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비전e] 건설 준비 과정에서도 난관에 부닥쳤다. 건설위원장인 내가 시멘트 플랜트에 문외한이니 실력을 쌓을 필요가 있었다. 덴마크 스미스 본사로 연수를 떠나기로 결심했다. 선진기술을 배워오기 위해서였다.

스미스의 숙련된 엔지니어들에게 맡길 수도 있었지만, 그것은 고기 잡는 법을 제대로 배우는 게 아니었다. 나도 어엿한 공학도 출신의 엔지니어인 만큼 내 눈으로 직접 보고 실습하고 연구해야 제2, 제3의 공장을 지을 때는 내 손으로, 우리 기술로 완공할 수 있으리라고 생각했다.

덴마크로 날아가 스미스 본사와 공장에서 장장 7개월 동안 내게 남은 학구열을 모두 쏟아부었다. 학창시절을 통틀어도 그때만큼 몰입해 공부한 적이 없었던 것 같다. 내가 여기서 얼마나 많이 제대로 배워 가느냐에 우리나라 시멘트공장 건설의 성패가 달렸다고 생각하니 잠시도 쉴 수 없었고, 어느 것 하나도 놓칠 수 없었다.

시멘트공장을 지으려면 엔지니어링은 어떻게 하며, 가동을 위한 자체 발전소는 어떻게 갖추며, 제조한 시멘트는 또 어떤 수단으로 운반할 것인가 하는 제반 문제를 검토해야 했다. 통찰과 디테일이 모두 필요했다.

덴마크는 참으로 먼 나라였다. 거리만이 아니었다. 모든 것이 우리와 달라 보였다. 거리도 건물도 사람도 풍족하고 여유로워 보였다. 심지어 지나가는 강아지도 행복해 보였다. 하지만 덴마크의 역사를 들여다보고 나서 덴마크가 어쩌면 우리와 많이 닮았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그리고 한줄기 빛을 보았다.

덴마크는 1864년 프로이센과의 전쟁에서 대패해 나라가 완전히 폐허가 되었다. 바로 그때 ‘니콜라이 그룬트비 (Nikolai Frederik Severin Grundtvig)’라는 목사가 실의에 빠져 아무런 희망도 찾을 수 없던 덴마크 국민에게 이렇게 소리쳤다.

“지옥문에서 돌아서자!”

그것은 덴마크를 부흥하는 캐치프레이즈가 되었다. 니콜라이 목사는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며 땅을 사랑하자”고 호소하며 척박한 땅을 개척하고 덴마크를 아름다운 나라로 혁신하는 데 크게 이바지해 ‘덴마크 중흥의 국부(國父)’로 일컬어진다. 그는 나라를 살리는 방법이 교육에 있다고 보았다. 3년, 5년, 10년 뒤를 내다보고 인재를 키우자고 외쳤다.

공병대 대령 출신인 부흥운동가 엔리코 달가스(Enrico Mylius Dalgas)도 “밖에서 잃은 것을 안에서 찾자”며 국민들에게 용기를 불어넣으면서 황무지 개간에 앞장섰다. 그의 열성에 감동한 국민이 모래땅에 나무심기를 거듭한 끝에 거친 국토는 푸른빛으로 바뀌었고 덴마크를 세계적인 낙농국가로 만들었다.

‘언젠가 우리나라도 저렇게 되었으면 좋겠다. 그러자면 우선 우리나라 첫 시멘트공장부터 잘 지어야 한다!’

도전의식이 생겼다. 덴마크의 발전한 시멘트산업은 나의 가슴을 더욱 뛰게 만들었다. 전율이 느껴질 정도였다.

스미스의 공장들이 밀집해 있는 덴마크 북부의 ‘올보르’는 인구가 10만도 안 되었지만 노르윌란 주의 중심이었다. 예부터 상업과 교통의 중심지였는데 석회암이 많아 시멘트산업이 발달했다. 이 나라 시멘트의 대부분이 올보르에서 생산되고 있었다.

내가 외국어를 빨리 습득한 것도 덴마크 연수의 성과를 극대화하는 데 기여했다. 6고 유학 시절 독일어는 마스터했다고 자부했지만 덴마크어는 독일어와 구조가 달랐다. 한국에서는 덴마크어를 예습할 만한 여건이 안 되어 현지에서 속성으로 익히기로 했다. 두 달 정도 되니 소통에는 지장이 없게 되었다. 스미스 본사 임직원들은 동양인이 이렇게 자기네 말을 빨리 배울 줄은 상상도 못했다면서 혀를 내둘렀다.

나의 배우려는 열정에 감화를 받았는지 스미스의 한 임원이 제안했다.

“스미스에서 스웨덴 스톡홀름과 노르웨이 북단 나르비크에 지어준 시멘트공장이 있는데 한번 답사해 보는 게 어떨까요?”

스톡홀름의 공장을 둘러보고 노르웨이 나르비크에 머물 때였다. 그때만 해도 유럽, 특히 북유럽에서는 동양인이 거의 가지 않아 나는 그곳 거리에서 현지인들에게 완전히 신기한 구경거리가 되었다. 가는 곳마다 아이들이 졸졸 따라다니며 호기심어린 눈으로 쳐다보면서 까르르 웃었다.

스웨덴 스톡홀름에서

한번은 한 신사가 내가 머무는 호텔로 찾아와 다짜고짜 말을 걸었다.

“혹시, 한국에서 오셨습니까?”

“그렇습니다만.”

“노르웨이에서 한국사람을 만나게 될 줄은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습니다. 반갑습니다.”

“한국을 아십니까?”

“알다마다요. 저는 의사인데 한국전쟁 때 병원선을 타고 부산에서 의료봉사를 했습니다.”

“그러셨군요. 저도 부산에서 피난살이를 했습니다. 반갑습니다. 그리고 고맙습니다.”

그는 나를 자기 집으로 초대하고 싶다고 했다. 그의 집으로 가서 식사를 함께하는 데 의외의 제안을 받았다.

“우리 마을 사람들에게 한국에 대해 특강을 부탁드립니다.”

내가 독일어를 유창하게 하고 대학에서 강의도 오랫동안 했다는 얘기 때문이었던 것 같았다. 거절하면 한국을 위해 봉사한 분에 대한 예의가 아닌 것 같아 흔쾌히 수락했다. 의사는 어느 고등학교에 마을사람들을 모이게 했다. 나는 난생 처음 가본 노르웨이의 나르비크라는 이름도 생소한 도시에서 현지인들을 대상으로 강의를 했다.

처음에는 독일어로 말하면 의사가 노르웨이어로 통역을 해주었다. 그런데 왠지 나의 얘기가 제대로 통역되지 않는 것 같았다. 노르웨이어로 하겠다고 했다. 그러고 나서 30분간 ‘신생 코리아’에 관해 강연을 했다.

내가 노르웨이어로 강연을 하는 것이 그들에게는 무척이나 놀랍고 신기했던 모양이다. “한국이 전쟁의 상처를 씻고 부흥할 수 있도록 응원해 달라”고 부탁하며 강연을 마무리짓자 환호와 박수가 쏟아졌다.

어느 나라를 가든 가기 전에 반드시 그 나라 말을 어느 정도는 공부하자는 것이 나의 원칙이다.

덴마크 연수 중 또 하나의 에피소드가 있다. 내가 체류하는 동안 스위스에서는 월드컵이 열리고 있었는데 우리나라 대표팀이 사상 처음으로 본선에 진출했다.

내가 그랬던 것처럼 비행기를 몇 차례 갈아타고 서른 시간이 넘게 걸려 왔으니 선수들은 비행기에서 내리자마자 녹초가 되었다고 한다. 예산도 빠듯해 스태프도 몇 명밖에 오지 못했고 선수들은 난생 처음 겪는 시차와 현지 환경에 적응하는 것만으로도 고통스러웠을 것이다.

그 때문이었을까. 월드컵 데뷔전이었던 헝가리전에서 한국은 0:9로 참패를 당하고 말았다. 9골 차 패배는 훗날 1974년 아프리카의 자이르가 유고에 0:9로 패하고, 1982년 엘살바도르가 헝가리에 1:10으로 대패한 것과 함께 최다 골 차 패배 기록 공동 1위에 올라 있다.

한국은 2차전에서도 터키에 0:7로 패하고 탈락했다. 한 대회에서 한 팀이 16골을 실점한 것은 지금까지 최다 기록으로 남아 있다.

하지만 그때가 1954년으로 휴전한 다음해였음을 감안하면 전쟁의 폐허에서 헝그리정신으로 연습한 선수들이 본선에 진출한 것만으로 기적이었다.

정부에서 일하는 사람으로서 나는 대표팀 선수들을 위로하고 격려해주는 것이 도리라고 생각했다. 밥이라도 한 끼 사주어야겠다는 생각에 스위스로 넘어갔다. 한국팀 숙소를 물어물어 찾아갔는데 어찌된 일인지 선수들이 보이지 않았다. 부상을 당해 홀로 숙소를 지키고 있는 선수에게 물어보았다.

“우리 선수들 다 어디 있습니까?”

“다들 시내에 갔습니다. 귀국하면서 시계라도 하나 사가야겠다고……”

순간 마음이 짠했다. 당시 한국에서는 ‘시계’ 하면 ‘스위스제’ 하는 환상이 있었다. 전쟁 직후의 최빈국 대표팀이 이역만리 스위스까지 와서 참패를 당하고 그 모멸감과 허탈한 마음을 스위스제 시계로라도 달래고 싶었던 게 아닐까 생각하니 가슴 한 구석이 먹먹했다.

그랬던 우리가 50년도 안 되어 월드컵을 개최하고 세계 4강에까지 진출하고 세계 10대 경제대국으로 우뚝 섰으니 그때 그 ‘스위스제 시계’보다 우리가 이겨낸 ‘열정의 시간’이 더 명품이 아닐까 생각해본다.

7개월의 덴마크 연수는 나에게 많은 배움과 체험을 선사해 주었다. 한국으로 돌아오는 길에 미국에 들러 여러 곳을 둘러보며 견문을 넓혔다.

◆ 남기동 선생은...

1919년 평양에서 태어났다. 올해로 100살이다. 일본 제6고등학교를 수석으로 졸업하고 경성제국대학 신생 이공학부 응용화학과에 편입했다. 1946년 중앙공업연구소 지질광물연구소장, 요업 과장으로 근무하며 서울대, 고려대, 한양대 등에도 출강했다. 부산 피난 중에도 연구하며 공학도들을 가르쳤다. 6·25 후 운크라 건설위원장을 맡아 1957년 연산 20만 톤 규모의 문경시멘트공장을 건설했다. 화학과장, 공업국 기감(技監)으로 인천판유리공장, 충주비료공장 등 공장 건설 및 복구사업을 추진했다. 1960년 국내 대학 최초로 한양대에 요업공학과를 창설하고 학과장을 맡았다. 1962년 쌍용양회로 옮겨 서독 훔볼트의 신기술 ‘SP킬른(Kiln)’ 방식으로 1964년 연산 40만 톤 규모의 영월공장을 준공했는데, 최단 공사기간을 기록해 은탑산업훈장을 받았다. 영월공장 준공으로 우리나라는 시멘트 수출국으로 부상했다. 1968년 건설한 동해공장은 단위공장으로는 세계 최대 규모였다. 공장 증설을 거듭해 1992년 우리나라 시멘트 생산량은 세계 5위가 되었다. 1978년 동양시멘트로 자리를 옮겨 2차 오일쇼크 때 시멘트 생산 연료를 벙커씨유에서 유연탄으로 대체하는 기술을 개발, 특허 대신 공개를 택해 업계를 위기에서 살려냈다. 이 공적으로 1981년 '3·1 문화상(기술상)'을 받았다. 인도네시아 수하르토(Suharto) 대통령 요청으로 1992년 인도네시아 최초의 시멘트공장인 '시비뇽 시멘트플랜트(P.T. SEMEN CIBINONG)'를 건설했다. 한국요업(세라믹) 학회, 한국화학공학회, 대한화학회등 3개 학회, 대한요업총협회(지금의 한국세라믹총협회) 회장으로 학계와 산업계의 유대를 다졌다. 학교, 연구소, 산업체가 참석하는 '시멘트심포지엄'을 개최하고, 한일국제세라믹스세미나를 조직해 학술교류는 물론 민간교류에도 힘썼다. 세라믹학회는 그의 호를 따 장학지원 프로그램인 '양송 상'을 제정했다. 1993년 인하대에서 명예공학박사 학위를 받고, 2006년 서울대 설립 60돌 기념 '한국을 일으킨 60인' 상, 2007년 세라믹학회 창립 50주년 특별공로상을 받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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