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비전e] “건강한 몸에서 건강한 정신이 태어난다.”

이것은 내가 100년을 살아오면서 온몸으로 깨달은 생활철학이다. 학창시절은 물론 연구원, 공무원, 대학 교수, 학회장, 회사 간부 시절에도 결석이나 결근이 없었다. 꾸준한 체력관리와 부지런함은 나에게 건강을 허락했다.

우리집에는 세 가지 상비약이 있다. 치약, 모기약, 구두약이 바로 그것이다. 먹는 약이 없다는 얘기다. 이 얘기를 듣는 사람들은 어떻게 의사집안에 약이 하나도 없느냐고 반문하곤 한다.

한약이든 양약이든 약은 쓰면 쓸수록 부작용이 있다. 나의 쌍둥이 형도 약을 너무 많이 써 그 부작용으로 더 큰 병을 얻게 되어 안타깝게 젊은 나이에 세상을 떠났다.

병은 몸이 약해져 걸리는 것이며 병이 낫는 것은 의사나 약 때문이 아니라 몸이 스스로 낫는 것이다. 의사집안에서 하는 말이기도 하고, 무엇보다 내가 100년을 살면서 체득한 진리이므로 믿어도 좋다.

운동습관보다 확실한 상비약은 없다. 나는 젊었을 때는 매일 새벽 줄넘기를 3,000번씩 했다. 중년을 지나 노년이 되어서 2,000번, 1,000번으로 줄었지만 여든이 넘어서도 줄넘기를 했다. 뛸 수 있을 만큼 뛰었다. 그렇게 줄넘기를 많이 하면 장단지가 무쇳덩어리처럼 단단해진다. 나의 건강은 타고난 것이 아니라 운동으로 단련된 것이다. 젊은 직원들은 늘 나의 다리를 만져보며 감탄하곤 했다.

“일흔이 넘으셨는데 어쩜 이렇게 다리가 차돌같이 단단하실 수 있으십니까?”

“자네도 하루에 줄넘기 1,000번씩만 해보게. 나처럼 이렇게 되네.”

신기해하면서도 따라하는 사람은 별로 없었다. 안타까운 일이 아닐 수 없다.

「약보(藥補)보다 식보(食補), 식보보다 행보(行補)」

허준의 《동의보감》에 나오는 구절이다. 밥이 보약이고 걷는 것이 더 좋은 보약이라는 뜻이다. 건강하게 살려면 몸에 좋다는 음식을 찾아다니며 먹을 게 아니라 운동을 해야 한다.

운동은 거창한 것이 아니다. 특별히 비싼 돈을 써가며 특별히 시간을 내어 헬스클럽에 가서 할 필요도 없다. 운동은 취미이자 일상이며 습관이 되어야 한다. 즐거운 마음으로 하면 노동도 운동이 된다.

운동은 말 그대로 몸을 움직이는 것이다. 걸을 만한 거리는 걷고 엘리베이터나 에스컬레이터를 타는 대신 계단을 올라가야 한다. 나는 계단을 보면 오히려 반가웠다. 평소에 바쁘다는 핑계로 걸어도 될 거리도 차를 타고 다니면서 정작 “운동이 부족하다”며 차를 몰고 헬스클럽에 가는 것은 나로서는 이해할 수 없는 일이다.

나는 보통학교 6년, 중학교 5년, 고등학교 3년, 대학 3년을 내리 개근했다. 사회생활을 하면서도 단 하루도 결석하거나 결근하지 않았다. 운동을 습관화했기에 가능했다고 생각한다.

나는 아이들에게도 그런 습관을 심어주기 위해 노력했다. 그래서인지 대체로 자식들 모두 나처럼 학교와 회사에 결석이나 결근이 없었다. 아프지 않도록 평소에 열심히 체력을 단련했고, 아프더라도 정신력으로 학교와 회사에 나갔다. 일흔이 넘은 자녀들이 친구들보다 젊고 건강한 것도 그 덕분이 아닐까 한다.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것이 건강이다. 건강을 잃어버리는 것은 전부를 잃는 것이고, 부모님께 불효이며, 사회와 국가에 봉사할 기회를 포기하는 것이다. 건강은 자신이 관리하고 향상시켜야 한다. 이를 위한 부단한 훈련이 필요하다.

나는 100세가 된 지금도 움직임을 멈추지 않는다. 앉아 있는 동안에도 쉬지 않고 발가락이라도 꼼지락거린다.

죽은 사람이 움직이지 않는 것처럼, 움직이는 사람은 죽지 않는다. 나는 평생 BMW를 타고 다녔다. 독일 명차가 아니라 버스(Bus), 전철(Metro), 걷기(Walk)를 말하는 것이다. 걷는 것만큼 좋은 운동은 없다는 것이 100년을 걸어 다니면서 깨달은 진리다.

맏아들 광준이는 한국에 들어올 때마다 내게 같은 선물을 사온다. 바로 신발이다. 나에게는 최고의 선물이자 광준이도 그것이 최고의 효도라는 것을 알고 있다. 늘 걸어 다니니까 구두 밑창이 빨리 닳는다. 나는 그 어떤 선물보다 광준이가 사다주는 구두가 반갑다.

한번은 내가 어느 지하철역에서 손잡이를 붙잡고 계단을 한 걸음 한 걸음 힘겹게 올라가고 있는 모습을 우연히 광준이의 친구가 본 모양이었다. 나중에 들어보니 광준이가 친구한테 호되게 비난을 받았다고 한다.

“아버님을 그렇게 모시면 못써!”

이를 들은 자식들은 입장이 난처했을 것이다. 그래서 내가 은퇴하기 15년 전 자동차를 사주었고 운전기사까지 집에 있었지만 나는 특별한 경우가 아니면 차를 이용하지 않았다. 그리고 97세까지 송파구 가락동 집에서 이화여대 앞 세라믹총연합회 사무실로 매일같이 지하철을 갈아타고 출퇴근했다.

4년 전까지 국내외 학회에 참석했으며 미국에 있는 손자 손녀 결혼식에도 빠진 적이 없다. 광준이를 불효자로 만든 것 같아 미안한 마음이 없지 않았지만, 두 발로 걸을 수 있는데 엘리베이터에 몸을 맡길 생각이 없었다. 오히려 걸어서 건강하게 오래 사는 것이 광준이를 진짜 효자로 만드는 길이라고 생각한다. 마부가 끄는 말을 타고 가는 사람이 있다고 하자. 말을 타고 가는 사람과 그 말을 끌고 걸어가는 마부 중 누가 오래 살까?

아흔 살 생일 때인가 맏딸 광순이가 좋은 지팡이를 하나 선물했다. 하지만 마음만 받기로 하고 들고 다니지 않았다. 자식이 부모에게 선물해서는 안 되는 물건 중 하나가 지팡이라는 얘기가 있다. 자식 스스로 부모를 부축하는 지팡이가 되어야지, 지팡이 하나 쥐어주고 나 몰라라 하는 자식이 되지 말라는 경계라고 한다. (물론 광순이는 그런 경계를 모르고 내게 지팡이를 선물한 것이다. 광순이는 한국에 올 때마다 아내를 대신해 나에게 착한 지팡이가 되어 준다. 교회에 갈 때 옷을 입혀주고 넥타이도 매어주는 광순이는 아내를 많이 닮았다.)

나는 좀 다른 뜻으로 해석하고 싶다. 지팡이를 붙잡는 순간 계속 지팡이에 의지해 걷는 것을 게을리 하게 되어 건강이 나빠지는 것을 경계한 것이 아닐까 하고 말이다. 부모에게 지팡이를 사주는 대신 많이 걷게 하는 것이 더 큰 효도가 되는 셈이다.

몇 해 전부터는 나도 지팡이 없이 걷는 것이 거의 불가능해졌다.

그래서 광순이가 사준 지팡이를 짚고 다닌다. 그렇다고 지팡이 없이는 못 걷는다는 좌절감에 빠지지는 않는다. 오히려 지팡이를 짚고라도 걸을 수 있음에 감사하며 부지런히 걷고 있다. 긍정과 감사도 중요한 건강비결이다. 걸을 때마다 나는 광준이, 광순이와 함께한다고 생각하면 기분이 좋다.

산책(散策)은 생각(策)을 흩트리는(散) 것이다. 걸을수록 정신이 맑아진다. 마음이 괴로울 땐 몸을 많이 움직이라는 것도 그래서일 것이다.

사람들은 내가 화를 내는 것을 본 적이 없다고들 한다. 나는 늘 웃는 얼굴이라고도 한다. 의식적으로 그런 건 아니었는데, 돌이켜보면 그랬던 것 같다. 나는 부정적인 상황도 부정적으로 보지 않으려고 노력한다. 부족한 사람도 부족하게 보지 않으려고 노력한다. 나쁘게 보면 상황은 더 나빠지고 못마땅하게 보면 사람은 더 못마땅해진다. 결국 나만 스트레스를 받는다.

상황이나 사람을 바꾸는 것은 우리가 얼마나 긍정적으로 보느냐에 달려 있다. 그러니 나는 불평하거나 화를 내지 않는다. 그래서 늘 얼굴에 미소가 담겨 있는 모양이다. 마음건강도 몸건강 못지 않게 중요하다.

2009년 이홍림 연세대 교수(당시 한국화학관련학회연합회장)가 나를 인터뷰를 하던 중 나의 건강에 대해 ‘마더테레사효과’ 같다는 얘기를 했다. 하버드 의대에서 시행한 연구로 테레사 수녀처럼 남을 위한 봉사활동을 하거나 선한 일을 보기만 해도 면역기능이 크게 향상되는 것을 말한다. ‘슈바이처효과’라고도 한다.

‘헬퍼스 하이(Helper’s High)’도 있다. 봉사하고 난 뒤에 심리적 포만감이 몇 주 동안 지속된다. 혈압과 콜레스테롤 수치가 현저히 떨어지고 엔돌핀이 정상치의 3배 이상 분비되어 몸과 마음에 활력이 넘친다고 한다. 남도 돕고 자신도 건강하게 오래 살면 그보다 좋은 일이 또 있을까.

내가 지켜온 ‘건강10훈(訓)’이다.

1. 고기를 적게 먹고 채소를 많이 먹는다(少肉多菜)
2. 소금을 줄이고 식초를 늘린다(少鹽多醋)
3. 설탕을 삼가고 과일을 듬뿍 먹는다(少糖多果)
4. 적게 먹고 오래오래 씹는다(少食多嚼)
5. 근심을 줄이고 잠을 충분히 잔다(少煩多眠)
6. 화를 내지 말고 마냥 웃는다(少怒多笑)
7. 옷을 가볍게 입고 목욕을 자주한다(少衣多浴)
8. 말을 줄이고 행동으로 실천한다(少言多行)
9. 욕심을 적게 내고 많이 베푼다(少慾多施)
10. 차를 적게 타고 많이 걷는다(少車多步)

◆ 남기동 선생은...

1919년 평양에서 태어났다. 올해로 100살이다. 일본 제6고등학교를 수석으로 졸업하고 경성제국대학 신생 이공학부 응용화학과에 편입했다. 1946년 중앙공업연구소 지질광물연구소장, 요업 과장으로 근무하며 서울대, 고려대, 한양대 등에도 출강했다. 부산 피난 중에도 연구하며 공학도들을 가르쳤다. 6·25 후 운크라 건설위원장을 맡아 1957년 연산 20만 톤 규모의 문경시멘트공장을 건설했다. 화학과장, 공업국 기감(技監)으로 인천판유리공장, 충주비료공장 등 공장 건설 및 복구사업을 추진했다. 1960년 국내 대학 최초로 한양대에 요업공학과를 창설하고 학과장을 맡았다. 1962년 쌍용양회로 옮겨 서독 훔볼트의 신기술 ‘SP킬른(Kiln)’ 방식으로 1964년 연산 40만 톤 규모의 영월공장을 준공했는데, 최단 공사기간을 기록해 은탑산업훈장을 받았다. 영월공장 준공으로 우리나라는 시멘트 수출국으로 부상했다. 1968년 건설한 동해공장은 단위공장으로는 세계 최대 규모였다. 공장 증설을 거듭해 1992년 우리나라 시멘트 생산량은 세계 5위가 되었다. 1978년 동양시멘트로 자리를 옮겨 2차 오일쇼크 때 시멘트 생산 연료를 벙커씨유에서 유연탄으로 대체하는 기술을 개발, 특허 대신 공개를 택해 업계를 위기에서 살려냈다. 이 공적으로 1981년 '3·1 문화상(기술상)'을 받았다. 인도네시아 수하르토(Suharto) 대통령 요청으로 1992년 인도네시아 최초의 시멘트공장인 '시비뇽 시멘트플랜트(P.T. SEMEN CIBINONG)'를 건설했다. 한국요업(세라믹) 학회, 한국화학공학회, 대한화학회등 3개 학회, 대한요업총협회(지금의 한국세라믹총협회) 회장으로 학계와 산업계의 유대를 다졌다. 학교, 연구소, 산업체가 참석하는 '시멘트심포지엄'을 개최하고, 한일국제세라믹스세미나를 조직해 학술교류는 물론 민간교류에도 힘썼다. 세라믹학회는 그의 호를 따 장학지원 프로그램인 '양송 상'을 제정했다. 1993년 인하대에서 명예공학박사 학위를 받고, 2006년 서울대 설립 60돌 기념 '한국을 일으킨 60인' 상, 2007년 세라믹학회 창립 50주년 특별공로상을 받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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