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민국 시멘트산업의 살아있는 역사] 남기동 회고록(51) 산업유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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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 시멘트산업의 살아있는 역사] 남기동 회고록(51) 산업유산
  • 남기동
  • 승인 2019.06.13 09: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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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스비전e] 1955년 11월 경북 문경군 점촌읍 신기리에 연산 20만 톤 규모의 시멘트공장을 건설하는 역사적인 프로젝트가 시작되었다. 그리고 착공한 지 채 2년도 안 된 1957년 9월 준공되었다. 20만 제곱미터 부지에 5만 제곱미터가 넘는 건물을 가진 거대한 시멘트공장이 탄생한 것이다. 운크라 원조자금으로 추진한 3대 기간산업(유리, 시멘트, 비료) 프로젝트 가운데 인천판유리공장에 이은 또 한 번의 쾌거였다.

문경공장은 국내 최초의 근대식 공장이자 국토 재건의 신호탄이 되었다. 문경공장 건설은 국가적으로도 큰 경사였다. 준공식 때 대통령이 참석한다고 하니까 사람들이 구름처럼 몰려들었다. 운크라 단장인 콜터 장군이 공장 건설경과보고를 했고, 이어 이승만 대통령은 플랜트 건설에 참여한 스미스에 공로를 치하하고 “시멘트를 많이 만들어 전란으로 폐허가 된 산하를 복구하고 재건하는 데 큰 도움이 되도록 해달라”고 말했다. 어떻게든 나라를 재건해야 했고, 그때 가장 시급한 것이 시멘트였다.

1970년대 초 쌍용동해시멘트공장 건설 현장

문경공장에서 생산된 시멘트로 건설현장의 갈증이 풀리기 시작했다. 춘천댐도 문경공장에서 생산한 시멘트로 완공되었다. 춘천 신북읍에 위치한 춘천댐은 1961년 9월 착공해 3년 6개월 만에 완공된 대규모 공사였다. 댐 길이가 400미터가 넘고 높이가 40미터에 달했다. 이런 대규모 공사를 우리가 만든 시멘트로 할 수 있었다는 것이 얼마나 자랑스러웠는지 모른다.

큰 공장이 들어서자 문경은 눈에 띄게 발전하기 시작했다. “먹고살기는 문경이 서울보다 낫다”는 얘기가 나올 정도였다. “복 받은 동네”라는 부러움도 샀다. 문경공장은 누구나 선망하는 일자리였다. 작업복에 선명한 ‘제비표’ 마크는 점촌 시내 어느 식당, 어느 술집에서도 외상 보증이 되었다. 문경공장 근로자는 딸 있는 부모들 사이에서 일등사윗감이었다.

경제 부흥이 궤도에 오름에 따라 문경공장은 쉴 새 없이 돌아갔다. 당시 생산량 60만 톤을 거의 다 채웠다고 봐도 과언이 아니다. 성수기에는 수송트럭이 밀려 며칠씩 대기한 채로 자야 200포대라도 싣고 갈 행운을 얻었다.

문경공장이 설립되기 전 시멘트공장은 국영 삼척시멘트공사가 유일했으나 그나마도 시설 노후로 생산성이 형편없었다. 1955년 국내 시멘트 소비는 18만9,000톤인데 생산량은 5만6,000톤으로 70퍼센트를 수입에 의존해야 했다. 문경공장 건설로 삼척공장과 함께 국내 수요의 절반을 담당하게 되었다. 문경공장 준공으로 우리나라는 시멘트공장 건설 기술에서도 자립하게 되었다.

문경공장을 시작으로 1960년대를 거치면서 강원도 영월, 충북 단양과 제천, 경기도 소사 등 전국 각지에 시멘트공장이 들어섰고, 여기에서 생산된 시멘트로 자급은 물론 수출까지 하게 되었다.

문경공장은 준공 직전에 대한양회에 불하되었다. 대한양회의 창업주인 이정림은 일찍이 미국에서 100톤짜리 제빙기계를 들여와 서울 원효로에 제빙공장을 세우고 주한미군에 얼음을 납품해 연간 25만~30만 달러 매출을 올렸다. 1955년 대한탄광을 설립해 광업에 진출했고, 문경공장을 1,300만 달러에 인수했다.

문경공장은 새마을사업으로 건설경기가 한창이었을 때 직원이 700명이 넘었고, 협력업체까지 합하면 1,000명이 넘게 일하는 문경 최대의 사업장이었다.

엔지니어들은 미국에서도 오고 덴마크에서도 왔는데 길이 나빠 차로 가면 흙먼지 때문에 차가 하얗게 변했다. 그래서 오기를 꺼렸다. 엔지니어들이 현장에 적시에 도착하지 못하면 공장가동이 중단될 수도 있어 나는 그들이 비행기를 타고라도 적시에 도착할 수 있도록 공장 옆 부지에 경비행장을 짓고 활주로까지 닦도록 했다. 파격적인 대우를 해주어야 전문 엔지니어를 ‘모셔올 수’ 있었다. 전 세계 시멘트공장에 자가용 비행장이 있는 곳은 문경밖에 없었다. 철도를 끌어오고 전기도 끌어왔다.

문경 주민들에게 시멘트공장은 가장 큰 자랑이자 자부심 가득한 추억이다. 1950년대 문경은 전쟁의 상처가 채 아물지 않은 작은 농촌이었다. 큰 공장이 들어서자 마을이 들썩였다. 강가에서 멱을 감던 아이들도 비행기소리만 나면 전부 비행장 쪽으로 뛰었다. 아이들은 비행기를 직접 가서 만져도 보고 코 큰 서양사람들 얼굴을 보며 웃었다.

문경공장은 대한민국 산업화의 상징이다. 1960년대 초등학교 교과서에도 실렸고, 중고생들의 수학여행과 시설견학의 코스뿐 아니라 일반인에게도 인기 있는 명소였다. 견학버스가 줄지어 서 있을 때가 많았고, 인근 지역 초등학생들은 소풍을 공장으로 왔을 정도다.

문경공장은 1962년 쌍용양회로 합병되었다가 2018년 4월 30일 61년 만에 문을 닫았다. 최근까지 특수시멘트를 포함해 17만 톤을 생산했지만 수요 감소가 지속되면서 조업 중단을 결정했다.

문경공장은 산업고도화와 시설노후화로 1996년 가동이 중단되었지만, 습식 고로(킬른 방식) 시멘트 제조시설 4기를 비롯해 공장 건축물과 설비가 80퍼센트 이상 옛 모습을 유지하고 있어 대한민국 산업근대화의 역사・문화적 가치가 높다.

경상북도는 문경공장의 역사를 재조명하고 체계적으로 보존하고 관리하기 위해 ‘근대화산업유산 지속가능 이용 방안 연구’ 용역을 발주했다. 다른 지역에 있는 근대 산업유산과 연계해 세계문화유산으로 등록될 수 있도록 문경시와 함께 노력하고 있다고 한다.

◆ 남기동 선생은...

1919년 평양에서 태어났다. 올해로 100살이다. 일본 제6고등학교를 수석으로 졸업하고 경성제국대학 신생 이공학부 응용화학과에 편입했다. 1946년 중앙공업연구소 지질광물연구소장, 요업 과장으로 근무하며 서울대, 고려대, 한양대 등에도 출강했다. 부산 피난 중에도 연구하며 공학도들을 가르쳤다. 6·25 후 운크라 건설위원장을 맡아 1957년 연산 20만 톤 규모의 문경시멘트공장을 건설했다. 화학과장, 공업국 기감(技監)으로 인천판유리공장, 충주비료공장 등 공장 건설 및 복구사업을 추진했다. 1960년 국내 대학 최초로 한양대에 요업공학과를 창설하고 학과장을 맡았다. 1962년 쌍용양회로 옮겨 서독 훔볼트의 신기술 ‘SP킬른(Kiln)’ 방식으로 1964년 연산 40만 톤 규모의 영월공장을 준공했는데, 최단 공사기간을 기록해 은탑산업훈장을 받았다. 영월공장 준공으로 우리나라는 시멘트 수출국으로 부상했다. 1968년 건설한 동해공장은 단위공장으로는 세계 최대 규모였다. 공장 증설을 거듭해 1992년 우리나라 시멘트 생산량은 세계 5위가 되었다. 1978년 동양시멘트로 자리를 옮겨 2차 오일쇼크 때 시멘트 생산 연료를 벙커씨유에서 유연탄으로 대체하는 기술을 개발, 특허 대신 공개를 택해 업계를 위기에서 살려냈다. 이 공적으로 1981년 '3·1 문화상(기술상)'을 받았다. 인도네시아 수하르토(Suharto) 대통령 요청으로 1992년 인도네시아 최초의 시멘트공장인 '시비뇽 시멘트플랜트(P.T. SEMEN CIBINONG)'를 건설했다. 한국요업(세라믹) 학회, 한국화학공학회, 대한화학회등 3개 학회, 대한요업총협회(지금의 한국세라믹총협회) 회장으로 학계와 산업계의 유대를 다졌다. 학교, 연구소, 산업체가 참석하는 '시멘트심포지엄'을 개최하고, 한일국제세라믹스세미나를 조직해 학술교류는 물론 민간교류에도 힘썼다. 세라믹학회는 그의 호를 따 장학지원 프로그램인 '양송 상'을 제정했다. 1993년 인하대에서 명예공학박사 학위를 받고, 2006년 서울대 설립 60돌 기념 '한국을 일으킨 60인' 상, 2007년 세라믹학회 창립 50주년 특별공로상을 받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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