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뉴시스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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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어사전에서는 기적(奇跡)을 "상식으로는 이해할 수 없는 이상 야릇한 일"이라고 설명하고 있습니다.

역사적인 전쟁에서도 기적은 가끔 발생합니다. 

임진왜란은 조선 선조 25년(1592년)부터 선조 31년(1598년)까지 약 7년 동안 왜적의 침입으로 우리나라에서 일어난 전쟁입니다.

당시 조선은 건국 후 200년 동안 외적의 침입없이 평화가 유지되다보니 국방에 대해서는 소흘히 하다가 나라가 망하기 일보 직전까지 도달했던 국난의 순간을 맞기도 했습니다.

당시 전쟁의 명분은 일본이 "명나라를 치려고 하니 길을 빌려달라"는 것이었습니다.

이른바 "정명가도(征明假道)"를 빌미로 내걸었던 것입니다.

전쟁이 발발하기 9년 전인 1583년, 율곡 이이(李珥)는 왕을 찾아가 왜적의 침입이 예상되니 10만의 군사를 양성하고 군량미와 병기를 비축하자고 건의하지만 묵살 당합니다.

당파싸움에만 몰두해 있던 조정에서 이이의 상소에 누구도 관심을 갖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이렇듯 무방비 상태에서 1592년 4월, 잘 훈련된 군사 15만과 최신식 조총 등으로 무장한 왜병들이 부산포(釜山浦)로 침입합니다.

그들은 조선 땅에 상륙한지 20일 만에 파죽지세로 한양을 점령하고 북으로 진격을 계속하여 조선반도 전체를 쑥대밭으로 만들어 버립니다.

왜군이 몰려오자 선조를 비롯한 나라의 지도자들은 백성들을 팽개친 채 압록강 부근인 평안도 의주(義洲)로 피난을 떠나 버리지요.

수도가 함락되고 나라 전체가 백척간두의 위기에 처한 상황에서 조선의 군대는 거의 궤멸 상태를 맞습니다.

하지만 식량과 무기 등 전략물자를 실어나르는 수송로였던 해상에서는 이순신 장군의 활약으로 전쟁의 반전(反轉)을 일으키는 계기를 마련합니다.

이순신 장군께서는 옥포대첩(1592년 5월) 당포해전(1592년 6월) 부산포해전(1592년 9월) 등에서 연전연승을 거두고 왜군들에게는 공포의 대상으로 자리매김합니다.

그러다가 이순신은 52세 때인 1596년, 원균의 모함으로 아무 잘못도 없이 체포되어 조정으로 압송된 후 투옥됩니다.

하지만 우의정이었던 정탁(鄭琢)이 적극적으로 구명활동을 펼친 끝에 1597년, 극적으로 석방되어 삼도수군통제사의 직위에 복귀하지요.

수군통제사가 되어 부대로 돌아갔더니 상황은 처참 했습니다.

부상당하고 사기를 잃은 백 여명의 패잔병과 부서진 전함 12척이 전부였던 것입니다.

이순신은 낙담하지 않고 남아있던 수병들을 치료하고 훈련시키면서 전함을 정비하고 병력을 충원시킴과 동시에 무기도 만들었습니다.

예상대로 이순신이 복귀한지 얼마 지나지 않아 왜군들은 임진왜란의 패배를 설욕하고자 14만 여의 정예군을 이끌고 다시 조선을 침략하지요.

아무리 초능력을 가진 이순신 장군이라 할지라도 불과 몇 개월 사이에 전쟁준비를 완벽히 할 수는 없었을 터였습니다.

정유재란의 첫 전투는 명량(鳴梁)에서 벌어졌습니다.

이순신은 12척의 전함으로 왜병선 133척을 맞습니다.

객관적인 전력 만을 놓고 볼 때 이 싸움은 승패가 이미 결정된 전투였습니다.

중과부적(衆寡不敵)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 전투에 임한 장군의 마음가짐은 이랬습니다.

"소생에게는 아직 12척의 배가 있습니다"

그러면서 장군께서는 전투에 앞서 머뭇거리는 부하들에게 "필사즉생 필생즉사" (必死卽生 必生卽死)라는 비장한 결심을 밝힙니다.

"죽음을 각오하면 이기고, 살기를 작정하면 반드시 죽는다"라는 뜻으로 해석됩니다.

죽기를 각오하고 맞붙은 명량해전에서 우리 수군은 왜선 33척을 수장시키는 대승을 거두게 되지요.

이 전투는 왜군의 사기를 크게 꺾어버리고 전의를 상실케 하는 역할을 합니다.

명량해전(1597년 9월 16일)이후 소극적인 전략을 펼치던 왜병들은 1년 여 후인 노량해전(1598년 11월 18~19일)에서 치명타를 맞고 드디어 철수를 결정하게 되지요.

그러나 노량해전에서 이순신 장군께서는 가슴에 적탄을 맞고 운명하셨습니다.

적탄에 쓰러지는 순간에도 장군께서는 "나의 죽음을 알리지 마라"고 하셨는데 이는 장군의 죽음이 알려지면 적들의 사기를 북돋워 전황이 불리해질 것을 염려하신 것이었습니다.

노량해전에서 패한 왜군은 1달 여 후인 1598년 12월 16일, 드디어 철군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이순신 장군은 지금까지도 세계 해전사(海戰史)에 큰 별로 남아있는 유일한 한국인입니다.

배대열 칼럼니스트 BDYTYY@nvp.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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