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비전e] 1955년 11월, 경북 문경군 점촌읍 신기리에 연산 20만 톤 규모의 시멘트공장을 건설하는 역사적인 프로젝트가 시작되었다.

1957년 20만 제곱미터 부지에 5만 제곱미터가 넘는 건축시설을 가진 거대한 시멘트공장이 탄생했다.

엔지니어들은 미국에서도 오고 덴마크에서도 왔는데 길이 나빠 오기를 꺼렸다.

비행기를 타고라도 적시에 도착할 수 있도록 공장 옆 부지에 경비행장을 짓고 활주로까지 닦도록 했다. 시멘트공장에 자가용 비행장이 있는 곳은 문경밖에 없었다. 철도를 끌어오고 전기도 끌어왔다.

국내 최초의 근대식 공장이자 국토 재건의 신호탄이 된 것이 문경공장이다. 최신 설계와 기술로 건설된 문경공장 준공으로 매년 500만 달러 이상의 외화를 절약하게 되었다.

문경공장에서 나온 시멘트로 갈증이 풀리기 시작했다. 춘천댐도 문경공장 시멘트로 완공되었다. 1961년 9월 착공해 3년 6개월 만에 완공된 대규모 공사였다. 길이가 400미터가 넘고 높이가 40미터에 달했다. 우리가 만든 시멘트로 할 수 있었다는 것이 자랑스러웠다.

산업 부흥이 궤도에 오름에 따라 문경공장은 쉴 새 없이 돌아갔다. 성수기에는 수송차가 밀려 며칠씩 대기한 채로 자야 200포대를 싣고 갈 행운을 얻었다.

문경공장이 준공된 덕분에 초토화된 남한의 토목, 건축, 도로포장 등이 추동력을 받게 되었다.

우리나라가 시멘트 건설에서 기술자립을 하게 된 것이다. 문경공장을 시작으로 강원도 영월, 충북 단양과 제천, 경기도 소사 등 전국 각지에 시멘트공장이 들어섰고, 여기에서 만들어진 시멘트는 전국 건설현장으로 공급되었다.

문경공장은 새마을사업으로 건설경기가 한창이었을 때 직원이 700명이 넘었고, 협력업체까지 합하면 1,000명이 넘게 일하는 문경 최대의 기업이었다.

 

◆ 남기동 선생은...

1919년 평양에서 태어났다. 올해로 100살이다. 일본 제6고등학교를 수석으로 졸업하고 경성제국대학 신생 이공학부 응용화학과에 편입했다. 1946년 중앙공업연구소 지질광물연구소장, 요업 과장으로 근무하며 서울대, 고려대, 한양대 등에도 출강했다. 부산 피난 중에도 연구하며 공학도들을 가르쳤다. 6·25 후 운크라 건설위원장을 맡아 1957년 연산 20만 톤 규모의 문경시멘트공장을 건설했다. 화학과장, 공업국 기감(技監)으로 인천판유리공장, 충주비료공장 등 공장 건설 및 복구사업을 추진했다. 1960년 국내 대학 최초로 한양대에 요업공학과를 창설하고 학과장을 맡았다. 1962년 쌍용양회로 옮겨 서독 훔볼트의 신기술 ‘SP킬른(Kiln)’ 방식으로 1964년 연산 40만 톤 규모의 영월공장을 준공했는데, 최단 공사기간을 기록해 은탑산업훈장을 받았다. 영월공장 준공으로 우리나라는 시멘트 수출국으로 부상했다. 1968년 건설한 동해공장은 단위공장으로는 세계 최대 규모였다. 공장 증설을 거듭해 1992년 우리나라 시멘트 생산량은 세계 5위가 되었다. 1978년 동양시멘트로 자리를 옮겨 2차 오일쇼크 때 시멘트 생산 연료를 벙커씨유에서 유연탄으로 대체하는 기술을 개발, 특허 대신 공개를 택해 업계를 위기에서 살려냈다. 이 공적으로 1981년 '3·1 문화상(기술상)'을 받았다. 인도네시아 수하르토(Suharto) 대통령 요청으로 1992년 인도네시아 최초의 시멘트공장인 '시비뇽 시멘트플랜트(P.T. SEMEN CIBINONG)'를 건설했다. 한국요업(세라믹) 학회, 한국화학공학회, 대한화학회등 3개 학회, 대한요업총협회(지금의 한국세라믹총협회) 회장으로 학계와 산업계의 유대를 다졌다. 학교, 연구소, 산업체가 참석하는 '시멘트심포지엄'을 개최하고, 한일국제세라믹스세미나를 조직해 학술교류는 물론 민간교류에도 힘썼다. 세라믹학회는 그의 호를 따 장학지원 프로그램인 '양송 상'을 제정했다. 1993년 인하대에서 명예공학박사 학위를 받고, 2006년 서울대 설립 60돌 기념 '한국을 일으킨 60인' 상, 2007년 세라믹학회 창립 50주년 특별공로상을 받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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