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비전e] 위에서 학생들이 인용한 한시가 원 작자의 의도대로 읽혔는지 자신할 수는 없습니다. 어떤 시는 그렇다고 할 수 있고, 어떤 시는 전혀 다르게 읽었다고도 할 수 있습니다. 한시의 창작 정황에 비추어 분석하고 의미를 따지는 것은 분명 학습의 기본이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런 점에서, 우리의 ‘모험’은 위태롭습니다. 수백 년의 간극이 있는 옛 한시의 창작 순간과 21세기 한국의 대학생들이 놓인 상황이 같으리라고 생각하는 것은 더욱 위험합니다. 문명의 도구가 달라진 것은 말할 것도 없거니와 사람의 감성 역시 시간의 간극만큼이나 어긋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럼에도 그들 사이에 흐르는 감정의 보편성을, 유사성을 조금만이라도 확보할 수 있다면, 저는 대단히 성공적인 독해라고 생각합니다. 더욱이 그 시 읽기가 지금 우리가 만난 고난과 상처를 위로해줄 수 있다면, 참으로 다행스러운 일이 아닐 수 없을 것입니다.

사실 시는 대단히 매력적인 문학장르입니다. 보이지 않는 감정을 어렴풋하게 보여주고 나머지는 독자의 상상으로 채우라고 강요합니다. 그래서 정치적이기도 하고 신비롭기도 하며 모호하기 짝이 없습니다.

그런 불확실함이 못내 아쉽기도 하지만, 따지고 보면 세상사 무엇 하나, 사람 마음 어느 것인들 분명하고 확실한 것이 있던가요? 항용 시를 어렵다고 말하는 것도 이런 불확실성이 주는 모호함을 불편해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역설적으로 시는 인간적입니다. 인간의 마음을 이보다 더 정직하게 표현하는 방법은 없기 때문입니다. 특히 한시는 글자漢字 하나하나가 함축적일 뿐 아니라, 그 글자들이 놓이는 배열과 조직에 따라 다양한 상상을 자극하기에 더욱 인간적이라고 생각합니다.

우리 젊은이들은 힘겹지만 거기에 도전했습니다. 친구들의 고민을 경청하고, 이를 위로해줄 한시를 고른 뒤 다정하면서도 냉정하게 진심어린 충정으로 위로하고자 했습니다. 물론 위로는 궁극적인 대안은 아닙니다.

허나 위로받아 가라앉은 마음이 전진할 여유를 회복해 행복을 찾아낼 수 있다면, 이는 신의 한 수가 될 수 있습니다. 이들은 이 가능성을 놓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이들의 글을 읽어보면, 처음에는 밋밋하다가도 행간에 놓인 아름다운 우정을 볼 수 있습니다. 혈연도 지연도 학연도 넘어선 아름다운 정신인 우정, 이 마음이 꽃피우는 세상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과연 얼마나 목표에 도달했는지 확언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이제 희망이 쏘아졌다는 점입니다.

그닥 기껍지 않았던 강의시간, 그 속에서 어떤 울림도 주지 않은 채 흘려들었던 한시가 나의 삶을, 게다가 나의 마음을, 나아가 다른 사람의 삶과 마음도 위로하고 치유할 수 있다니! 뜻밖의 가능성을 만난 나는 기쁩니다.

그리고 걱정도 듭니다.

한시로 자신의 마음을 달랬던 청년들이 얼마나 성장했을까? 아니 더 나은 인간적 성숙을 이뤘을까?

사실 정신적 성숙은 순간에 이뤄지지 않습니다. 시 한 수로 인격적 성장을 보장할 수도 없습니다. 그러나 삶의 모멘텀이 될 수는 있습니다.

하많은 인생의 방향을 조절하는 것은 찰나의 선택과 감정에 달려있기 때문이지요. 앞으로 한동안은 같이 공부하고 서로 위로했던 이들을 마음에 두고 지켜봐야 할 듯합니다. 그들이 수없는 변곡과 질주를 통해서 아름다운 무늬를 이루는 모습을 보려구요.

어쩌면 우리가 같이 공부한 한시로 마음을 위로하고 치유하려는 궁극적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지 않을까 생각해 봅니다. 우리가 맺은 인간적 관계를 성실하고 지속적으로 유지하며, 나아가 정직한 신뢰에 바탕하여 상대가 희망을 찾아가는 아름다운 여정에 동반하기 위한 준비로서 말입니다.

 

◆ 김승룡 교수는...

부산대 한문학과 교수. 고려대에서 국문학을 전공하고 박사학위를 받았다. ‘지식 인’, ‘인간의 마음’, ‘로컬리티’ 등을 염두에 두고 《묵자》, 《사기》를 비롯해 한시 와 시화를 가르치며 고전지식이 마음을 위로하고 치유할 수 있음을 설파하고 있 다. 동아시아 한문고전의 미래가치를 환기하며 청년들에게 희망을 심어주려는 것 이나 한문교육이 인성을 증진할 가능성에 주목하는 것도 그런 노력의 일환이다.

저작권자 © 뉴스비전e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