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민국 시멘트산업의 살아있는 역사] 남기동 회고록(63) 지식을 나누면 지혜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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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 시멘트산업의 살아있는 역사] 남기동 회고록(63) 지식을 나누면 지혜가 된다
  • 남기동
  • 승인 2019.06.25 09: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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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스비전e] 나는 이론과 실천에 바탕을 둔 기술자로 공업입국 대열에 동참하고 대학교수로 후학 양성에 심혈을 기울였다. 1943년 경성제대 응용화학과를 졸업한 후 상공부 중앙공업연구소 요업과장으로 요업계에 투신한 이래 오늘에 이르기까지 요업인(세라미스트)으로 살아왔다.

요업과장으로 재직할 때는 요업원료를 조사하고 분석해 그 이용에 관한 연구에 진력했다. 도자기 제품 파일럿 플랜트(Pilot Plant)를 건설해 운영하는 등 연구시설 확충과 보수를 위해 노력하면서 요업원료 및 제품 분석기사도 양성했다. 1947년부터는 서울대, 한양공대, 고려대 등에서 규산염공업, 연료 같은 과목을 가르치며 해방 후 낙후된 우리나라 요업 기반을 다지고 요업을 학문으로 발전시키고자 했다.

인하대 명예공학박사 학위 수여식, 1993

한국요업(세라믹)학회 회장(1960~1964), 한국화학공학회 회장(1975~1976), 대한화학회 회장(1977~1978) 등 3개 학회 회장을 맡아 학술 진흥에 노력했고 대한요업총협회(지금의 한국세라믹총협회) 회장으로 산학협동체제를 확립해 학계와 산업계의 유대를 공고히 다지고자 했다.

쌍용양회, 동양시멘트 등 기업에 재직하는 동안 요업공학도들의 현장실습과 취업에 적극 노력했으며 대학들과의 산학공동연구를 위한 연구비 지원에도 힘썼다. 한국요업학회에서는 학교, 연구소, 산업체에서의 연구성과를 발표하는 ‘시멘트심포지엄’을 개최해 시멘트 기술과 과학을 발전시키고자 했다. 산학연 협동의 본보기로 시멘트 학자, 연구원, 기술자가 한 자리에 모여 시멘트 과학기술을 토론하고 교류하며 화합의 한마당을 만들었고 지금까지 매년 이어져오고 있다.

일본 6고 시절 쌓은 친분을 바탕으로 1984년 ‘한일국제세라믹스세미나’를 조직하고 위원장을 맡았다. ‘미래의 재료’로 각광받는 파인세라믹스(신소재)에 관한 한일 양국의 세라믹 관련 교수, 학생을 비롯한 전문가들이 서로 만나 연구결과를 함께 발표하고 토론하는 학술교류는 물론 민간교류에도 힘썼다.

한국세라믹학회 사무실 구입비의 50퍼센트를 기부하고, 학회발전기금으로 3억 원을 기부했는데 학회에서 나의 호를 딴 장학지원 프로그램인 ‘양송상’을 제정해 기금으로 활용하고 있다. 연료대체에 성공하면서 받은 ‘3・1문화상’ 상금 5,000만 원도 학회를 설립하는 데 보탰다. 요업인들의 숙원사업인 요업학회지를 창간(1964년)해 요업인 상호간 학문적 기술적 정보 교류와 연구성과 발표의 장을 마련했다.

1993년 인하대에서 명예공학박사 학위를 받았고, 2006년 서울대 설립 60돌을 맞아 서울대 공대가 선정한 ‘한국을 일으킨 60인’ 상을 수상했다. 당시 나는 88세로 수상자 중 최고령이었다. 같은 해 한국과학기술한림원상을, 2007년에는 세라믹학회 창립 50주년을 맞아 특별공로상을 받았다. 2014년엔 한국엔지니어클럽이 선정한 ‘조국 근대화의 주역 17인’에 이병철, 정주영, 박태준 회장 등과 함께 포함되고 책(《조국 근대화의 주역들》, 윤재석 지음)으로도 출간되었다.

◆ 남기동 선생은...

1919년 평양에서 태어났다. 올해로 100살이다. 일본 제6고등학교를 수석으로 졸업하고 경성제국대학 신생 이공학부 응용화학과에 편입했다. 1946년 중앙공업연구소 지질광물연구소장, 요업 과장으로 근무하며 서울대, 고려대, 한양대 등에도 출강했다. 부산 피난 중에도 연구하며 공학도들을 가르쳤다. 6·25 후 운크라 건설위원장을 맡아 1957년 연산 20만 톤 규모의 문경시멘트공장을 건설했다. 화학과장, 공업국 기감(技監)으로 인천판유리공장, 충주비료공장 등 공장 건설 및 복구사업을 추진했다. 1960년 국내 대학 최초로 한양대에 요업공학과를 창설하고 학과장을 맡았다. 1962년 쌍용양회로 옮겨 서독 훔볼트의 신기술 ‘SP킬른(Kiln)’ 방식으로 1964년 연산 40만 톤 규모의 영월공장을 준공했는데, 최단 공사기간을 기록해 은탑산업훈장을 받았다. 영월공장 준공으로 우리나라는 시멘트 수출국으로 부상했다. 1968년 건설한 동해공장은 단위공장으로는 세계 최대 규모였다. 공장 증설을 거듭해 1992년 우리나라 시멘트 생산량은 세계 5위가 되었다. 1978년 동양시멘트로 자리를 옮겨 2차 오일쇼크 때 시멘트 생산 연료를 벙커씨유에서 유연탄으로 대체하는 기술을 개발, 특허 대신 공개를 택해 업계를 위기에서 살려냈다. 이 공적으로 1981년 '3·1 문화상(기술상)'을 받았다. 인도네시아 수하르토(Suharto) 대통령 요청으로 1992년 인도네시아 최초의 시멘트공장인 '시비뇽 시멘트플랜트(P.T. SEMEN CIBINONG)'를 건설했다. 한국요업(세라믹) 학회, 한국화학공학회, 대한화학회등 3개 학회, 대한요업총협회(지금의 한국세라믹총협회) 회장으로 학계와 산업계의 유대를 다졌다. 학교, 연구소, 산업체가 참석하는 '시멘트심포지엄'을 개최하고, 한일국제세라믹스세미나를 조직해 학술교류는 물론 민간교류에도 힘썼다. 세라믹학회는 그의 호를 따 장학지원 프로그램인 '양송 상'을 제정했다. 1993년 인하대에서 명예공학박사 학위를 받고, 2006년 서울대 설립 60돌 기념 '한국을 일으킨 60인' 상, 2007년 세라믹학회 창립 50주년 특별공로상을 받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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