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뉴시스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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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페인 기밀보는 10월 15일, 유럽연합(EU) 감사단의 최신 보고서를 인용해 유럽 전역에서 심각한 의약품 부족 사태가 이어지고 있다고 보도했다. 보고서에 따르면 2023년과 2024년에 걸친 의약품 품절은 역대 최악 수준에 도달했으며, 항생제, 심장병 약물, 항응고제, 해독제 등 136종의 주요 의약품이 부족한 상황이다.

유럽 대부분의 국가에서 항우울제, 항생제, 혈당강하제, 주의력결핍 과잉행동장애(ADHD) 치료제, 그리고 기본 진통제 등이 품절 상태를 보이고 있다. 각국의 상황은 다소 차이가 있다. 프랑스와 스페인은 항우울제 부족이 심각하고, 오스트리아와 불가리아는 혈당강하제와 아목시실린 부족으로 어려움을 겪고 있다. 리투아니아 등 동유럽 국가들은 긴급 수입에 의존하며 버티고 있다.

프랑스 의약품관리국(ANSM)은 2021년 이후 보고된 의약품 품절 사례 중 30%가 심혈관계 약물, 20%가 신경계 약물(파라세타몰 포함), 14%가 항생제에 해당한다고 밝혔다. 스페인에서는 2024년 당뇨병 치료제이자 체중 감량에 사용되는 세마글루타이드(Semaglutide)와 ADHD 치료제가 품절 사태의 중심이었고, 2025년에는 항우울제가 가장 큰 비중을 차지했다.

리투아니아와 불가리아 같은 중소 국가들은 상황이 특히 심각하다. 리투아니아 보건부는 “제약회사가 상업적 이유로 특정 국가에서 공급을 중단할 수 있다”고 인정했으며, 대응책으로 해외 포장 의약품 수입을 허용하고 라트비아, 에스토니아와 백신 공동 구매 협정을 체결했다.

불가리아는 수년째 약국 전반에서 약품 부족을 겪고 있으며, 유통업자들이 소피아에서 저가 약품을 구매해 서유럽으로 재판매하는 병행 수출이 사태를 악화시켰다. 이에 불가리아 정부는 2023년 11월부터 인슐린과 어린이용 항생제의 수출을 금지했고, 올해 9월에는 아목시실린 등으로 금지 범위를 확대했다.

불가리아 보건부는 제2형 당뇨병 치료제 엔글리세린과 다글리세린의 공급 부족률이 각각 14%, 11%에 달한다고 밝혔다. 일부 환자들은 약을 구하기 위해 국경을 넘어 그리스나 터키로 향하고 있으며, 페이스북 등 SNS에서는 시민들이 약을 교환하는 그룹이 생겨나 가짜 약을 구입할 위험도 커지고 있다.

EU 감사단은 이번 사태의 근본 원인으로 아시아 생산에 대한 높은 의존도, 소규모 시장의 낮은 수익성, 그리고 국가별로 분리된 행정체계를 꼽았다. 항생제, 항우울제, 만성 질환 치료제는 유럽 전역에서 가장 자주 품절되는 품목으로 나타났다. 감사단은 “기초 의약품일수록 부족하기 쉽다”며 “이는 유럽 공공보건 시스템의 구조적 취약성을 드러낸다”고 지적했다.

전문가들은 이번 위기가 단기적 공급난을 넘어 유럽의 의료 자립 구조에 대한 경고라고 분석한다. 프랑스 공중보건학자 장 마르탱은 “약품 부족은 병원 운영을 넘어 국민의 치료 접근성을 위협하고 있다”며 “EU 차원의 공동 생산과 비상 재고 시스템 구축이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의약품 공급난이 장기화될 경우, 유럽은 의료 주권 확보를 위한 근본적 전략 전환이 불가피할 것으로 보인다.

차승민 기자 smcha@nvp.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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