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외 투자자 유치·IPO 절차 간소화로 자본시장 경쟁력 제고

동남아시아 주요 국가들이 잇달아 주식시장 개혁에 나서고 있다. 각국은 해외 투자자에게 더 편리한 환경을 제공하고, 기업공개(IPO) 절차를 간소화하는 등 자본 유입 확대를 위한 제도 개선에 속도를 내고 있다.
니혼게이자이신문은 10월 18일 보도를 통해 “동남아 시장이 선진국, 중국, 인도 등에 비해 자금 유치 경쟁에서 오랫동안 뒤처져 왔다”며 “최근 개혁 움직임은 이러한 격차를 줄이기 위한 것”이라고 전했다.
베트남의 재무장관 응우옌 반 승은 “지난 2년간 국가증권위원회가 국제 표준에 부합하는 증시 개혁을 추진해왔다”고 밝혔다. 베트남은 올해 외국 기관 투자자가 주식을 매입하기 전 자금을 미리 예치해야 하는 규정을 폐지해 투자 절차를 간소화했다. 이 조치 이후 일본 자본자산관리유한공사 등 해외 투자자의 문의가 눈에 띄게 늘었다.
세계은행은 만약 FTSE와 MINI 지수가 베트남 증시 등급을 상향할 경우, 2030년까지 최대 250억 달러의 해외 투자가 유입될 수 있을 것으로 전망했다.
개혁 움직임은 베트남에만 국한되지 않는다. 싱가포르 금융관리국은 8월 ‘주식시장 개혁 특별 태스크포스’를 구성하고 본격적인 제도 정비에 착수했다. 싱가포르 정부는 또 자국 주식 투자에 집중하는 펀드에 50억 싱가포르달러(약 39억 달러) 를 투입하기로 했다.
싱가포르 거래소는 IPO 절차 간소화에도 적극적이다. 거래소 측은 올해 8월 한 달 동안 30건 이상의 신규 상장 신청을 받았다고 밝혔다. 현지 금융권은 “새로운 주가지수를 바탕으로 지수 연동형 상품이 등장하면 시장 유동성과 기업가치 모두 상승할 것”으로 기대하고 있다.
태국과 말레이시아도 뒤따르고 있다. 태국 재무부와 증권거래소는 이달 초 ‘태국 자본시장 경쟁력 강화 이니셔티브’를 발표하며 상장 절차 간소화와 규제 완화를 약속했다. 말레이시아 증권거래소 역시 상장 승인 시간을 단축하고 기업 상장을 적극 독려하고 있다. 그 결과 올해 상반기 말레이시아는 IPO 건수와 조달액 모두 동남아 1위를 기록했다.
전문가들은 이러한 움직임의 배경에 달러 약세와 미국의 금리 인하 사이클이 있다고 분석한다. 모건스탠리의 대니얼 블랙 전략가는 “신흥시장 주식의 상대적 매력이 높아지면서 장기 자금이 아시아 시장으로 유입되고 있다”며 “동남아 시장의 개혁은 이를 가속화할 것”이라고 내다봤다.
과거 신흥시장은 불투명한 정보 공개와 복잡한 규제로 해외 투자자 진입이 어려웠다. 그러나 최근의 개혁 조치는 이러한 구조적 문제를 해결하려는 시도로 평가된다. 다이와자산운용의 김춘애 전략가는 “규제 완화와 지수 편입 확대는 유동성과 투명성을 높여 외국인 투자 신뢰를 강화할 것”이라고 말했다.
일본 도쿄증권거래소의 기업 지배구조 개혁 이후 일본 증시가 활력을 되찾은 것처럼, 이번 동남아의 변화도 아시아 전체 시장의 질적 성장으로 이어질 가능성이 크다는 분석이 나온다.
유럽계 자산운용사의 한 매니저는 “동남아는 경제성장과 인구 증가로 개인자산 관리 수요가 빠르게 늘고 있다”며 “해외 자금 유입은 민간 투자 성과를 높이고 장기적으로 연금 재정 부담을 줄이는 데 도움이 될 것”이라고 덧붙였다.
동남아에서는 최근 부유층 자산을 관리하는 ‘가족사무소(family office)’가 빠르게 증가하고 있다. 이 같은 변화가 이어진다면, 동남아는 더 이상 ‘무시된 시장’이 아닌 글로벌 자본의 새로운 중심지로 부상할 가능성이 있다는 전망이 나온다.
최규현 기자 kh.choi@nvp.co.kr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