편해도 게을러 쉽게 자포자기하는 연약한 사람이 되지 않아야 하겠습니다. 

우리는 건강한 장애인이 되지 않도록 노력해야 할 것입니다. 

만약 유경대표가 자신의 육체의 한계를 탓하면서 정상인과 자신을 비교하며 열등감과 좌절속에서 살아갔다면 어떻게 되었을까요? 

장애의 한계를 극복하고 성공했기 때문에 많은 사람들에게 희망을 주고 존경을 받고 있습니다. 

유경대표의 회사는 어느 덧 창립 20주년이 되었습니다. 

평소 음악을 좋아하여 노래부르기를 즐기는 유경대표는 전 직원을 합창단으로 구성하였고,  지난 토요일 드디어 김제 문화예술회과 대공연장에서 화려한 감동의 콘서트를 열었습니다. 

그야말로 우리의 심금을 울리는 감동스토리가 아닐수 없습니다.

이형권 칼럼니스트 leehyung@nvp.co.kr

 

※ 외부 필진의 글은 본지 편집방향과 일치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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