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비전e] 귀국하는 길에 은사의 소개로 일본에 있는 ‘도쿠데’라는 시멘트회사를 찾아가게 되었다. 일본은 시멘트공업이 발달해 공장이 수십 개나 있었고 기술력도 뛰어났다. 도쿠데는 업계를 리드하는 아주 큰 회사였는데 회장이 나를 환대해 주었다.

회장은 동경제대 공학부를 나온 일본 시멘트업계의 원로였다. 이런저런 대화를 하던 중에 내가 서독 훔볼트의 신기술로 공장을 건설하기 위한 가계약을 체결했다고 하자 회장은 냉소적인 표정으로 말했다.

“아무래도 잘못 생각하고 있는 것 같소. 한국은 국가를 재건하자면 시멘트가 당장 많이 필요한데 검증되지도 않은 신기술을 채택하는 것은 모험이오. 우리 일본에서도 전혀 알지 못하는 기술이오. 얼마나 획기적인 기술인지는 몰라도 가능하면 그냥 재래식 공장을 짓는 것이 안전할 거요.”

일본 시멘트산업의 대부가 그렇게까지 진지하게 권고하는데 그 자리에서는 반박하기가 좀 미안해 그냥 고개를 끄덕였다.

“조언 감사합니다. 신중하게 참고하겠습니다.”

그러나 나는 그 말을 듣지 않았다. 직접 공장을 조사했고 충분히 자신이 있었기 때문이다. 귀국하자마자 SP킬른 방식을 적용해 공장을 짓는 데 박차를 가했다. 1962년 5월 쌍용양회를 설립하고, 1964년 4월 영월에 연산 40만 톤 규모의 공장을 준공했다. ‘쌍용’이라는 이름도 내가 지었다.

일본도 도입을 망설이고 있던 서독의 SP킬른 기술을 도입해 공장을 1년 8개월 만에 완공했는데, 시멘트공장 건설 사상 최단 기간을 기록했다. 이 공로로 나는 은탑산업훈장을 받았다. SP킬른은 이후 NSP킬른으로 개량되어 혁신을 거듭했다.

새로운 기술 도입으로 국내에서 신설되는 시멘트공장은 전부 이 방식을 채택하고 기존 공장도 이 방식으로 개조해 시멘트산업에 일대 혁신이 일어났다. 현재 한국의 시멘트 생산량이 세계 5위로 연산 6,000만 톤 규모로 성장하고 품질도 다른 나라에 앞서게 된 데는 당시의 ‘SP킬른 혁신’이 큰 기여를 한 것이다.

훔볼트와 협상한 지 1년 후 영월공장이 완성되어 가던 어느 날 일본에서 초청을 받았다. 전에 내가 훔볼트와 협상하고 돌아오는 길에 방문했던 도쿠데 회장이 보자고 한 것이다. 무슨 일인가 해서 찾아갔더니 회장이 기술부문 중역들과 간부들을 전부 불러놓고 말했다.

“나는 일전에 내 방에서 한국의 젊은 기술자를 만난 적이 있다. 그는 서독에서 개발한 신기술을 한국의 시멘트공장에 도입하겠다고 했다. 그때 나는 아직 잘 알려지지도 않은 기술을 도입하는 것은 모험이라며 반대했다. 나의 만류에도 그는 남다른 혜안으로 과감한 결단을 내렸다. 나는 최근 우리 회사 기술진에게 그 방식을 검토시켰다. 그 결과, 그 한국 기술자가 과감하게 도입한 기술이 혁신적임이 확인되었다. 시멘트 생산 운영도 단순화되며 연료가 과거에 비해 40퍼센트 가량 절감된다고 한다. 그의 선택은 옳았고 내 생각이 틀렸음이 입증되었다. 여기 있는 이 분이 바로 그 주인공이다. 한국의 젊은 기술자는 이렇게 공부도 많이 하고 과감하게 결단을 내려 성공했는데, 우리는 역사가 100년이 넘는 큰 회사이면서도 왜 공부도 하지 않고 신기술에 대한 정보도 없는 것인지 반성해야 한다!”

나는 민망해서 몸 둘 바를 몰라 중역들의 얼굴을 쳐다볼 수 없었다. 대신 ‘어쩌면 우리가 일본을 앞지를 수도 있다’는 가능성을 보고 있었다.

1967년 대한요업총협회 기술상

영월공장 준공으로 국내 시멘트 수요를 충분히 감당하는 것은 물론이고 우리나라는 시멘트 ‘수입국’에서 ‘수출국’으로 부상하게 되었다. 시멘트 품질 향상에도 크게 이바지하게 되었다.
국가기간시설 건설이 활발해지면서 시멘트 수요가 급증함에 따라 동해공장도 짓게 되었는데, 그때도 공사 기본 계획 수립에서 조업에 이르기까지 내가 모든 일을 지휘해야 했다.

나는 한양대에 사직서를 제출했다. 이미 쌍용으로 올 때 김연준 총장에게 내밀었던 사직서였다.

“아무래도 기업을 도와주러 가야겠습니다.”

당시 김 총장은 무척이나 서운한 표정을 지으며 사직서를 물렸다.

“기업으로 가셔도 사직서는 못 받겠습니다.”

하지만 영월공장에 이어 동해공장 건설까지 맡아야 하는 상황에서 계속 교수직을 유지한다는 것은 마음에 큰 부담이 되었다. 김 총장도 못내 아쉬워하면서 사직서를 받아주었다. 지금도 미안하고 감사한 마음 가득하다.

1, 2차 경제개발5개년계획에 힘입어 1962~1972년 영월에 1~5호의 시멘트 킬른을 건설하고, 1966~1974년 대단위 동해공장(1~3호 킬른)을 건설했다. 두 공장의 생산능력이 4,797,000톤(M/T)에 달해 쌍용은 국내 최대 시멘트 메이커로 부상했다.

이 시기가 바로 내가 축적한 지식과 기술을 마음껏 발휘하며 활약한 시기가 아니었을까 생각한다. 영월공장의 경험과 기술을 바탕으로 1968년 건설한 동해공장 준공식에 참석한 박정희 대통령은 이렇게 감탄했다.

“이런 대단한 공장을 우리 손으로 건설한 것은 불안 속에 싹튼 봄이며 위대한 교훈을 남겼다.”

동해공장 준공으로 영월과 동해 두 공장의 생산체제를 갖추고 두 공장의 기술, 인력 교류를 위한 생산기술협의회를 구성했다. 쌍용의 기술을 세계적 수준으로 끌어올리기 위한 노력의 일환이었다.

시멘트산업은 에너지 소비가 막대한 산업이다. 쌍용양회는 동해공장을 안정적으로 가동하기 위해서는 자가발전 시설이 불가피하다는 판단을 내리고 동해전력을 세웠다.

국토건설 사업에 가장 중요한 원자재인 시멘트가 자급자족으로 전국 건설현장에서 사용되었다. 대교, 철도 침목, 터널, 전국을 1일권으로 연결하는 고속도로가 속속 건설되었다. 원료와 제품 수송이 자유롭게 되니 건설이 활성화되고 생산이 늘어나 경제발전이 이루어졌다.

1962년부터 네 차례에 걸친 경제개발계획에 따라 시멘트산업은 국가기간산업의 하나로 급속히 발전했다. 1964년 쌍용양회가 연산 40만 톤 규모의 현대식 설비를 갖추고 등장하면서 국내 수요를 완전히 충족시키고 2만2,000톤의 시멘트를 수출까지 해서 시멘트 수출국 대열에 가담하게 되었다. 그 해 12월 국내 최초로 포장시멘트를 수출하고 1968년 문경공장을 갖고 있던 대한양회를 흡수합병했다.

1970년대 우리나라의 경제부흥과 함께 시멘트 수요도 날로 급증했다. 업계는 일대 호황을 맞았다. 우리나라 시멘트 연간 생산 실적이 100만 톤을 넘어서면서 정부는 시멘트 수입을 중지하고 한국산 시멘트를 해외로 수출하기 시작했다.

1974년 우리나라의 연간 시멘트 생산 능력은 9,914,000톤(M/T)에 달하게 되었다. 동해공장은 처음 200만 톤 규모로 출발했으나 증설을 거듭해 1993년에는 연간 생산량이 1,000만 톤 규모로 단일 공장으로는 세계 최대가 되었다. 1992년 우리나라 시멘트 생산량은 세계 5위로 연산 6,000만 톤 규모로 커졌고 품질도 다른 나라에 앞서게 되었다. 1인당 연산 1톤을 뛰어넘는 나라는 한국밖에 없었다.

한국은 시멘트 전량 수입국에서 십수 년 만에 시멘트 강대국으로 성장했다. 과감한 도전은 국내 시멘트 산업의 발전은 물론 경제발전의 토대를 마련했다.

◆ 남기동 선생은...

1919년 평양에서 태어났다. 올해로 100살이다. 일본 제6고등학교를 수석으로 졸업하고 경성제국대학 신생 이공학부 응용화학과에 편입했다. 1946년 중앙공업연구소 지질광물연구소장, 요업 과장으로 근무하며 서울대, 고려대, 한양대 등에도 출강했다. 부산 피난 중에도 연구하며 공학도들을 가르쳤다. 6·25 후 운크라 건설위원장을 맡아 1957년 연산 20만 톤 규모의 문경시멘트공장을 건설했다. 화학과장, 공업국 기감(技監)으로 인천판유리공장, 충주비료공장 등 공장 건설 및 복구사업을 추진했다. 1960년 국내 대학 최초로 한양대에 요업공학과를 창설하고 학과장을 맡았다. 1962년 쌍용양회로 옮겨 서독 훔볼트의 신기술 ‘SP킬른(Kiln)’ 방식으로 1964년 연산 40만 톤 규모의 영월공장을 준공했는데, 최단 공사기간을 기록해 은탑산업훈장을 받았다. 영월공장 준공으로 우리나라는 시멘트 수출국으로 부상했다. 1968년 건설한 동해공장은 단위공장으로는 세계 최대 규모였다. 공장 증설을 거듭해 1992년 우리나라 시멘트 생산량은 세계 5위가 되었다. 1978년 동양시멘트로 자리를 옮겨 2차 오일쇼크 때 시멘트 생산 연료를 벙커씨유에서 유연탄으로 대체하는 기술을 개발, 특허 대신 공개를 택해 업계를 위기에서 살려냈다. 이 공적으로 1981년 '3·1 문화상(기술상)'을 받았다. 인도네시아 수하르토(Suharto) 대통령 요청으로 1992년 인도네시아 최초의 시멘트공장인 '시비뇽 시멘트플랜트(P.T. SEMEN CIBINONG)'를 건설했다. 한국요업(세라믹) 학회, 한국화학공학회, 대한화학회등 3개 학회, 대한요업총협회(지금의 한국세라믹총협회) 회장으로 학계와 산업계의 유대를 다졌다. 학교, 연구소, 산업체가 참석하는 '시멘트심포지엄'을 개최하고, 한일국제세라믹스세미나를 조직해 학술교류는 물론 민간교류에도 힘썼다. 세라믹학회는 그의 호를 따 장학지원 프로그램인 '양송 상'을 제정했다. 1993년 인하대에서 명예공학박사 학위를 받고, 2006년 서울대 설립 60돌 기념 '한국을 일으킨 60인' 상, 2007년 세라믹학회 창립 50주년 특별공로상을 받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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