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뉴시스 제공.
사진=뉴시스 제공.

대학입시 시험에 우수한 성적을 거두고 약대입학 문턱에서 장애인이라는 편견으로 좌절을 겪었으나 인간 승리의 모습을 보여준 유경덴탈워크 대표인 유경대표님을 소개합니다. 

모대학의 약대시험을 치르고 면접을 보러갔습니다. 3명의 면접 교수님이 일반적인 면접 질문을 하였습니다. 교수님들의 질문에 성심껏 대답하였습니다. 

대학입학 학력고사 시험을 자신있게 치르고 수석아니면 차석을 생각하는 높은 점수였기에 면접을 마지막으로 최종 합격자 발표만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저의 마음은 한껏 부풀어 올랐고 꿈에 그리던 대학생활을 꿈꾸었습니다. 

그리고 며칠 후 저는 "불 합격" 통보를 받았습니다. 저는 하늘이 무너졌습니다.
그럴리가~ 그럴리가 없는데~ 어머니와 저는 도저히 이해 할 수가 없었고 학교에 찾아가 이의신청을 하였습니다. 

불합격의 내용을 알기 위해서였습니다. 불합격 이유는 의외로 간단하였습니다. 면접에서 F 점수를 받았다는 것 이었습니다. 

저와 어머니는 인정할 수 없었습니다. 도대체 어떤 이유로 면접에서 낙제 점수를 받았는지 따져 물었습니다. 

돌아온 충격적인 이유는 장애인의 몸으로  "수업불능" 이라는 제가 꿈꾸었던 약대 불합격 이유였습니다.

어린 나이였지만 이건 너무 불공정하다는 걸 단번에 알 수 있었습니다. 저는 모든 단체 생활도 가능했고 비록 장애를 가졌지만 얼마든지 이동 수업도 할 수 있었습니다. 

어머니의 강력한 학교측의 항의로 학교내에서는 교수회의가 열렸고 결과는 또다시 수업불능 이라는 불합격 통지였습니다. 

저는 어린마음에 큰 좌절감을 처음으로 겪었습니다. 

저는 2살때 소아마비를 앓았습니다. 지금은 생소한 단어로 바뀌었지만 당시에는 소아마비라는 병명을 가진 사람들이 많았고 죽기도 하였습니다. 

저는 소아마비라는 병으로 또래 친구들처럼 뛰어 놀 수도 없었고 다른 삶을 살았습니다. 

저는 걸을 수가 없어 제 나이가 8살이 되었어도 학교에 입학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러나 슬퍼하거나 부모님께 불평하지 않았습니다. 언젠가는 나도 스스로 걸을 수 있다는 희망과 믿음을 가져보았습니다. 

하반신이 불편한 저는 몸을 가누지 못하여 넘어지고 또 넘어지는 불편함을 매번 겪어야 했습니다. 몸이 불편하니 마음까지도 더욱 나약해져 갔습니다. 

저는 6남매중 둘째로 태어났습니다. 그중에 저는 소아마비로 장애인이 되었으나 부모님은 저를 절대 다르게 생각하거나 더 강하게 보살피지도 않으셨습니다. 

부모님은 공무원으로 맞벌이를 하셨고 형제 자매들이 모두가 학교에 등교하게되면 집에는 저와 할머니만 남았습니다. 학교를 다닐 수 없었던 저는 제가 할 수있는일은 빨래를 갠다거나 물건을 정리하는 일을 하였습니다. 

집밖으로 나가는것은 생각이나 엄두도 내지 못했습니다.혼자서는 절대 나갈 수 없었기 때문이었고 엄마가 등에 업어주시어 세상 구경을 간혹 할 수 있었습니다. 

처음 등에 업혀 밖을 나갔을 때 처음으로 내 또래 아이들을 볼 수가 있었고 바깥공기를 마실 수 있었습니다. 하루종일 집에만 있던저는 학교에서 동생이나 언니가 오기만을 기다렸습니다. 

그래야 등에 업히어 바깥을 한번이라도 나갈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저는 글을 배우지 못하여 한글을 전혀 몰랐습니다. 어느 날 부모님께서는 하루종일 집에만있는 저를 위해 동화책을 사오셨습니다.

그리고 언니가 주일학교에 나가 주기도문을 외워오라는 선생님의 숙제에 나도 주기도문을 외우고 싶었습니다. 

엄마와 언니가 주기도문을 읽어주면 저는 그 소리와 글씨를 비교해 가며 무조건 외웠습니다.

그렇게 무작정 외우다보니 어느 새 한글을 깨우치게 되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저에게 주기도문을 외우던 중 지혜를 주시어 한글을 깨우치게 하셨나 봅니다. 

그 뒤로는 무엇이든지 읽을 수 있었고 동화책을 닳도록 읽기도 하였으며 형제들의 교과서를 들춰보았고 한번도 보지 못한 수학문제도 풀어보았습니다. 

우리 세종대왕님이 한글을 쉽게 만들어주셔서 혼자 깨칠 수 있음에 감사드립니다. 

어머니는 저에게 "남을 돕고 살아야한다"라는 말씀을 귀에 박힐정도로 말씀하셨고 저 또한 어머니의 말씀에 순종하리라 생각했습니다. 

저는 처음으로 14살의 나이에 보조기를 양발에 착용하였습니다. 온 몸이 아프고 양발 끝에서부터 조여오는 느낌이 금세 몸전체로 고통이 전해졌습니다.
눈물을 뚝뚝 흘리며 참아야 했습니다. 

보조기를 착용하고 목발로 걷는 건 너무나 힘든 과정이었지만 무던히도 걷는 연습을 많이하였습니다. 넘어지면 다시 일어나고 ~ 

그렇게 걷게되면서 저는 어느 덧  열 다섯살이 되었고 처음으로 초등학교에 가서 6학년 수업을 청강생으로 들을 수 있었습니다. 정식으로 입학을 한 건 아니었지만 저에게는 큰 희망과 꿈이 용솟음쳤습니다. 

새로운 세상에 다시 태어난 느낌이었습니다. 또래보다 2살 아래인 학교친구들과 잘 어울렸고 비록 청강생이었지만 선생님께서 잘한다고 상을 따로 만들어 주셨습니다. 

저는 검정고시를 거쳐 그후 신태인여중과 여고를 우수한 성적으로 졸업하였습니다. 

그리고 대학입시에 약대를 지원하여 우수한 성적을 거두었으나 면접에서 장애인의 몸으로는 "수업불능" 이라는 불합격 통보를 받고 좌절감을 맛보았던 것 입니다. 

지금같아서는 말도 안되는 일이었습니다. 인권위에 제소한다면 지금같으면 학교측은 경고는 물론이고 장애인 단체와 인권단체에 뭇매를 맞았을 것 입니다. 

이렇게 저의 인생은 약사의 꿈을 접고 다시 새로운 대학을 찾아야 했습니다. 

그러다 우연히 언니가 친구아버지가 "치기공과"에 대해 말씀하시는 걸 듣고 집에 이야기를 하였습니다. 

생소한 이름이었고 정보도 없었던터라 어머니는 직접 대학의 치공기과 교수님들을 만나보시어 상담결과 입학이 가능하니 지원해도 된다는 답변을 들었습니다. 

그리고 다음 해에 다시 대학을 치르고 원광보건대학 치기공과에 장학생으로 입학 할 수 있었습니다. 

당시 약대에 면접을 보러가는 도중에 치과대학 학생을 만난적이 있었습니다.

면접 안내를하던 치과재학생은 무슨과에 면접을 왔느냐고 물었습니다. "약대에 왔습니다" ᆢ했더니 "치과대학으로 오시지 그랬어요" 하는 것이었습니다. 약대와 치대가 같은 날 면접이었던 것 입니다. 

그랬던 제가 지금은 치아 보철물을 만들고 치대를 졸업한 치과의사들과 일을 주고 받는 관계가 되었다는게 웃기고 신기합니다. 

저는 장애를 가졌기 때문에 보통사람의 앉은키 정도의 작은 키를 가졌습니다. 학창시절 체육시간은 운동장 한켠 그늘에 앉아 친구들의 체육활동을 지켜보아야 했습니다. 

저는 치공기과에서 열심히 공부하여 1차 필기시험과 2차실기 시험을 치르고 국가고시 자격증을 손에 쥐었습니다. 

치과기공소는 당시 흔하지 않았기 때문에 취업하는것이 어려웠고 다리가 불편한 저는 자신감이 떨어졌습니다. 

그러나 운좋게 3개월 무보수 실습을 거친 후 정식 입사 할 수 있었습니다. 처음에는 선배를 돕는 어시스트로 일을 시작하였고 그 직장에서 7년동안 성실하게 일하였습니다. 

저는 장애인도 오토 면허를 딸 수있다는 광고를 보게되었고 "반드시 따고야 말겠다 "라는 희망에 부풀었습니다. 택시와 버스를 탈때마다 느끼는 불편은 이루 말 할 수 없었습니다. 

필기시험은 한번에 합격하였으나 코스에서 4번 주행에서 3번 도합 7번이나 떨어지고 8번째 도전에 면허증을 취득할 수 있었습니다. 그야말로 7전8기의 도전으로 꿈을 이루었습니다. 

제가 타는 차는 조금 특별합니다. 핸들 왼쪽에 브레이크와 엑셀이 스틱으로 달려있는 저의 맞춤형 자동차입니다. 키가 너무 작아 스티로폼을 잘라 만든 방석에 앉아 꿈도꾸지 못했던 운전을 합니다. 

그동안 몸이 불편하여 가보지 못했던 곳의 딴 세상으로 저는 마음껏 날아다녔습니다. 

저는 새로운것에 대한 도전을 생각하였습니다. 바로 캐나다 치과 기공사 면허증을 취득하는 과정의 수업을 기초이론부터 6개월동안 마친 후 캐나다 현지로 국가시험을 보러갔습니다. 

낯선 캐나다에 도착하여 덴처리스트 교육을 현지에서 받고 곧바로 시험을 보았습니다. 치과용 침대에 눕혀 직접 보철물 제작을 하는 시험이었고 이어서 세균관리와 처치에 대해서도 시험 감독관은 눈여겨 보았습니다. 

저는 시험에 합격하였고 면허증을 받고 기쁜 마음으로 귀국하였습니다. 

덴처리스트 자격증은 캐나다에서는 틀니를 제작하여 환자에게 직접 시술하는 면허증을 말합니다. 

그러나 우리나라에서는 모든 치과 의료행위는 오직 치과 의사선생님만 할 수 있지만 그 자격증은 기공소에서 주문받은 보철물 제작하는데 큰 도움이 되고있습니다. 

저는 3명의 직원들과 함께 김제 우석병원 앞에 "유경덴탈워크"라는 사업자를 내고 치과기공소 문을 열었습니다. 

사업장을 내고 목발을 짚으며 일일이 치과의원을 찾아 영업을 하였습니다. 사업의 일감은 늘어났고 매출도 상승하였습니다.

저는 기공소를 운영하면서 모든 기업들이 추구하는 회사의 최대의 이윤보다는 적당한 이윤과 직원들의 최대행복이 우리회사의 목표라고 생각하였습니다. 

최대의 이윤을 생각하고 욕심이 지나치다보면 문제가 생기고 자칫 치과 의사들과의 믿음과 신뢰에도 금이가기 때문에 욕심을 부리지 않았습니다. 

이러한 믿음과 신뢰는 치과의사들 사이에 소문이났고 어느 덧 100여개 이상의 치과병원 거래처가 생겨났고 직원의 수는 65명으로 불어 났습니다. 

2년넘게 믿고 거래했던 치과병원의 외상 매출이 쌓여갔지만 어느 날 문을 닫고 떠나 큰 돈을 떼이기도 하였지만 대부분의 좋으신 치과원장님들의 한결같은 거래에 깊은 감사를 드립니다. 

저는 모교에 후배들을 위해 매년 장학금을 지급하고 있습니다. 장학금을 받은 후배가 졸업을 하고 우리 회사에 근무를 합니다. 

환자의 보철물을 만들지만 우리는 제품이 아닌 작품이라고 말하고 직원들과 작품 전시회를 열기도합니다. 

누가 작품을 최고로 잘 만드는지를 평가하여 시상도 하고 고객들에게 최고의 작품을 선사하기위해 부단한 노력과 연구를 하고 있습니다. 

김제에 신사옥을 신축하고 직원들과 한 가족으로 고객의 건강한 치아를 위하여 오늘도 최선을 다하고 있습니다. 

유경덴탈워크의 유 경 대표는 5척도 안되는 작은키로 목발을 의지하며 평생을 건강하게 살아왔습니다. 

도서출판  "더클" 에서 출판한 "거꾸로 걷는 CEO"라는 책을 유경대표는 출간하고 벤처기업으로 급 성장을 하고 있습니다. 

"거꾸로 걷는 CEO" 책 제목은 유경대표가 계단을 올라갈 때 반대로 서서 목발에 힘을주고 동시에 두발을 계단에 올려놓기를 반복하며 "앞으로 가기위해 뒤로걷는" 당당하게 전진하는 모습을 제목으로 삼았습니다. 

앞으로 올라가다가는 자칫 뒤로 넘어질 수가 있어 계단은 거꾸로 올라갑니다. 

책을 읽으신 많은 사람들은 감동과 함께 자기자신을 뒤돌아보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몸은 비록 중증의 장애인이지만 결코 장애가 부끄럽거나 비겁하지 않았습니다. 

호남에서는 최고의 매출과 직원수만 무려 65명으로회사는 성장하였고 치과기공계에서는 대기업으로 불리워지는 유경 대표의 인간 승리는 많은 일반인들에게 시사하는바가 큽니다. 

저는 지난 글에 5살때 소아마비를 앓아 집안이 가난하여 약 한번 쓰지 못하고 중증 장애인으로 인간 승리를 한 동암학원 설립자이신 양복규 동암학원 이사장님의 살아온 삶을 올려 드렸었습니다. 

중증 장애인의 몸으로 어머니의 등에 업히어 논과 밭 한켠에서 하루종일 엄마의 품앗이 일 끝나기를 기다리다 온갖설움과 불편함을 이기고ᆢ 

약업사 시험에 당당히 합격하여 온갖 시련과 어려움을 이겨내고  마침내 장애인의 재활과 배움을위해 학교를 설립하고 한 평생을 장애인의 아버지로 불리워지며 훌륭한 인재를 많이 배출한 자랑스런 동암학원의 설립자 양복규 이사장님을 소개 해 드렸습니다. 

두 분은 어렸을 때 소아마비를 앓았다는것과 장애인의 몸으로 마침내 인간 승리를 이루었다는 공통분모를 가지고 있습니다. 

비록 몸은 불편하지만 일반인 보다 훌륭한 일을 해내는 자랑스런 두분의 인간승리가 마음이 장애인 우리들에게 시사하는 바가 아주 크다 할 것 입니다. 

만약 두분이 소아마비 장애인이 아니고 일반인이었다면 얼마나 더 크게 성공했을까 생각을 해 봅니다. 반대로 우리가 소아마비를 앓은 장애인이었다면 두분처럼 인간승리를 이루었을까 생각을 해 봅니다. 

내 몸이 조금만 불편해도 게을러  움직이지 않고 쉽게 자포자기하는 어리석은 사람이 되지 않도록 이글을 통하여 큰 자극제가 되어 새 힘을 내었으면 합니다. 

이형권 칼럼니스트 leehyung@nvp.co.kr

 

※ 외부 필진의 글은 본지 편집방향과 일치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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